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하고 나하고

사진으로 남겨진 찰나

by 이순미


2023년 둘째 오빠와 셋째 오빠가 차례로 작고했다. 큰오빠는 몇 년전 뇌경색으로 반신불수가 되고, 말을 못하는 상태에서 두 오빠가 먼저 갔다. 어릴 때 오빠들한테 사랑받은 기억이 있고, 대학도 오빠들 덕분에 다닐 수 있었다. 살림이 편안해지면 우리집에 오빠들 가족 다 초대해서 대접해야지 했는데, 결국 하지 못했다. 둘째 올케언니가 집 정리하면서 오빠가 간직하고 있던 아버지 비망록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2024년 작년 초에 마을 친구 서영애 친정 모친이 돌아가셨다. 오빠들 초상치를 때 느꼈던 허무와 아쉬움이 다시 살아났다. 사람이 죽어 초상치르고 나면 이 사람은 서서히 잊혀지는 거지. 배우자와 자녀들 기억 속에는 남아있지만, 대를 내려가면서 잊혀진다. 이건 아니야. 나는 이렇게 잊혀지고 싶지 않아. 평범한 인생이지만, 나는 내 삶의 기록을 남겨 야겠다.

자서전을 준비했다. 자서전을 쓰기 위한 참고 서적들을 읽었고 아버지 비망록도 꼼꼼이 살펴보았다. 출판업을 하는 지인을 찾아가 자서전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이때 읽은 책 중에 『안젤라의 재』라는 회고록이 있었다. 아일랜드에서 이민 온 고등학교 국어교사가 66세에 첫 책을 썼는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렇다면 나라고 안될 게 있겠어? 글을 써내려가다 내가 중학생 때까지 살았던 광주를 돌아보기로 했다. 3월 2박3일 예정으로 광주에 가면서 결혼 전까지 내 삶을 담은 앨범을 들고 갔다.

유년 시절의 기억이 남아있는 양림동을 돌아보았다. 양림동은 이제 핫플레이스가 되어 있었다. 아버지한테 안겨 가보았던 동굴은 관광코스다. 어렴풋한 기억이 있는 양림동 사직공원에도 올라가 보았다. 내가 다닌 국민학교 두 군데를 찾아갔다. 1학년 때 논 사이를 걸어 다녔던 광주교대 부속초등학교는 주변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초등학생들이 운동장에서 체육활동을 하고 있는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보니까, 학교지킴이 할아버지가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61년전에 이 학교를 다녔어요. 그냥 봅니다.” 하니, 미소 짓는다. 다시 양림동 학강국민학교에 갔다. 그렇게 넓었던 운동장은 줄어들었고 건물이 많이 생겨났고 학교앞 큰 문방구 가게들은 사라지고 아주 넓었던 학교 앞길은 동네 2차선 도로로 줄어들었다. 양림교회 가는 높은 언덕길은 나지막해 보이고, 느티나무가 서있던 교회앞 넓은 마당은 사라지고 요양보호센터가 들어차 있다. 동명여자중학교는 사라지고, 빌라가 들어서 있었다. 이렇게 없어져 버리는 거야? 코를 톡 쏘던 홍어찜이 그리워 시장 홍어식당에 갔다. 홍어찜은 예약을 해야 한단다. 다른 곳을 기웃거리다 다시 이 식당으로 돌아와 홍어회를 먹었다. 남은 홍어를 싸가지고 동생집에 와서 소주에 나눠 먹었다.

길언이 앨범에는 처음 보는 사진들이 많았다. 대여섯 살 되는 여자아이가 한복입고 화장하고 26번 번호를 달고 무대를 걷는 사진이 있어 ‘얘는 누구래?’ 하니, 나란다. 놀라웠다. 아무리 봐도 예쁘지 않은 나를 누가 미인대회에 보냈을까. 사진들에 대해 물으니 놀랍게도 길언이가 웬만큼 대답을 했고, 이모한테 확인 전화까지 했다.

제주도 모슬포교회 전도목사였던 할아버지 기록이 담긴 『호남기독교 100년사』 책과 길언이 앨범을 빌려 돌아왔다. 추억답사에서 돌아오면서 든 생각은 내 자서전보다 아버지가 남긴 사진으로 아버지 삶을 기록하는 일이 먼저다. 아버지가 찍거나 남긴 사진으로 포토북을 내보자.

