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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제읽은철학 Mar 10. 2022

그대의 사랑은 무력한 것이요, 하나의 불행이다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 칼 마르크스

갓 20대가 되어 장거리 연애를 할 때의 일이다.

당시 난 부산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어쩌다 사랑에 빠져버렸던 그 사람의 거처는 경기도였다. 그것도 남부도 아니고 경기도 북부. 조금만 차를 타고 나가면 북한이 보인단다. 북한이 서울보다 가깝다니. 북한이 맨 눈으로 보이는 곳에 하필이면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일본에 가까운 나와 북한에 가까운 그 사람의 연애 초반은 굉장히 순조로웠다. KTX를 타고 2시간 30분이면 부산에서 서울에 도착했다. 우리나라 교통기술이 이렇게나 발전했구나를 몸소 체감하는 나날들이었다. 심지어 비행기를 타면 1시간 남짓에 도착했다. 노포터미널에서 광안리해수욕장까지 버스 타고 가는 것이나, 비행기 타고 부산에서 서울을 가는 것이나 그게 그거라면서 열심히 대한민국을 종횡무진하며 다녔다. 보고 싶을 때 달려가고, 경기도에서 한참을 데이트하고, 서울에서도 만나고, 부산에서도 광안리며 해운대며 신나게 돌아다니고 힘들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연애기간이 길어지면서부터 시작됐다. 어린 나이에 알바로 겨우 몇십만 원 벌어가며, 아끼고 아껴서 데이트를 하는 건데. 한 번 만날 때마다 왕복 차비로만 대략 15만 원 정도를 길거리에 뿌리고 다니다 보니 일상생활에 무리가 가기 시작한 것이다. 데이트를 하면 차비만 나가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숙박비를 비롯해 예쁘게 보이고 싶으니 옷도 사야 하고, 만나면 밥도 먹어야 하고, 카페도 가야 하고, 영화도 봐야 하는데, 돈이 없으니까 비행기에서 KTX로, KTX에서 고속버스 우등석으로, 고속버스 우등석에서 고속버스 일반석으로. 조금이라도 교통비를 줄이기 위해 몸으로 때웠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편하게 의자를 젖히지도 못하고 4~5시간을 긴장하면서 앉아있다 보면, 그리고 그 일을 거의 매주 하다 보면 아무리 팔팔한 스무 살일지라도 허리가 남아나지 않았다. 또 서울에 도착하는 순간 이미 체력이 절반은 빠져있었다. 데이트 패턴도 점점 간소해졌다. 밥은 먹어야 하니 어쩔 수 없고, 영화보기와 같은 문화생활을 줄였다. 그러다 보니 이미 지친 상태로 만나 매번 비슷한 장소에서, 비슷한 데이트를 반복하게 됐다.


사랑하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지만, 설렘이 익숙함으로 변해가는 시기에 데이트 외적인 생활에까지 벅참이 함께 찾아오면서 우리는 점점 지쳐갔다. 그래서 돈 때문에 이렇게 힘든 거라면 우리가 만나는 걸 조금 줄여볼까? 싶은 생각에, 한 달에 한 번만 얼굴을 보기로 했다.


능력 없는 내가 미웠다.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하는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슬픔에 빠져 이 모든 일이 교통비 하나 감당하지 못하는 나의 무능함 때문에 일어난 일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아쉽게도 나는 자존감이 상당히 높은 사람이다. 그래서 나 자신을 미워하는 일이 오래가지 않았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무의식 속 나의 뇌는, 능력 없는 나와 나르시시즘을 코앞에 둔 나 사이의 인지부조화를 해결해야 했을 거다.


처음에는 비싼 교통비를 미워했다. 하지만 아무리 교통비를 미워해봤자 교통비는 내려가지 않았다. 그다음은 하필 멀리 사는 그 사람의 집을 미워했다. 하지만 남는 것은 그 사람의 가족들을 모두 부산으로 이사시킬 수는 없다는 당연한 깨달음뿐이었다. 그 사람을 미워할 수는 없었다. 그 사람은 처음처럼 여전히 매력적인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사랑을 의심한 것이 아닐까 한다. 당시에 회의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건 바로 사랑 같았다. 어쩌면 진짜 사랑이 아닌 것은 아닐까? 내가 사실 그 정도까지는 사랑하지 않으니까 이 힘듦을 견딜 수 없는 것 아닐까?


만남의 횟수를 줄인 덕분에 일상은 여유가 생겼지만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옛말이 체감되기 시작했다. 우리의 사랑에 대한 회의감이 뻗어나가면서 한여름처럼 불타던 사랑은 나도 모르는 새 식어있었고, 그렇게 우리는 권태기를 맞이했다.


드라마 가을동화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사랑? 웃기지 마. 이젠 돈으로 사겠어. 얼마면 될까? 얼마면 되겠냐?”


그때를 생각하면, 사랑을 돈으로 사겠다는 말은 참으로 합리적이지 않을 수 없다. 정말로 사랑도, 우정도, 취미도, 심지어 우리의 생존까지도 그놈의 ‘돈’ 없이는 무엇하나 쉽지가 않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순 없어도 벤츠에서 우는 게 자전거에서 우는 것보다 편한 건 사실이지 않은가.


당시에 나는 서로를 만나게 하고, 행복한 데이트를 할 수 있게 하는 '돈'이 우리의 사랑을 연결 짓고 있는 필수적인 연결고리인 것만 같아서, 그 돈이 없어지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불행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돈을 최대한 아끼는 것에만 열중했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우리의 행복을 지속하기 위해 돈을 아껴야 된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우리의 행복보다는 돈을 아끼는 데에만 온 신경을 썼다. 나는 돈이 없어서 사랑을 이어나가지 못했고, 그래서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럴 필요는 없었다. 나는 나의 불행을 돈에서 찾았지만 답은 다른 곳에 있었다는  몰랐다. 나의 미련함에 후회를 가져온  가슴 깊게 박힌  문장을 읽은 이후다.


