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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는 글

새벽녘, 뱃전에서 본 한라산

by 정순동

“퇴직하시면 뭐 하실 거예요.”

퇴직을 앞두고 수 없이 들은 이야기다.


“중소도시를 돌며 한달살이 하기”

좀 멋있게 답해야 할 것 같아 그냥 한 말이다. 의외로 반응이 괜찮다. 의례적인 인사말인가 했는데 특히 여선생들의 반응이 좋다.


제주살이. 아내는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린다. 먹고, 자고, 생활하는 것은 어디나 마찬가지일 테고. 경제적, 시간적, 체력적 조건 등 고려해야 할 일이 많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서귀포에서 시작한다. 육지와 다른 자연경관, 독특한 생활문화, 늘푸른나무들이 화산석과 뒤엉킨 숲, 외국어 같은 제주어. 이 모든 것이 낯설어서 더 매력을 느낀다. 제주 여행서를 몇 권 사서 읽는다. 멋진 풍경과 자연에 대한 감탄과 맛집 등을 안내하는 글과 사진들로 넘친다. 여태까지 올레도 몇 코스, 오름도 몇 군데, 전시관도 관광지도 몇 군데 별 계획 없이 이곳저곳 다녔다.


"또 제주살이 갑니꺼?"

"이제는 제주도 훤하겠심니더. 더 볼 게 있습디꺼?"

남들은 쉽게 이야기하지만, 곧 한계에 부딛힌다. 무언가 허전하다. 왜 이런 기분이 생길까. 제주의 속살을 못 본 것 같다.


제주 사람 이야기, 멀게는 설문대할망 설화와 탐라 건국 시조 고ㆍ양ㆍ부 삼 신인의 신화, 삼별초 항쟁과 목호의 난으로 이어지는 처참했던 민초들의 삶과 죽음의 이야기, 가까이는 신축 민중항쟁, 일제강점기 항일운동, 4ㆍ3 항쟁의 상흔, 강정의 아픔이 자연 경관의 아름다움에 가려진 채 제주 곳곳에 숨어 있다.


제주가 좋아 자발적으로 들어와 제주의 오름과 바다를 찍었던 김영갑, 한국 전쟁통에 본의 아니게 흘러들어 와서 제주를 그렸던 이중섭, 귀양 온 조선시대 유배인과 같은 외지인의 이야기도 길에 남아 있다. 현지인들이든 외지인들이든 이들이 제주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어떤 족적을 남겼는지 무심코 지나치면 잘 보이지 않는 이야기들이 도보여행의 재미를 더 할 것이다.


제주는 용천수를 따라 해안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제주 올레길은 마을과 들과 오름을 연결하여 해안을 한 바퀴 돈다. 제주 이야기가 올레길에 녹아 있다. 올레길이 우리를 불러내어 사람사는 모습을 구경시킨다.


제주올레 걷기를 다시 시작한다. 대충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하루에 한 코스씩 완주할 계획이다. 올레길을 느리게 걸으며 제주의 자연, 제주의 사람, 제주의 역사를 보고 들으며 세상 사는 이치를 배운다. 그 속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찾는다. 지나온 여정을 돌아보기도 하고, 남은 삶의 나아갈 방향도 길을 걸으며 모색한다.


'여수 -제주'의 뱃길을 밤새 달려온 배는 한라산을 바라보며 제주항으로 들어간다. (2022. 5. 7)

제주항으로 들어가면서 본 한라산과 제주 시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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