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신과 물질의 방 Jan 07. 2023

늑대와 개

|| 늑대와 개 ||


니체의 동물원에서


개는 사육당하는 대상으로 사회적 프레임 속에서 주어지는 것에 안주하는 동물로 인간을 뜻한다.


늑대는 야생에서 생활하며 자유로이 사유하고 사회적 프레임을 벗어나 "아니"라고 표현할 수 있는 동물로 니체가 표현한 이상적인 인간상인 위버멘쉬(Übermensch)에 가깝다.


위버멘쉬의 영어식 표기는 Overman이다. 어떤 이가 일반적이지 않은 행동을 했을 때, 저 xx 또 오버한다라고 하며 '오버맨'이라고 조롱 섞인 호칭을 붙이기도 하는데 니체의 언어에 따르면 오버맨은 이상적인 인간상이다.


다시 개와 늑대로 돌아가자.


개는 주인이 주는 먹이를 먹고, 주인의 사랑을 받으려 노력한다.

늑대는 야생에서 먹이를 찾고, 스스로의 보금자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개의 삶은 주인이 부여해주는 정도에 그친다.

그러므로 개의 행위는 주인이 원하는 정도로 한정되며, 주인이 사라지면 개의 행위 또한 그 동기를 잃는다.


늑대의 삶은 스스로가 개척하는 만큼으로 무한하며, 늑대 스스로가 그 삶의 주인이니, 그의 행위는 외부환경의 변화와 무관하게 이어진다.


우리의 사고 속에 성공적인 조직은 효율적인 통제체계를 보유하고 있는 조직이다.

조직은 출퇴근 시간부터 동기부여까지 모든 면에서 조직원들이 최선을 다해 조직의 목표달성에 최대한의 노력을 하도록 만드는데 집중한다.


"개는 훌륭하다"

인기예능의 제목인데, 조직은 훌륭한 개를 원한다.


늑대는 결코 개가 될 수 없다. 남이 주는 음식으로 삶을 연명하기보다는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스스로의 힘으로 야생에서 먹이를 구한다.


"늑대는 훌륭할 수 없다."

늑대의 삶은 온전히 늑대 스스로가 주인이기에 다른 다른 동물의 삶과 비교될 수 없다. 비교대상이 없으니 훌륭할 수도 훌륭하지 않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정교하게 짜인 조직이라는 사육장에서 생활하게 할 수도 없을뿐더러, 늑대의 성과를 평가할 수 있는 기준도 없다.


개와 늑대는 태생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셀 수 없는 원인과 결과로 얽혀 있는 인과법의 세상이다. 더불어 지금 이 시대는 과학기술의 발전속도를 따라가기 어려운 시대이다.


주인이 주는 먹이만 먹으며, 주인의 사랑을 받기 위해 살아가는 개는 외부에 관심을 가질 필요 없다. 그런 개들로 구성된 조직은 생각보다 빨리 도태될 것이다. 개로 살아가는 이의 삶은 조직과 함께 도태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개로 살아갈 것인가

늑대로 살아갈 것인가


조직은

개를 위한 사육장을 만들 것인가

늑대도 거닐 수 있는 들판을 만들 것인가


위버멘쉬의 영어식 표기와 같은 오버맨들이 '훌륭하지 않다'는 이유로 배척된다면, 그 조직은 주인만 바라보는 잘 길들여진 이들만 남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죽음을 향해 멈추지 않는 자전거, 자전거 타는 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