"그대가 사랑하는 인간으로서의 그대의 생활 표현을 통해서 그대를 사랑받는 인간으로서 만들지 못한다면 그대의 사랑은 무력한 것이요, 하나의 불행이다."


이 말은 놀랍게도 마르크스의 저작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에 나오는 문장이다. 처음 이 문장을 접했을 때는 냉전시대 공산당의 아이콘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시뻘건 악마처럼 묘사되곤 했던 그가 사랑을 이야기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상하게 들렸다. 그래서 악마 같은 이미지 뒤에 있는 마르크스의 진정한 생각은 무엇이었을지 궁금했다.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도대체 어떠한 사랑을 말한 것일까.


마르크스가 살아가던 시절엔 존재하는 사물들보다 마음속의 생각을 중요시하는 분위기가 강했다고 한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물질적인 세계를 무시하고 상상 같은 것들만 중시하던 분위기를 싫어했다. 마음속의 이미지만으로는 어떠한 것도 변화시킬 수 없고 단지 허망한 환상에 불과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환상이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물질을 바탕으로 인간과 세상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르크스가 바라보았던 이상적인 세상은, 사람들의 창조적인 능력들이 세상과 자유롭게 만나면서 서로가 상호작용하는 세상, 스스로 하고 싶은 활동을 탐구하며 활기차게 선보일 수 있는 세상이었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던 마르크스에게는, 자꾸만 이러한 상호작용이 좌절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볼 때, 사람들은 꿈을 찾아 자기 주도적인 활동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돈'이라는 현실의 벽에 부딪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고민할 기회조차 잃어버렸다. 그림 그리는 것을 아무리 좋아해도, 발레가 하고 싶어도, 혹은 골프 치는 것이 너무 행복해도, 이를 뒷받침할 부모의 경제적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런 것들은 시도해보기도 전에 꺾여버렸다. 아마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비판한 이유는 이처럼 돈이라는 부차적인 도구가 사람과 세상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다양한 활동을 방해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마르크스가 본 사람들처럼, 그리고 가을동화의 태석처럼, 나는 사랑까지도 돈으로 살 수 있을 거라고 자주 생각해왔다. 서로의 모습 그대로에 대한 사랑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잊고 돈만을 생각하면서 주객을 전도시켰다.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그가 걱정했던 것처럼 나의 생활표현을 통해서 사랑을 찾지 않고 사랑을 이어주는 돈에만 집중한 나머지, 사랑을 의심했고 결국 나의 사랑을 무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사실 사랑하는 인간으로서 사랑을 나누는 방법은 우리의 생활 어느 곳에서도, 어느 것에서도 가능하다. 만남을 줄이면 연락을 더 자주 하고, 공간은 떨어져 있지만 그 공간을 초월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음을 느끼도록 사랑을 표현하면 되는 일이다. 더구나 요즘은 목소리가 듣고 싶으면 들을 수 있고 심심하면 영상통화도 할 수 있는 세상이다. 만나서 살갗을 부비는 것보다야 덜하겠지만 조금만 신경 쓰고 타협하면 서로의 외로움을 달래주기에는 꽤나 괜찮은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면서, 나는 수단적인 가치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벤츠에서 우는 게 자전거에서 우는 것보단 편하겠지만, 다짜고짜 울려고만 했지 서로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에 눈길을 돌려볼 생각도 하지 않았던 거다.


진정한 인간관계는 돈을 매개로 하지 않아도 충분하고 온전하게 가능해야 한다. 내가 돈이 많든 적든, 그 사실과는 전혀 무관하게 우리 본연의 감정에 충실한 상태로, 행복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나가면 돌파구는 분명히 존재한다. 사랑받고 싶다면 돈이 아니라, 그저 나의 사랑을 통해서 그 사람에게 다가가야 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신뢰를 보내며 그 사람 자체에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20대 초 나의 사랑만큼이나 어쩌면 이렇게 당연한 이치를 외면한 채, 그동안 돈 너머 존재하는 소중한 인간적 가치를 홀대해 온 건 아니었는지, 지레 겁먹고 덜 불행해지고 싶다는 생각에 행복으로 가는 길을 찾아 나설 생각을 아예 접어둔 건 아니었는지. 왠지 오늘은 밤이 길다.








“인간을 인간으로서, 세계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인간적 관계라고 전제한다면 그대는 사랑을 사랑과만, 신뢰를 신뢰와만 등으로 교환할 수 있다. 그대가 예술을 향유하고자 한다면 그대는 예술적인 교양을 갖춘 인간이어야만 한다. 그대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한다면, 그대는 현실적으로 고무하고 장려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인간이어야만 한다. 인간에 대한 - 그리고 자연에 대한 - 그대의 모든 관계는 그대의 의지의 대상에 상응하는, 그대의 현실적·개인적 삶의 특정한 표출이어야 한다. 그대가 사랑을 하면서 되돌아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다시 말해서 사랑으로서의 그대의 사랑이 되돌아오는 사랑을 생산하지 못한다면, 그대가 사랑하는 인간으로서의 그대의 생활 표현을 통해서 그대를 사랑받는 인간으로서 만들지 못한다면 그대의 사랑은 무력한 것이요, 하나의 불행이다” —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 칼 마르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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