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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제읽은철학 Apr 04. 2022

라떼의 덫

기억과 자기동일성 문제

군 복무를 할 때 선임과 크게 싸운 적이 있다. 싸웠다고 하기보다는 싸움에 참여했다고 말하는 게 조금 더 정확할 수도 있겠다. 내가 잘못했다거나 직접적인 부조리를 당해서 싸운 게 아니라, 후임들을 대표해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서로 감정이 격해져 말다툼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부드럽게 해결할 수 있을 만한 일이었는데 당시에는 그게 잘 안 됐다.


싸운 이유는 소위 '짬질'이라고 부르는 부조리 때문이었다. 물론 군 생활이 다들 그러하듯 어느 정도의 짬질은 대부분 그냥 묵인하고 넘어가는 편이다. 그런데 최고참이었던 선임의 부조리가 정도를 넘어서서, 결국 그 아래 후임들이 잠도 못 자고 근무를 계속 나가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진 게 문제였다. 내가 하던 군 생활의 특성상 야간 근무도 뛰어야 하는데 잠을 못 자고 밤낮으로 계속 근무를 들어갔다가는 정말 큰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결국 당시에 내무반장 역할을 하던 내가 그 최고참의 휴가 복귀날, 담당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근무 중인 사람까지 모두 생활관으로 데려와 회의를 열었다. 우리는 진지하게 서로의 어려움을 이야기했고, 근무 일정표를 조정하려 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그때, 최고참이 말버릇처럼 해오던 어떤 한 마디가 생활관을 울리면서 사건이 터졌다.


" 때는 선임이 까라면 그냥 깠어"

그 뒤로는 정확히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7개월 넘게 최장기 막내 생활을 한 나도 가만히 있는데 고작 두 달 정도 막내일 해놓고 무슨 놈의 나때를 그렇게 찾냐고 화를 냈던 기억만 어렴풋이 남아 있다. 물론 예전에 눈앞에서 담뱃갑을 집어던진다거나 한숨을 푹푹 쉬며 째려보는 등 여러 가지 일들로 그 선임에게 가지고 있던 개인적인 앙금도 한몫했을 거다. 아무튼 나는 이 '짬질'이 왜 부조리했는지, 그래서 지금 어떤 피해가 생기고 있는지,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참고 넘어갔는지를 따져 물었던 거 같다. 그러다가 어찌어찌 최고참의 사과를 받고 근무 일정을 수정하면서 우리의 싸움은 일단락되었다.


군대를 전역하고 나서는 이 일을 새까맣게 잊고 지내왔다. 그런데 얼마 전 지인과 SNS에서 대화를 나누던 중 ‘사람은 왜 과거를 잊는 게 어려울까’라는 물음에 왜인지는 몰라도 그 사건이 불현듯 다시 떠올랐다.


지인은 과거에 얽매여 살면 현재를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과거로부터 벗어나야 그다음을 생각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무언가를 잊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그게 나쁜 기억이든, 좋은 기억이든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든 소중한 과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그저 나의 생각일 뿐이다. 나의 지인처럼 누군가에게는 과거의 자신을 잊어야만 비로소 새로운 일을 시도하는 것이 가능해질 수도 있다. 비록 나는 과거의 나를 얼마나 되돌아보고 반성하는가에 따라 앞으로의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가 달라진다고 생각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모든 일을 기억하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은 왜 과거에 얽매여 살게 될까? 아니, 과거에 얽매인다는 건 무얼 말하는 걸까? 그리고 정말로 과거의 기억은 잊는 게 좋은 걸까? 잊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확실히 지인의 말처럼, 과거에 얽매이다 보면 지금 나와 마주하고 있는 현재의 문제들에 올바른 대처가 곤란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과거에 얽매여 있다는 걸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면 두 가지 경우의 수가 떠오른다. 먼저 과거의 사건에 빠져나오지 못해서 현재의 삶에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 그리고 과거의 나에 취해서 현재에도 꼰대질을 버리지 못하는 경우. 이 두 경우 모두 머릿속에 과거의 기억이 가득 들어차 현재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똑같다. 익숙한 과거의 기억이 나를 지배하면, 현재에 마주하는 문제들이 새로운 가능성으로 다가오기보다는 낯설고 불편한 것으로만 느껴진다. 그래서 현실로부터 도피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사람을 더욱 소심하게, 우울하게 만든다. 우울한 감정은 나를 공격해서 자괴감에 빠지게 하거나, 남을 공격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보호하려 할 것이다.  


철학적 전통에서 과거를 기억하는 행위는 자기동일성이라는 개념과 이어진다. 자기동일성이란 쉽게 말해서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나'를 '나'로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자기동일성 : 타인과 구별되는 한 개인으로서 현재의 자신은 언제나 과거의 자신과 같으며 미래의 자신과도 이어진다는 생각. 에릭슨(Erikson, E. H.)의 자아 심리학이나 올포트의 인격 심리학에서 사용한 개념이다.


