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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성적인 회사원 Apr 25. 2023

[17] 회사에서 가해자를 마주쳤다

다시 시작된 공황장애. 나를 지켜주는 사람들

직장 내 괴롭힘 조사가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내가 신고를 하였을 때 제시한 명확한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목격자 진술을 5명이나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오래 걸리기도 하였고, 담당 조사관이 갑자기 코로나에 걸려서 연장되기도 하였고, 가해자가 계속해서 이의신청을 해서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내가 가해자에게 역으로 신고를 당한 직장 내 성희롱 조사이야기는 지난번에 했다. 이 조사는 정말 빠르게 진행되고, 빠르게 경고라는 결과를 받았는데, 직장 내 괴롭힘 조사는 위와 같은 이유로 느리게 진행되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늘 한숨을 쉬면서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주변에서 나를 슬슬 피하는 사람들, 눈치를 주는 사람들, 마주쳤을 때 인사를 해도 모르는 척하는 사람들... 이 모든 상황을 내가 받아들이기에 당시의 마음은 너무나도 약했다. 정신적인 고통이 너무나도 컸다고 할까나...






하루는 회사에서 가해자를 마주친 적도 있었다.



자리 이동이 되어서 근처에는 없으나, 화장실을 가거나 물을 마시러 갈 때는 마주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내가 신고한 후 처음 가해자를 본 것이다. 그 당시 가해자의 눈빛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어떻게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운데, 묘사해 보자면 '한껏 찢어 죽일 듯이 잡아먹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가해자는 그 눈빛으로 쨰려보며 그대로 나를 지나쳐서 갔다. 하지만 나는 순간 움찔하고 멈춰 섰다. 아니 멈춰서 졌다. 나는 걷고자 하는데 몸이 움직이질 않는 것이다. 이전에 겪었던 공황장애와 상황이 비슷하였다. 뱀 앞에 있는 쥐처럼 꼼짝도 못 하였다. 그리고 익숙한 상황이 발생했다.



서서히 가팔라지는 호흡, 

부들부들 떨리는 손, 

상기되는 얼굴, 

등줄기로 흐르는 식은땀



공황장애 증상이 발동한 것이다. 괜찮아질 때까지 한 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을 때 갑자기 서러움이 복받쳐 오르더라.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가 뭘 했다고 이런 상황을 겪어야 하지?' 하는 억울한 감정이 올라왔다.



눈물이 멈추지 않아서 그대로 화장실에 문을 잠그고 들어갔다. 몸에 힘이 다 빠지고, 걸음을 걷기가 어려워 한참을 힘들게 화장실로 갔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숨을 죽이면서 울었다. 



억울함, 

분함, 

현재 몸 상태에 대한 한탄, 

앞으로 어떻게 될지에 대한 두려움



직장 내 괴롭힘 신고가 불 인정된다면, 나는 다시 가해자와 정면으로 마주 앉아서 일해야 한다. 과거에 그랬듯이 말이다. '도망치듯 퇴사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지금 조사가 늦어지고 있는 것도 모두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불안에 떨면서 하루하루 회사를 다니는 게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



증거를 왜 모으지 않았는지에 대한 자책도 있었다.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얼마나 울었을까... 갑자기 휴대폰에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박 과장이었다. 박 과장은 나에게 전문 상담사를 찾아가 보라고 조언해 준 사람이며, 같이 정신의학과 약을 먹고 있는 동지이다. 안심하는 마음으로 "여보세요" 하고 전화를 받았다.



"ㅇㅇㅇ 대리님 어디에 있어요?!!"

"아... 저 지금 가해자 만났는데 갑자기 공황 와서 화장실에서 울고 있었어요ㅋㅋㅋ"



뒤에 'ㅋㅋㅋ'를 붙인 게 오타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사실이다. 박 과장에게는 키득키득거리면서 장난스럽게 이야기했다. 같이 우울증 약을 먹는 동지라는 기분이 들기도 했고, 박 과장은 정신질환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편안하고,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였다. 



"하... ㅇㅇㅇ 대리님. 데리러 갈게요. 몇 번째 칸이에요"

"ㅋㅋㅋ 두 번째 칸입니다, 노크해 주세요"



박 과장이 와서 노크를 하였다. 나는 벌게진 눈으로 문을 열고 박 과장을 바라보았다. 박 과장은 걱정하는 표정도 아니고, 안쓰러워하는 표정도 아니고 그냥 시크한 표정으로 무덤덤하게 말했다.



"지금 하는 일 없잖아요?"

