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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동 Feb 06. 2024

여기에 인간이 있었다

다랑쉬굴의 슬픈 노래

아끈다랑쉬오름의 정남 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4·3 당시 피난민의 은신처였던 작은 굴 있다. 은빛 억새풀이 떠도는 넋처럼 흔들리는 아끈다랑쉬에서 내려다보이곳이기에 더욱 가슴을 아프게 한다. 제주를 찍는 사람 강 선생'아끈다랑쉬라 쓰고 아픈다랑쉬라 읽는다'라고 여러 차례 강조한 다랑쉬굴을 찾아간다.

다랑쉬굴 가는 길

'잃어버린 마을, 다랑쉬' 표지석을 이정표로 삼으면 찾기 쉽다. 다랑쉬 오름을 등 뒤에 두고 밭담을 따라 남서쪽으로 들어간다. 표지석에서 800여 m 떨어진 곳에 다랑쉬굴이 있다.


다랑쉬마을 표지석은 소개 당시 마을은 전소되었지만 인명 피해는 없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1992년, 이 굴에서 4·3 희생자 유골 11구가 발견된다. 다랑쉬굴 유해는 발견 당시부터 4·3 참극의 상징이 된다.

'잃어버린 마을 다랑쉬' 표지석(왼쪽), 다랑쉬오름 안내판(오른쪽)


다랑쉬굴의 발견


제주 4·3 연구소는 1992년 3월 29일 제민일보와 함께 다랑쉬마을 남서쪽 중산간 해발 170m 지점에 위치한

학살현장을 조사한다. 그리고 4월 2일 다랑쉬굴 유해 발견 사실을 제주경찰서에 신고했다. 이날 현장을 검증한 제주도지방경찰청은 발굴된 유해 11구는 집단자살한 것으로 죽음의 원인을 추정하고, 사망자는 세화리 습격사건에 가담한 무장대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설득력이 없었다.

제주4·3연구소와 제민일보 4·3 취재반이 공동으로 다랑쉬굴을 조사하는 모습. <제주4·3평화기념관 제공>


'다랑쉬굴 사건'의 전모


1948년 12월 18일, 제9연대 제2대대다랑쉬오름 일대를 수색하다가 피난민과 그들의 은신처를 발견했다. 토벌대는 굴 밖에 있던 사람들을 총살한다. 굴속에 수류탄을 까서 던지며 사람들에게 나오라고 외친다. 나가도 죽을 것을 우려한 주민들은 겁을 먹고 나오지 않는다. 토벌대는 굴 입구에 불을 지펴 연기를 불어넣고 굴 입구를 봉쇄했다. 군경 토벌대를 피해 안전하다고 숨어든 굴 속에 갇힌 주민들은 연기에 질식되어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

다랑쉬굴 학살현장을 복원하여 조성한 4·3평화기념관 다랑쉬굴 특별전시관

4월 2일 첫 보도 이후 언론의 집중적인 취재를 통해 사건 날짜,  학살 경위 및 상황, 희생자의 신원과 유족 등 사건의 전모가 밝혀진다. 희생된 이들은 4·3 당시 초토화작전을 피해 굴속으로 숨어들었다가 참화를 당한 구좌읍 하도리와 종달리 피란민들이었다. 그중엔 여성 3명과 아홉 살 난 아이도 포함돼 있었다.

발굴 당시 다랑쉬굴 유골과 유물의 위치

다랑쉬 굴 속에서는 안경, 혁대 버클, 가죽신, 고무신, 사발, 무쇠솥뚜껑, 솥, 놋그릇, 놋수저, 항아리, 물허벅, 접시, 양푼, 물통, 가위, 요강, 화로, 구덕, 주전자, 주걱 등의 생활용품과 낫, 도끼, 톱, 곡괭이, 숫돌 등 연장류가 발견되었다.



“폭도들의 무덤을 만들 수 없다"


언론을 통해 사건의 실체가 하나하나 밝혀지면서 유족과 도민들은 한과 상처를 치유하려는 방향으로 여론을 모아갔다.  다랑쉬굴 4·3 희생자의 장례를 ‘도민장’으로 치르고 양지바른 곳에 합동묘역을 조성하여 화합의 징표로 삼고자 했다. 하지만 숨죽이고 있던 극우세력이 준동한다. 색깔론이 불거진다. 4·3 당시 무장대에게 피해를 당한 유족들도 동원된다. "폭도들의 무덤을 만들 수 없다."라고 주장하며 레드 아일랜드의 공포를 일깨운다.

1992년 발굴 당시 유해 및 유골


다랑쉬굴의 슬픈 노래


도민장은 무산된다.