『윤미네 집』은 아버지가 첫딸 신생아 때부터 결혼식 날까지 찍은 사진집인데, 사진 해설은 개정판 뒤쪽에 실어놓았다. 로저 메인 외 『바깥은 천국』은 60년대 영국 런던의 거리에서 노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여러 작가들이 찍은 사진들을 모아 펴낸 사진집이다. 작가, 장소, 연대를 한 줄로 특정해 놓은 걸 보고, 나도 이렇게 하면 되겠네. 90년 전부터 30년간 한 남자가 이룬 가족의 사진집은 예술성은 떨어지고, 보존상태도 좋지 않지만 나름 가치가 있을 것이다.

희망칼라에 가서 내 앨범과 길언 앨범에서 선정한 사진 120여장을 디지털화 했다. 그리고, 그걸 인쇄해서 남편에게 보여주니, ‘당신은 유명한 사람이 아니잖아’ 한다. 유명인이 아니니 누가 관심을 가질 것이며 누가 책을 사보겠냐는 뜻이겠다. 그래도 괜찮다. 아버지 삶을 정리하는 게 급선무다.

자, 아버지는 어떤 인생을 살았나.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우주여행을 하고 있는 아버지에게 10대에 아버지와 애절하게 헤어져 중년이 된 과학자 딸이 영상메시지를 보내는 장면이 있었다. ‘아버지는 개자식이예요!’ 하는 자막을 보며 나는 ‘우리 아버지도 개자식이야’ 공감했다. 왜, 개자식이냐고? 어린 자식들 줄줄이 놔두고 그때 나는 겨우 세 살이었다고, 엄마와 이혼하고 이혼전 연애 상대와 재혼해서 아들을 낳고, 재혼한 지 4년 만에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으니까. 세 오빠와 나, 이혼 후 태어난 여동생, 재혼해서 본 아들 모두에게 치명상을 입혔으니까. 우리가 얼마나 스산하고 외롭게 각자 도생하며 컸어야 했는데. 두 오빠가 아직 한참 살만한 칠십 중반에 간 것도 그 여파라고요. 또,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 하지 못했고 어떤 여자도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잖아요. 어머니, 두 아내, 두 딸, 누가 행복했나요?

아, 5월에 나는 이모를 찾아가 만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길언이 이모다. 대전역 대합실에서 육십여년 만에 만났는데, 이모는 ‘최실아, 내가 언니를 대신해서 사과한다. 너희들에게 언니가 못할 짓을 했다. 미안하다.’ 말했다. 이모 아파트에서 앨범을 펼쳐놓고 이 사진이 언제 어디서 찍은 것인지 물어보았다. 이모는 형부가 자식 사랑이 끔찍했다고 했다. 나는 아버지가 자식 사랑이 대단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이모왈, 이혼후 충청도 친정 근처에 사는 엄마한테 다녀온 큰오빠한테 아버지가 “동생은 잘 크고 있더냐”고 물었다 한다. 또, 이모는 ‘너희 엄마도 이해가 안된다. 남편이 바람 핀다고 자식을 넷이나 놔두고 어떻게 갈 수가 있냐’. 했다. 이모한테 아로마 마사지를 해드리고 왔다.


사진을 컴퓨터 화면으로 보니, 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무책임한 로맨틱가이 또는 바람둥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어머니의 개신교에서 천주교로 개종이 아버지와 할머니의 위신을 추락시키고 이에 대한 반감으로 딴 여자와 연애를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럼, 엄마가 왜 개종을 했냐, 엄마한테 들은 이야기로는 네 번째 임신을 했을 때 아버지가 낙태를 종용했고, 이후 아버지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데다 낙태가 죄라는 것을 알고 천주교로 개종해서 고해성사로 마음의 안정을 회복했다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 입장이 이번에 사진을 보며 읽혔다. 목사 집안에서 남편이 찬양대 지휘자인데 일요일 성당에 나가? 할머니와 아버지는 망신을 당한 셈이다. 얽히고설킨 인과관계로 부부는 이혼하게 되는구나.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아버지한테 사랑받은 기억들이 올라왔다. 아버지보다 20년도 더 산 내가 지금도 어리석은 짓을 가끔씩 저지르고 있는데, 마흔살 전후 아버지의 판단 착오는 있을 수 있는 일 아닌가?

무엇보다도 내게 생명을 주었다는 점에서 나는 은혜를 입었다.

아버지 제게 생명을 주셔서 감사해요. 사랑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기억하지 못하는 찰나를 남겨주셔서 기뻐요. 대단하고 멋지세요!

2025년 3월 우각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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