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령산맥은 백두대간의 오대산에서 갈라져 서해로 나지막하게 뻗어 내린다. 그 끝자락에 덕숭산이 솟아 있다. 가야산, 오서산, 용봉산에 둘러싸여 마치 병풍을 두른 듯하다. 이 덕숭산 중턱,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안길 79에 명승고찰 수덕사가 자리잡고 있다.
앞으로 용봉산이 둘러싸고 있는 수덕사
수덕사하면 언양 석남사나 청도 운문사 같은 비구니절로 생각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여승들의 선방이 있고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대중가요가 있기도 하지만, 경허와 만공스님이 있었고 덕숭중문을 이룬 고찰로 비구니절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청순한 이미지가 있는 것은 수덕사와 직간접적인 사연을 가진 여인의 이야기가 세간에 전해져 유명해진 탓이 아닌가 한다. 선문을 들어선다.
선지종찰 덕숭총림 수덕사 선문
옛날부터 수덕사에 전해 내려오는 설화가 있다. 통일신라 때 수덕사는 대중창불사를 하면서 불사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때 공양주를 자청하는 미모가 빼어난 묘령의 여인이 나타난다. 수덕사에는 '수덕'각시라고 알려진 이 여인을 보려는 사람들로 연일 북적인다. 그 중 신라 대부호의 아들인 '정혜'라는 청년이 있었는데 수덕각시에게 청혼을 하기에 이르고, 가산을 보태어 불사를 원만히 끝내게 한다.
대 공덕주로 낙성식에 참석한 이 청년이 수덕각시에게 같이 떠날 것을 권유하자, 그 순간 옆에 있던 바위가 갈라지며 여인은 버선 한 짝만 남기고 사라진다. 이후 그 바위 틈 사이로 봄이 오면 버선모양을 한 꽃이 피고 있단다. 수덕각시는 관음보살의 현신이었다. 그 여인의 이름에 따라 절이름을 수덕사라고 부르게 되었단다. 사랑하는 여인을 떠나보낸 정혜라는 청년은 인생무상을 느끼고 산마루에 올라가 정혜사라는 절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 출처 대한민국 구석구석
원래 설화가 다 그렇지만 여러 버전이 있다. 각시는 덕숭낭자로, 청년은 수덕도령으로 전해지는 또 다른 버전이 있다. 어찌하였던 대웅전 서쪽 백련당 뒤편에 있는 이 바위를 관음바위, 여기서 피는 꽃을 버선꽃이라 부르고 있다.
1960년에 건립한 수덕사 일주문
사찰의 경내임을 알리는 일주문을 지나면 왼쪽 다리 건너편에 초가집 한 채가 있다. 당대에 내노라하는 문인ㆍ화가ㆍ예술가들이 드나들던 수덕여관이다. 고암 이응노 화백은 이 집을 사들여 수덕사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소재로 작품활동을 하고 부인 박귀희여사는 식당 겸 여관을 운영하였다.
수덕여관. 이응노 화백 사적지(충남도기념물 제103호)
1958년 고암은 제자인 21세 연하의 연인과 함께 파리로 떠나간다. 고암의 본부인은 남편을 젊은 여자와 함께 떠나보내고 홀로 남아 여관을 운영하며 일편단심으로 남편을 기다린다. 사상의 전환기에 우리 주변에서 간혹 보던 순종하며 사는 여자의 일생이라지만, 남편에 대한 원망이나 섭섭함을 조금도 내색하지 않기는 쉽지 않은 일임에도 고암의 본부인은 변치 않는 마음으로 조용히 수절하며 수덕여관을 지킨다.
1968년 소위 '동백림사건'으로 고암이 중앙정보부에 납치되어 교도소에 수감되자, 고암의 본부인은 정성껏 옥바라지를 한다. 1년 후 출옥한 고암은 수덕여관에서 잠시 머무른다. 여관 뒷뜰로 돌아가면 우물 옆에 암각화 두점이 있다. 이 시기에 너럭바위에 새긴 문자적 추상화다.
고암이 너럭바위에 새긴 암각화
"당신 너무 고생하시고 이제 나이도 있으니 좀 쉬지 않고 그 어려운 돌에 글자를 새기는 일을 한다고 그러세요, 좀 쉬세요"
"당신은 모를꺼야, 삼라만상의 성쇠를 만들고 있다네."