4·3 연구소를 비롯한 도내 각계의 염원과 노력은 수포로 돌아간다. 제주 4·3의 참상이 전국으로 퍼져나가 사회적 파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한 민자당 정권은 화장을 결정한다. 결국 유해는 1992년 5월 15일 한 줌의 재가 되어 김녕리 앞바다에 뿌려진다. 그리고 다랑쉬굴 입구를 콘크리트로 막아버렸다.


"이렇게 허망하게 섬을 떠나고자 40년 세월 참아온 건 아닌데. 이렇게 억울하게 한라산을 등지자고 칠흑 어둠에서 두 눈 부라리고 기다려 온 건 아닌데. 허나 서러워 마라, 내 아주 떠나는 건 아니니. 그 좋은 날에 억새꽃 따라, 그대들 곁으로 다시 오리니 서러워 마라, 서러워 마라.” 


독립영화 ‘다랑쉬굴의 슬픈 노래’는 유해를 뿌리려 바다로 떠나는 마지막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다량쉬굴 내부에서 발견된 피난민들의 상할용품(왼쪽), 유해를 화장해 바다에 뿌리며 오열하는 유족(오른쪽)

다랑쉬굴의 유해 발굴은 그동안 소문으로 전해지던 4·3 학살의 실상을 알리는 단초가 되었다. 발견된 유해를 제대로 된 장례 절차도 없이 허무하게 보낸 것은 진실 규명을 외면하고 사실을 왜곡하려는 기득권 세력의 존재를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마치 조국 장관 일가의 수사 과정을 보면서 말로만 듣던 정치 검찰의 횡포를 확인하듯이.

다랑쉬굴 유적지

'다랑쉬굴'이라고 적힌 나무 안내판이 길을 안내한다. 하지만, 다랑쉬굴은 쉽게 찾을 수 없다. 용눈이오름이 내려다보는 야트막한 언덕의 바위 밑에 움푹 파인 곳이 보이지만 표식은 없다. 관심을 갖고 찾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곳이다. 억새와 온갖 가시덤불로 뒤엉켜 있다. 사진을 찍으려다가 가시덤불에 걸려 중심을 잃는다.

 '제주 4·3 유적지(다랑쉬굴)'이라고 적힌 안내판과 리본이 주렁주렁 달린 다크투어 스탬프함이 서 있다. 앞서 온 두 부부가 검은색 안내판을 보고 있다.

봉인된 다랑쉬굴

굴 입구라고 짐작한다. 입구를 큰 바위로 막아 놓았다. 바위 위에 주인을 잃은 검정 고무신이 놓여 있다. 제주 4·3의 참상과 학살의 실체적 진실을 품고 있는 다랑쉬굴. 굴이 발견되고 그 유해가 공개된 지 30여 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굴입구가 막힌 채 를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다.



여기에 인간이 있었다. 삶이 있었다.


안내판 외에는 아무것도 없던 다랑쉬굴. 유해를 발굴한 지 10주년이 되던 2002년 4월에서야 제주 4·3 연구소와 제주민예총이 공동으로 굴 입구에 표석을 세운다.

제주 4·3 연구소와 제주민예총이 공동으로 세운 표석

여기에 인간이 있었다. 삶이 있었다. 우리는 죽은 자들. 죽었으나 죽지 않는다. 우리는 캄캄한 굴 속 연기에 갇혀 연기로 떠도는 자들. 사라지지 않는 자들이다. 우리는 다만 살기 위해 깊이 들었을 뿐 마지막 숨이 막힐 때까지 서로 놓지 않는다. 엄마는 한줄기 숨을 아이에게 주었고, 연기의 소리가 인간에게 닿기를 기다렸다.


부디 우리를 기억해 주기 바란다. 우리의 그날이 당신들의 존엄이기를, 희망이기를, 평화이기를 바란다. 당신의 그 자리. 서럽도록 아름다운 다랑쉬의 명예를 지켜주길 바란다.


이제 우리는 두려움 없는 파도가 되었다. 당신들은 우리가 그토록 찾던 봄이다. 그대. 그러니 더 이상 슬퍼하지 말기를. 이것이 우리들의 전언이다.



주변 정비와 성역화를 할 필요가 있다.


4·3 평화기념관에는 다랑쉬굴 특별전시관이 조성되어 있다. 정작 양민 학살의 상징적인 공간인 다랑쉬굴 주변에는 아무런 흔적도 찾아볼 수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주변 정비와 성역화를 할 필요가 있다.

다랑쉬굴 학살현장을 복원하여 조성한 4·3평화기념관 다랑쉬굴 특별전시관

기억하자. 기록하자. 후손들에게 그날의 참상을 전하자. 다시는 이러한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게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자. (2023.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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