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지훈 Dec 11. 2022

I fall in love too easily

낭만? 망상?

프레이저는 자기가 사는 동네를 버블이라고 표현했다. 필요한 모든 게 다 있는 세계라는 뜻이었다. 한쪽으로는 바와 클럽이 즐비했고 다른 쪽으로는 카페와 브런치 가게들이 수두룩했다. 바다에도 금방 걸어갈 수 있었다. 게이 인구가 부쩍 많은 동네이기도 했다. 프레이저는 게이 친구들 정기 모임에도 자주 나갔다. 한 번씩 크게 모여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시는 자리였다. 프레이저는 모임에 나가기 싫다고 투정을 부리곤 했다. 누가 더 돈을 많이 벌고, 누가 더 좋은 연애를 하고, 누구 몸이 더 좋아졌는지 비교하기 바쁜 자리라고 했다. 싫은데도 프레이저는 이들을 만나러 꼭 나갔다. 소외되는 게 싫은 것 같았다.

프레이저의 친구와 한 번 저녁을 먹은 적이 있었다. 밥을 먹는 내내 그 둘은 다른 사람 흉 보기에 바빴다. 이번엔 누가 꼴불견 짓을 했고 어떤 실언을 했는지 입방아를 찧었다. 내가 대화에 끼지 못하자 친구는 신경이 쓰였는지 내게도 몇 번 질문을 했지만 이야기는 금방 흉 보기로 돌아갔다. 그게 너무 지루하고 한심해서 나는 친구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는 노력도 다 관두고 불편한 티를 그대로 내보였다.

친구와 헤어지자마자 내가 프레이저에게 쏘아붙였다. 너네 둘이서 나는 모르는 남 얘기할 거였으면 나는 왜 불렀냐? 시내의 바쁜 거리였다. 화가 나서 남들 보는 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그렇게 성을 내는 건 나에겐 아주 드문 일이었다. 기껏 친구 소개해주는 자리에서 그러고 앉아있는 꼴이 너무 천박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재미를 나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남 허물을 낱낱이 들춰대고 맞다 맞다 공감해가며 사람과 친해지는 일은 나도 많이 겪어봤다. 친구들 모이는 재미의 절반이 그거라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럴 때와 장소가 있었다. 프레이저는 그게 그렇게 성낼 일이냐는 반응이었다. 내가 견디지 못하는 대화 주제들이 있었다. 밑도 끝도 없는 남 흉, 연예인 얘기, 주식이나 부동산 얘기. 아니면 만나서 각자 핸드폰반 보기. 프레이저가 그의 주변 사람들과 지내는 걸 보면서 어떤 사람인지 더 잘 알 수 있었다. 나와는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건 프레이저도 마찬가지로 느꼈을 것이다. 프레이저는 남자 친구도 갖고 싶으면서 도시의 자유로운 게이로도 살고 싶은 것 같았다. 우리가 막 사귀는 사이가 되었을 때 그의 핸드폰에서 언뜻 데이팅 앱을 본 일이 있었다. 내가 따지자 프레이저는 쓰진 않고 있었다며 바로 지웠지만 내가 발견하지 않았다면 계속 다른 누군가와 매칭을 하고 대화를 하고 있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데이팅 앱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그래서 프레이저를 몇 번 만나고 얼른 없애버렸다. 둘이 알콩달콩 해놓고 돌아서서 또 다른 사람과 노닥거리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데이팅 앱 어딘가에 더 나은 어떤 이가 있을 거라는 여지를 남기기가 싫었다. 근데 그게 연애를 너무 쉽게 시작하는 실수임도 깨달았다. 겨우 한두 번을 만나 놓고 내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어서 앱을 지우며 진지를 떠는 것도 문제였다. 연애를 한 번도 해보지 못해서 나는 너무 간절했다.

좋게 말하면 사랑에 너무 쉽게 빠진다고도 할 수 있었다. 세바스찬도 그랬던 것 같았다. 사랑이 마냥 하고 싶어서 상대를 제대로 알기도 전에 머릿속으로 완벽한 파트너의 모습과 둘의 미래를 그려놓는 것이다. 상상이 틀렸다는 건 금방 깨닫기 마련이고 곧 상심에 빠진다. 성급하게 군 건 프레이저 쪽도 있었다. 프레이저는 나를 만나고 얼마 되지 않아 그의 형제들이 있는 단체 채팅방에 한국인 남자 친구가 생겼다고 말했고 형제들은 다 같이 한국 여행을 가는 것이냐고 호들갑을 떨었다. 프레이저는 나를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동생도 만나고 친구들도 만나게 했다. 나에게도 남자 친구가 생겼단 자랑을 하고 싶은 것도 같았다. 그나 나나 연애 경험이 없어서, 이성애자들은 몇 번이나 했을 사랑질을 이제 처음 해봐서 어설픈 것이었다. 프레이저와 시드니의 밤거리를 걸으며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오페라 하우스 앞에서 키스를 하는 셀카를 찍은 적이 있었다. 그런 짓들이 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진을 보자마자 너무 유치해서 바로 지워버린 게 다행이었다.) 

어느 날 쳇 베이커가 부른 ‘I fall in love too easily’라는 노래를 듣고 사랑에 쉽게 빠진다는 말을 저렇게 낭만적으로 할 일인가 싶은 뒤틀린 마음마저 들었다. 사랑에 쉽게 빠진다는 게 말이 좋아서 낭만적이지 실제로는 똥인지 된장인지 구별을 못해서 저러지 싶었다. 사랑에 쉽게 빠지는 게 저에게만 있는 특별함인 줄 아나. 메트로에서 앞에 앉은 남자의 뒤통수만 보고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사진 몇 장과 채팅 몇 번만으로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다 직접 만나고는 큰코다치는 것이다. 그래 놓고 항상 상처를 받는다며 자기 연민 가득한 노래를 한다? 망상이다.


본다이 해변의 야외 수영장


작가의 이전글 남자친구. 캔버라. 에스프레소 마티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