고암과 본부인이 나눈 대화다. 고암은 이 말과 함께 암각화만 남기고, 또 다시 프랑스로 훌쩍 떠난다.
수덕여관은 현재 건물의 누수와 지붕 낙수로 보수를 위해 임시 휴관 중이다.
박귀희 할머니는 이 암각화를 바라보며 남편을 기다리다, 2001년 92세를 일기로 쓸쓸히 세상을 하직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수덕여관도, '체념과 순종'을 최고의 덕목으로 지키려던 조선 여인의 가치도 슬픈 이야기 속으로 서서히 사라져 간다.
2006년 수덕사가 고암의 조카로부터 매입하여 지방비를 지원받아 복원하였다. 수덕여관은 현재 건물의 누수와 지붕 낙수로 충남도청과 보수를 협의하고 있으며 보수를 위해 임시 휴관 중이다.
금강문
금강문을 지나 왼쪽 개천을 건너 원통보전으로 간다. 원통보전 앞에 환희대가 있다. 환희대는 1926년에 건립한 비구니 스님들의 선방으로 도를 얻으려 수행하는 도량이다. 이곳은 시인이자 신여성이었던 김일엽이 머리를 깎은 견성암이 있던 곳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 선방이다. 현재 견성암은 더 윗쪽으로 현대식 건물을 지어 옮겨가고, 이곳은 환희대라고 부른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화제의 인물 김일엽이 여승이 된 곳이라 더욱 유명한 곳이다.
환희대
환희대. 비구니스님의 도량으로 김일엽이 불교에 입문하여 기거하고 열반한 견성암이 있었던 곳이다.
김일엽은 본명이 김원주다. 1896년 평남 용강에서 개신교 목사인 아버지와 "딸도 잘 키우면 아들보다 낫다"고, 그 당시에 이미 남녀평등을 주장하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일엽은 12세에 '동생의 죽음'이란 신체시를 쓴다. 이화학당, 일본 닛신여학교을 다녔고, 25세에 '신여자'를 창간하여 나혜석등과 함께 여성의 사회적, 인간적 평등을 내세운 최초의 여성이다. 자유연애, 여성해방을 주창하며 활발한 문필활동을 한다.
남편과 이혼한 후, 만공선사의 법문을 듣고 크게 발심하여 1928년 불교에 귀의한다. 수덕사에서 수도생활을 하면서 '청춘을 불사르고', '어느 수도인의 회상' 등 수필과 '오도송' 등 많은 선시를 남기고, 1971년에 열반한다.
이비보탑
환희대 입구에 다보탑처럼 생긴 '이비보탑'이라는 석탑이 세워져 있다. '일엽스님이 입적한 후 일엽스님이 수선정진하던 기념도량을 정비하여 원통보전을 세웠다'고 새겨져 있다.
김일엽은 입적한지 30여년이 지난 후, 다시 한번 주목을 받는다. 김일성종합대학에 걸려 있는 김일성 초상화를 그린 화가로 유명한 일당스님(김태신)이 자전소설 '어머니 당신이 그립습니다'를 발표하면서 일본인 오다 세이죠와의 사이에 오다 마사오(한국이름 김태신)라는 아들이 있다는 사실이 세상에 드러난다.
김태신의 아버지인 오다 세이죠는 '조센징과의 결혼은 절대 못한다'는 집안의 반대에도 김일엽과의 결혼 의사를 굽히지 않고 평생 홀로 살다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일엽스님이 노환으로 누었을 때에 수덕사를 찾아온 오다 세이죠는 일엽스님의 손을 잡고 하염없이 울었다고 일엽스님을 돌보던 여승들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황하정루
황하정루. 대웅전을 보호하고 사세를 안정시키는 전위누각. 부처님의 정신이 강물처럼 흐른다는 뜻이다.
많은 고승들을 배출한 수덕사는 창건에 관한 정확한 문헌 기록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학계에서는 수덕사 경내에서 발견된 백제와당 등의 유물로 추정컨대, 백제 위덕왕(554~597) 때 창건된 것으로 보고 있다.
삼층석탑(충남 문화재자료 제103호)
수덕사의 고려시대 유물로는 충렬왕 34년(1308)에 건축된 대웅전과 통일신라 말기 양식을 모방한 삼층석탑, 수덕사 출토 고려자기, 수덕사 출토 와당 등이 있다. 임진왜란 때 가람의 대부분이 소실되는 병화를 입지만, 대웅전은 옛 모습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다.
