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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용 Feb 28. 2022

강인한 인간

노인과 바다 서평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이하 본작)는 인간의 강인함에 관해 상세히 서술한다. 비교적 짧은 소설이지만 그 깊이는 쉽게 헤아릴 수 없다. 아직도 다양하고 새로운 관점에서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것이 그 이유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본작을 다루는 여러 논문은 실존주의, 스토이시즘 등과 같은 시선과 본작에 내재한 종교적 상징, 영웅적 서사 등에 집중한다. 본작을 향한 이러한 접근은 굉장히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각각 주제로 몇 편의 논문이 존재하는데 일반인이 모든 항목을 명확히 이해하긴 매우 어렵다. 본 서평에서는 본작의 주제에 다가가면서 필요한 철학적 의견 및 해석을 첨부하되, 소설 자체 내용에 집중할 예정이다. 


 '산티아고'는 실력 좋은 베테랑 어부이지만, 이제는 운이 다 떨어졌다고 말하며 84일 동안 물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소년 '마눌린'에게는 고기잡이를 알려준 정신적 지주지만 마을에서 '산티아고'는 존중받지 못하는 노인이다. '산티아고'는 '마눌린'의 부모님에게도 가장 운이 없는 사람인 '살라오'라 불리며, 다른 마을 사람들은 '산티아고'를 조롱했다. '산티아고'는 그런 시선에 동요하지 않았다.  

 '마눌린'은 '산티아고'의 보호자 역할을 자처했다. '산티아고'가 먹을 것이 없어 굶고 있을 때 '마눌린'은 마을에서 먹을 것을 얻어 왔다. 낚시할 때 필요한 미끼를 구해주기도 했다. 이때 '산티아고'의 도덕 의식을 엿볼 수 있는다. '산티아고'는 '마눌린'이 미끼를 훔쳐 왔다면 받지 않겠다 말하고, 자신은 돈을 빌리는 것을 피한다고 말한다. '산티아고'는 제대로 끼니를 때울 수 없는 어려운 상황 속에 살고 있지만, 절제를 통해 강한 도덕적 규칙을 스스로 적용하고 있었다. '산티아고'의 강직한 태도는 그의 육체에서도 나타난다. 


 "비록 나이가 들었어도 그의 어깨에는 아직도 이상하리만큼 힘이 흘러넘쳤다. 목에도 여전히 힘이 있었고 고개를 앞쪽으로 떨어뜨리고 잠을 자고 있을 때면 주름살도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노인답지 않은 강인한 육체인 것을 면밀히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산티아고'는 투박해 보일 수 있지만 정직하다. 묵묵히 자신 앞에 놓인 문제를 해결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산티아고'에게 바다는 어머니이고 바다에서 마주하는 대부분은 형제이다. 그렇다고 모든 생명체를 형제라 부르진 않는다. 고깔해파리처럼 무지갯빛 독을 뿜어내고 남을 속이는 존재에겐 한껏 욕을 뱉어준다. 

 

  무지갯빛 거품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거품은 바다에서도 가장 허황하기 짝이 없는 것이라 (...) 노인은 바다거북이 그것들을 먹어 치우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산티아고'가 출항을 앞두고 바다거북의 알을 먹은 것은 표면상으로는 기력을 돋우려고 했다 하지만,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바다거북의 생명을 섭취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숭고한 의식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산티아고'는 오직 낚시에만 몰두한 어부였다. 낚시 외에 관심을 두는 것이 있다면 야구라고 할 수 있다. 야구 경기 자체보다는 야구 선수인 '디마지오'를 좋아하는 모습이 보인다. '디마지오'는 가상 인물이 아닌 실존 인물로 1930~1940년대 미국을 풍미한 당대 최고 스포츠 스타였다. '산티아고'에게 '디마지오'는 당대 훌륭한 야구선수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디마지오'의 아버지는 어부였다. '산티아고'는 오래된 신문 말고는 딱히 책을 읽지도 않는 인물이다. 심지어 좋아하는 야구 경기도 최신 소식을 찾아보지도 않고 오래된 소식도 그냥 손에 잡히면 지금처럼 받아들이는 편이다. 그런 '산티아고'에게 어부라는 것은 다른 것보다 끈적한 유대감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이야깃거리기도 하다. 그리고 '디마지오'는 발뒤꿈치에 '뼈돌기'가 있었다. '뼈돌기'는 '산티아고'가 보았을 때 '디마지오'의 약점이자 '디마지오'가 극복한 하나의 벽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손이 발뒤꿈치처럼 그렇게 불리한 조건이었을까? 


 '산티아고'는 출항 중 손을 다치고 육체적 정신적으로 지쳐있을 때 '디마지오'의 '뼈돌기'를 떠올린다. '뼈돌기'를 극복한 '디마지오'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산티아고'도 자신이 나아가고자 하는 길이 불가능하지 않다고 느꼈을 터이다. '산티아고'에게 '뼈돌기'는 용기, 의지 등 불평하지 않고 우직하게 나아가는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산티아고'는 물고기를 못 잡은 지 85일이 되던 날, 결의를 다지고 출항한다. 이때, 같은 배에 타고 싶다는 '마눌린'에게는 '산티아고'가 자신은 운이 떨어졌으니 다른 배에 타라고 거절하게 된다. 그렇게 홀로 망망대해로 떠난 '산티아고'에게 거대한 청새치가 나타난다. 이제 이야기는 '산티아고'와 청새치의 사투를, 뜨거운 생명 대 생명의 전쟁을, 생존을 위한 결사 항쟁을 풀어나간다. 고결한 투쟁 속에서 '산티아고'는 청새치에게 존경심이 피어오른다. 