우리 몸을 이루는 세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죽어나가고, 새로 만들어지고 있다. 카이스트 김대식 교수의 책을 보면 인간의 피부 세포는 한 시간에 3~4만 개씩 떨어져 나간다고 한다. 허파 세포는 2~3주, 창자 세포는 2~3일만 지나도 새로운 세포들로 바뀐다. 과학적으로 보면 당장 작년의 나와 지금의 나를 이루는 세포들은 전혀 다른 세포들인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나'를 '나'로 인식한다. 나를 이루는 많은 요소들이 새롭게 바뀌어있음에도 여전히 내가 나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우리가 과거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 당장 기억상실증에 걸린다면 아마 나는 당최 내가 누구인지 알지도, 설명하지도 못하게 될 거다. 그리고 이렇게 '나'의 기억을 바탕으로 '나'의 존재를 '나'로 생각하는 걸, 다시 말해 "나는 나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 자기 인식을, 철학자들은 자기동일성이라 부른다.


서구 근대의 철학자들은 자기동일성이 확보될 때에야 세상의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지금의 내가 어제와 똑같은 의자에 앉아 있다고 생각하려면, 그러니까 "이 의자가 그 의자다"라고 말하려면, 반드시 어제 이 자리에 놓여 있던 의자를 기억하고 있는 '나'가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세상 모든 것을 인식할 수 있는 근본적인 원인이 바로 '나'의 기억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서구 근대철학자들은 '나'를 알고, '세상'을 알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과거의 기억을 붙잡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자기동일성의 추구가 자기중심적인 사고로 이어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나'에 대한 인식이 확고하면 확고할수록 서구 근대철학자들처럼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거의 기억에 몰입한 나머지 현재의 삶을 살지 못한 채 불행하고 우울해진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이보다 좋은 방어기제도 없다. 하지만  순간 '나는 나다'라는 공식은어느새 '내가 낸데' 바뀌게 된다과거에 얽매인 사람은 지금 나와 마주하고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지금의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그저 자신의 과거만이 중요하다. 새로운 사람, 새로운 상황을 맞이했으면 그 새로움에 집중하고 그들과 대화하여야 할 것인데, 그 낯설고 새로움을 마주할 자신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 과거를 붙잡고 오로지 나를 중심으로 관계를 맺으려 한다. 하지만 그러한 관계의 끝은 새로운 인연의 진면목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어그러지거나, 억지로 남을 깎아내리게 될 뿐이다. 마치 그 최고 선임이 그랬던 것처럼.


그렇다면 해결법은 간단해 보인다. 이 자기동일성을 끊어버리면 된다. 실체가 없이 단지 나의 기억에 이끌려 착각하게 되는 '나'라는 존재를 잊어버리면 끝나는 일이다. 실제로 이러한 시도를 종교적 수행의 방법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불교에서는 참선이라는 수행을 통해서 자신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부처의 성품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하고, 기독교에서는 계시를 통해 하나님이 자신에게 임재하심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참선을 통해서 깨닫는 부처의 성품이란, 모두가 연결되어 있고 '나'는 텅 비어있다(空)는 깨달음이다. 기독교의 계시도 비슷하다. 자신을 초월해 있는 하나님을 깨닫고, '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하나님에게 의지한 채로 살아가야 함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듯 우리가 정반대라고 생각하는 종교마저도 실은 확고한 '나'라는 존재가 그저 자신의 착각이거나 아주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다.


종교뿐일까? "신은 죽었다"고 말했던 니체도 '잊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니체는 자기동일성을 부정하고 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진정한 자유라고 생각했다.

"망각이 없다면, 행복도, 명랑함도, 희망도, 자부심도, 현재도 있을 수 없다. 이런 저지 장치가 파손되거나 기능이 멈춘 인간은 소화불량 환자에 비교될 수 있다. ······ 이런 망각이 필요한 동물에게 망각이란 하나의 힘, 강건한 건강의 한 형식을 나타내지만, 이 동물은 이제 그 반대 능력, 즉······망각을 제거하는 기억을 길렀던 것이다." — 『도덕의 계보학』


그런데 현실적으로 '나'에 대한 인식 모두 끊어내는 건, 즉 자기동일성을 모두 없애버리는 일은 너무나도 어렵다는 것이 문제다. 나의 존재를 모두 잊고 순간순간만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말로는 가능해 보일지 몰라도 종교도 없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나라는 사람에겐 참으로 불가능하게만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산 정상까지는 오르지 못하더라도 산 중턱에 있는 약수터 물은 마시자는 마음으로, 조금은 나 편한 대로 생각해보기로 했다. 


과거를 기억하는 건 꼭 나쁘기만 한 건 아닐 것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처럼, 개인적 차원에서도 성숙한 미래를 위해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는 일은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다만 기억을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르게 만드는 자기중심성의 덫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그러려면 앞으로 어떤 과거를 기억할 것인지,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를 고민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반면교사 삼아 성숙해진 '나'로 나아갈 것인지, 과거에 얽매여 살게 될 것인지는, 과거를 어떻게 기억할 것이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과거는 단지 과거일 뿐이라는 사실을 항상 생각하자. ‘나’에 대한 고집을 내려놓고 '나'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도 과거를 바라보자. 지금 마주한 상황과 상대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그래서, 과거를 기억하더라도 과거에 얽매이지는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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