1937~40년 보수 당시 대웅전 내부 동측 전면에 기록된 '단청개칠기'가 발견되어, 대웅전이 4차례에 걸쳐 보수되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수덕사 대웅전(국보 제49호). 고려 충렬왕34년(1308)에 건립한 백제 양식의 고려시대 목조 건죽물
수덕사 대웅전은 구조의 단순성, 외형의 간결함이 그 특징이다. 국보 제49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는 대웅전은 긴 댓돌을 몇 줄 겹쳐 쌓은 높은 기단 위에 앉아 있다. 기단의 양쪽 옆에는 건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놓여 있다. 기단의 돌과는 연륜이 달라 보여 최근에 새로 만든 것이 아닌가 한다.
대웅전은 앞면 3칸, 옆면 4칸에 맞배지붕을 얹인 정결한 단층건물이다. 기둥과 창포및 들보를 연결하는 공포를 기둥 위에만 올린, 주심포(柱心包) 집이다.
기둥은 배흘림기둥이다. 둥근 기둥인데 가운데 부분이 볼록하게 부풀어 올라 팽창감을 준다. 배흘림의 정도가 뚜렷하여 지붕의 무게를 가볍게 받쳐 주는 느낌이라 안정감이 있다.
건물 앞면의 3칸에는 각각 3짝, 양 옆면에 각각 1짝의 마름모꼴 무늬의 문이 달려 있다. 간결한 구조가 깨끗하게 정돈된 느낌을 준다.
수덕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복장유물(보물 제1381호) 사진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대웅전은 뒷벽 가운데 기둥 사이에 불화를 그려 놓고, 그 앞에 3개의 불단을 놓았다. 중앙에 6각형 받침의 불단을, 좌우로 약간 낮은 4각형 불단을 설치하고 석가모니불, 약사불, 아미타불을 모셨다. 법당 내부의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한국학중앙연구원 사진을 대신한다.
법당은 들보와 창방과 기둥 등 모든 건축부재를 노출시켜 건축물의 구조를 살펴보기 쉽게 설계되어 있다. 내부 구조도 화려하게 꾸며 놓진 않아 오히려 친근하게 느껴진다. 천장은 연등천장이고, 기둥은 배흘림기둥의 선 흐름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대웅전 측면
옆면은 빈 황토색의 벽으로 처리하였고, 들보와 기둥은 노출되어 있다. 기둥은 둥근데 가운데 기둥만 단면이 네모지다. 들보는 모두 사각으로 깍아 네모지다. 이 노출된 기둥과 들보로 옆면을 (아래 쪽은 넓은 직삭각형을 세우고, 위로는 작은 직사각형을 눕히고, 그 위는 작은 원호를 그리며) 절묘하게 나누어 놓았다. 좌우 벽면이 이 건물을 더욱 아름답게 한다.
법고각
소리로서 부처님의 진리를 전해 해탈성불을 염원하는 불전 사물인 법고, 묵어, 운판을 봉안한 곳으로 아침, 저녁 예불 때 법고, 목어, 운판, 범종 순으로 친다.
관음전 뒤편 계곡을 따라 난 1080돌계단을 오르면 정혜사가 나온다. 만공탑, 관음보살입상, 향운각 등 일제강점기 조선불교의 법통을 지킨 만공스님의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곳이다. 오면서 예당호를 들르는 바람에 시간이 늦어졌다. 시간 예측을 잘못했다. 정혜사로 오르는 것은 아쉽지만 다음 기회로 넘긴다.
수덕여관
선미술관
내려오는 길에 선미술관에 들른다. 수덕여관 앞 마당에서 계단을 내려서면 불교 전문 미술관인 선미술관이 있다. 수덕사 3대 방장스님의 법호를 딴 '원담 전시실'과 고암 이응노 화백의 호를 딴 '고암 전시실'이 있다.
고승들의 선묵ㆍ선서화, 고암의 작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초대전도 하고 있다.
수덕사 사하촌 집단시설지구
사하촌은 아래로 내려와 커다란 광관단지로 변모했다. 넓은 주차장과 즐비하게 늘어선 상가들로 수덕사의 명성을 가늠해 볼 수 있겠다. 정감이 가는 옛날 수덕사 사하촌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