   "고기야, 나는 너를 끔찍이도 좋아하고 존경한단다. 하지만 오늘이 가기 전에 난 너를 죽이고 말 테다."


 '산티아고'와 청새치는 나흘간 대치한다. 인간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은 극한에서 '산티아고'는 포기하지 않는다. 


  난 지금껏 너보다 크고, 너보다 아름답고, 또 너보다 침착하고 고결한 놈은 보지 못했구나. 자, 그럼 이리 와서 나를 죽여 보려무나. 누가 누구를 죽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산티아고'에게 이 싸움은 싸움 그대로도 커다란 의미가 되었다. 누가 누굴 죽여도 치열하게 주고받은 합은 이미 실존하는 사실이었다. 나흘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피도 많이 흘려 정신은 혼미해졌지만, '산티아고'는 결국 청새치의 심장에 작살을 꽂아 넣었다. 청새치의 죽음을 통해 뿜어져 나오는 시뻘건 생명의 색깔은 '산티아고'의 승리를 축복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산티아고'는 자신의 배보다 큰 청새치를 배에 싣지는 못하고 옆으로 묶어둔다. 승리를 만끽할 시간도 없이 '산티아고'는 배를 돌려 마을로 돌아간다. 


  고기가 습격을 받았을 때 마치 자신이 습격받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강렬한 피비린내는 바다의 포식자인 상어를 자극했다. '산티아고'는 마을로 돌아가기까지 수차례 상어의 습격을 받았다. 이미 청새치 때문에 극심한 피로가 누적된 '산티아고'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혈투 끝에 '산티아고'에게 피를 흩뿌린 청새치는 이미 '산티아고'에게 고기 이상의 가치였다. 그것은 패배하지 않은 승리의 정신이기도 했다. 


 "아!" 노인이 큰 소리로 외쳤다. 이 외침 소리는 다른 어떤 말로도 옮겨 놓을 수 없었다. 손바닥을 뚫고 널빤지에 못이 박히는 것을 느낄 때 무의식적으로 지르는 그런 소리라고나 할까. 


 상어의 공격을 방어하다 '산티아고'는 계속 상처를 입는다. 근데 그 부상이 마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성흔 같기도 하다. '산티아고'는 취득한 승리이자 자신의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청새치를 위해 희생하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상어를 물리치는 '산티아고'의 모습은 성스럽기까지 했다. 


 한밤중에 상어 놈들이 다시 공격해 오면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할 작정이냐고?

"놈들과 싸우는 거지. 죽을 때까지 싸울 거야." 


 '산티아고'는 마을로 돌아왔다. 그가 그토록 지켜냈던 청새치는 머리와 꼬리만 남긴 채 앙상한 뼈를 드러내고 있었다. '산티아고'는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처럼 닻을 이고 자신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상어로 인해 파멸했던 '산티아고'가 승리자로 탈바꿈하는 모습이었다.  


 이제 '산티아고'는 '마눌린'이 같이 배를 타고 나가자는 부탁에 거절하지 않는다. 또, 자신이 없던 동안 생긴 소식이 궁금해 신문을 부탁한다. '산티아고'는 자신으로 인해 누군가 해를 입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스스로 고립시켰었지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산티아고'는 영원한 승리자로 기록될 것이기 때문이다. 


 본작을 읽고 '산티아고'의 승리에 의문을 품을 수는 있다. 결국 상어에게 청새치의 살코기를 전부 빼앗겨 상품 가치가 없는 뼈대만 들고 왔는데 그것을 과연 승리라고 할 수 있겠냐고 생각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생각이다. 그러나 본작에서는 해당 부분을 확실히 규정한다.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본 서평의 첫 줄에도 적은 인용문이지만 다시 적어본다. 이것이 '산티아고' 아니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입장이다. 상어로 인해 뜯긴 살코기, 결국 시장 가치가 없어 나흘 동안 고생이 아무런 경제적 이익을 갖다주지 못한 상황은 그저 파멸일 뿐이다. '산티아고'는 청새치에게 이어받은 생명을 끝까지 마을로 옮겼다. 뼈대만 남은 청새치라고 해도 5.5m에 이르는 모습은 위용을 떨친다. 고집 있고 강한 규정 안에서 사는 '산티아고' 자신도 이제 '마눌린'을 데리고 항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마을 어부는 '산티아고'가 갖고 온 청새치의 뼈대만 봐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산티아고' 어떻게 살아 마을로 돌아왔는지 이해한다면 이제 마을에서 '산티아고'를 조롱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할 수 있다. 

 

 본작을 읽고 드는 감상은 인간의 묵직한 발걸음 같다는 느낌이다. 흔들림 없이 몰입하고 자신의 가치를 창출하는 인간. 그런 인간에게는 신념이 내재한다. 남의 시선이 중요하고, 지금 자신이 하는 일에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는 나날이 반복된다면, 본작을 읽어 보라. '산티아고'를 이해한다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단언한다. 


-도서 정보


출판사 : 민음사

작가 : 어니스트 헤밍웨이

옮긴이 : 김옥동


-참고자료


이창우, 좋은 삶과 대중을 위한 철학의 역할 아리스토텔레스, 에피쿠로스, 스토아, 2020.


정길화, 고전으로서의 『노인과 바다』의 종교적 상징 기법과 산티아고의 양면성,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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