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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아노 May 16. 2024

16일차: 약을 줄여나가는 과정은 괴롭다

2024 100일 글쓰기 

  이번 주에는 꽤나 자신만만하게 병원에 갔다. 병원에 가서 선생님을 만나면 지금까지 어떻게 지냈는지와 현재 내 상태를 보고한다. 헬스, 수영, 글쓰기(이 챌린지)를 꾸준히 하고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루틴이 잘 잡혔다고, 감정이 위아래로 흔들려도 루틴대로 그대로 하루를 보내면 된다고, 그리고 그 이상 욕심을 내지 말라고 선생님께서는 말씀드렸다. 수면시간을 제외하고는 하루 생활패턴이 잡히고 우울한 감정이 어느 정도 무뎌졌으므로, 선생님께서는 이번에는 저녁약(항불안제)을 줄여볼 용기가 있냐고 여쭤보셨고 나는 (이번만은)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금은 줄어든 약 때문에 불안에 떨고 있다. 대학병원 외래 예약을 조절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나는 지금 저녁약을 줄인 대가로 부작용을 겪고 있으니까. 매일 복용하는 항우울제나 항불안제를 줄여나가야 한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다. 처음으로 다닌 정신과에서는 무슨 일이 있으면 약을 증량하는 방식으로만 문제를 해결했고, 상담치료 같은 다른 치료법이 궁금해(내가 낫지 않는다는 생각이 답답하게 느껴져) 다른 정신과에 처음 방문했을 때 '약을 왜 이렇게 많이 먹냐'면서 반으로 줄어든 약봉투를 들고 집에 왔던 기억이 난다. 그 후 일주일은 지옥 같았다. 머리가 심각하게 아프고 잠을 한 숨도 잘 수 없었고 침대 밖으로 나가는 게 불가능했다. 더군다나 그때의 나는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고시생이었다. 일주일이라는 귀중한 시간을 통으로 날린 것이다. 결국 나는 일주일 후 원래 다니던 정신과로 돌아갔고, 그렇게 복용하는 약의 갯수와 의존도는 높아졌다. 

  올해 초 마지막으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심했을 때도 이유는 비슷하다. 신입사원용 교육 프로그램은 수험생만큼 강도높은 생활을 한 달 간 요구했다. 병원에서 퇴원한 직후 나도, 선생님도 내가 금방금방 나아지고 약을 줄여나갈 수 있으리라, 그래서 정상적으로 내원을 하고 운동을 하고 치료를 받으며 회사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반 년 안에 복용하는 약을 반 이상 줄이는 것을 치료의 목표로 삼았다. 복용하던 저녁약(병원에 입원하기 약 반 년 동안 그 양을 서서히 줄여나가기도 했다) 중 세네 알이 한꺼번에 줄어들었고, 예약은 교육 프로그램이 끝날 무렵인 3주 뒤로 잡혔다. 즉, 3주 동안 나는 최악의 컨디션에 시달리면서 억지로 열네 시간을 일했다. 이전 회사는 지극히 구식이었고, 마지막으로 다니던 회사는 스타트업이었으므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사용할 것을 요구했다. 회사에 나가는 것도 힘겨운데 낯선 프로그램을 익히는 게 쉬울 리가 없았다. 그리고 이전 회사에서 나를 괴롭히던 사람과 이번 회사의 교육 담당자는 말투가 동일했는데, 그 사람의 신경질을 견딜 때마다 일종의 트리거가 눌리기도 했다. 일과 나에 대한 자신감이 푹푹 깎여나갔다. 결국 신체는 항복을 선언했고, 바닥난 체력으로 치료와 회사 생활을 동시에 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아 퇴사 절차를 밟게 되었다.

  퇴사를 결심할 때 줄인 약 중 한 종류를 반 알로 줄였다. 그 결과 오늘 하루종일 두통에 시달렸고 운동을 갈 수 없었다. 항상 유지했어야만 하는 루틴이 깨진 것이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이나 생리기간 가끔 운동을 빼먹곤 했으니 아직은 괜찮겠지 생각하지만, 내가 이 상태를 이겨내지 못하고 이 주간 앓아눕고 시간을 버리는(이것이 가장 무섭다) 결과가 나온다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든다. 그리고 묻어두었던 의문점이나 우울감, 정리되지 않은 과거(주로 내가 20대를 망쳐버렸다는 생각)가 물밀듯이 몰려왔다. 과거를 정리해서 글로 써 보는 게 도움이 된다고는 하지만, 사적인 내용을 챌린지에 가감없이 쓸 수 있느냐(나는 하루에 쓸 수 있는 글의 양이 제한적이라고 생각하고, 100일 글쓰기를 시작한 뒤로 일기는 계속해서 밀렸다)는 뒤로 하고, 일단 100일 글쓰기를 제정신으로 할 수나 있을지 의문이 든다. 나는 벌써 내일과 앞으로의 2주일이 두렵게 느껴진다. 일단 리셋을 한다는 기분으로 빨리 잠을 청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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