"네, 맞아요. 일도 없고, 저한테 말 거는 사람도, 인사 받아주는 사람도 없어요ㅋㅋㅋ"



시뻘게진 눈으로 여전히 말장난을 치는 나를 보면서 박 과장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박 과장은 한숨을 푹 쉬더니 말했다.



"일단 회사에서는 안정을 취하기 어려우니, 나가가지고 상담사 찾아가요. 여기서 가깝잖아요"

"그래도 될까요? 안 될 것 같은데..."

"내가 잘 말해 놓을 테니, 걱정 말고 가요. 아니다 지금 나랑 같이 갑시다"



박 과장이 나를 끌고 갔다. 몸에 힘이 없다 보니 저항도 못하겠더라. 덩치도 내가 더 크고, 내가 근육도 더 많은데, 그냥 그대로 질질질 끌려갔다. 박 과장은 운동을 안 해서 다 물렁살이다. 한 20분을 걸었을까, 박 과장이 추천하고, 내가 다니고 있는 상담소 가 눈앞에 보였다.  

 


박 과장은 이미 상담사에게도 연락을 해놓았다. 철두철미하다. 상담사는 나를 바로 쉴 공간으로 안내하였고, 나는 그 공간에서 숨을 가다듬으면서 안정을 취했다. 이렇게 힘겨운 하루가 지나갔다. 



이런 하루들이 얼마나 더 남았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박 과장은 '나에게 왜 전화를 했을까??' 이게 아직도 의문이다. 



직장내 괴롭힘 조사가 마무리되고 박 과장에게 그 당시 일을 물어본 적이 있다. "저 화장실에서 울고 있는 거 어찌 알고 전화했나요? ㅋㅋ" 그런데 본인은 잘 기억이 안 난다고 하더라. "그랬었나요?, 음... 그냥 갑자기 걱정이 되어서 전화했어요 ㅎ" 하고 박 과장은 머리를 긁적긁적거렸다.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때 정말 고마웠어요"

"그럼 커피나 한잔 사줘요 ㅋㅋ"



커피는 무슨, 나중에 모든 일이 다 끝나면 소고기를 한우로 사 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못 사준다. 가해자가 괜히 뇌물, 청탁 이런 것으로 걸고넘어지면 골치 아파지기 때문이다. 



커피를 사달라는 말에 내가 장난스레 쏘아 붙이듯이 대답을 했다. "정신의학과 선생님이 커피 마시면 심장 두근거리니, 약 먹는 동안에는 먹지 말라고 하지 않았어요?" 박과장은 표정 하나 안 변하고, 능글능글하게 답변을 하였다.



"아 그러네요?? ㅋㅋ 저는 그래도 가끔 먹어요. 상태 안 좋은 ㅇㅇㅇ 대리나 못 먹지, 저는 먹어도 돼요. 빨리 갑시다ㅋㅋㅋ"

"....."



틀린 말이 하나도 없어서 반박을 못했다. 아... 잘 받아친다니깐, 진짜로.






결과적으로, 그 당시 내가 화장실에서 울고 있을 때 박 과장이 나에게 전화를 한 이유는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아직도 의문이다. 남한테 관심이 많은 사람도 아니고, 전화를 할 성격이 절대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려있을 때, 이러한 도움의 과정을 종종 겪으면서 느끼는 점이 있다. 



무언가가 나를 지켜주고 있다는 기분이다.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말하자면 참고로 나는 종교가 없다. 만약에 나중에 갖게 되면 절 들어가서 목탁을 칠 생각이다. 착한 사람에게는 복을 주고 나쁜 사람에게 벌을 주는 신이 있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살아오면서 이러한 신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말에는 동감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가 움직여서 나를 도운건 사실이다. '병 주고 약 주고 인가...' 신이 나에게 이러한 상황을 준 것이라면 뭐 할 말은 없다. 내가 힘이 있나, 빽이 있나 약을 주는게 어디야, 신이 있다면 그 신이 그냥 주는 대로 받아먹어야지.  



재미있게도, 이 후로 며칠 뒤 또 운 좋게 코로나가 걸려서 차단 휴가를 당해 2주간 집에서 쉬었다. 이게 말이 되는가?, 진짜... 운이 정말 좋지 않은가?? 몸도 마음도 지쳐 있는 상황속에서 회사에 출근하고, 눈치밥 먹으며 앉아 있어야 하고, 어디서 가해자를 또 만날지 벌벌 떨어야 했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합법적으로 피할 수 있는 차단 휴가라니 말이다!!



이런 일을 몇 번 겪으면 누구나 나처럼 뭔가가 나를 지켜준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이 코로나로 인한 차단휴가는 내 인생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시간이다.



내가 블로그를 시작하게 되는 순간이며, 정신적으로 점점 회복하는 변곡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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