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회차 시험관 시술을 위해 최근 난임전문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 첫아이를 임신했을 때, 이미 내 난소 나이는 43세였다.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아이를 낳고 이후 3회를 거듭한 시험관 시술은 번번이 실패로 끝났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오면 마음도 살랑살랑, 몽글몽글해지며 희망의 빛이 살짝 손짓한다. 지난해 시험관 시술이 실패한 뒤 스스로 휴지기를 두고 포기 아닌 포기를 결심해 봐도 제대로 되질 않았다. 그만큼 둘째에 대한 나의 열망은 컸던 것이었다.
내 난소 나이가 궁금했다. 지금까지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이지만 세 번의 실패 후 제대로 도전해 봐야겠다고 결심하며 피검사를 받았다. FSH 수치도 확실히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시험관 시술이 왜 번번이 실패하는지 알아야 도전할지, 포기할지의 여부를 확실히 결정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피검사 후 좋은 생각만 하려고 애를 썼다.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고 하면 한약과 운동이라도 병행하며 몸을 만들어볼 생각이었다.
4일 후, 유치원 하교 후 아이를 학원에 데려다주고, 수업받는 동안 아래층에서 때늦은 점심식사를 했다. 그날따라 속이 좋지 않아서 죽을 떠먹고 있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기다리던 전화였지만 실상 내용은 절망적이었다. 간호사의 말을 요약하자면 '난소 나이 46세, FSH 수치 22로, 보통 FSH 수치 20을 기점으로 조기폐경이 진행되었다고 본다.'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면 대체적으로 50세 전후로 폐경이 오니까 저 같은 경우는 4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이군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요."
"한약을 먹는다거나 운동을 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네요."
"네. 크게 영향을 끼치지 않을 거예요. 시험관 시술 진행을 세 번 정도 하실 수 있는데…. 되실 확률은 극히 낮다고 보입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래도 한 줄기 희망을 붙잡고 있었다. 그런 내 희망이 단호박처럼 단칼에 잘려나가는 순간이었다. 죽을 먹다 말고 눈물이 뚝뚝…. 하필 아이의 유치원 보조 선생님이 맞은 편에서 식사를 하고 계셨는데, 고맙게도 아는 척을 안 해주시더라.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눈물 젖은 죽을 먹었다.
내 감정은 이렇게 격정적이었지만, 머리로는 첫 아이 이후로 시도했던 세 번의 시험관이 실패로 끝난 이유를 이해하는 중이었다. 이 와중에도 고마웠던 건, 곧장 아이를 데리러 가야 했기 때문에 슬픔에 깊이 잠길 겨를도 없었다는 것이다.
서른아홉, 마흔을 코앞에 둔 나이에 내게 찾아온 조기폐경이라는 소식. 앞으로 4년 남짓밖에 남지 않은 나의 여자로서의 시간. 문득 엄마가 떠올랐다. 갱년기 때 무척 우울해 했었던 엄마의 모습도. 오늘만 슬퍼하고 내일은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보자.
참 신기하게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식당에서 울었기 때문일까. 남편에게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이제 아이 옷을 정리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고.
"당신 원하는 대로 이제 집이 조금 더 넓어지겠네."
남편은 포기가 안 되면 시도해 보라고 했다. 그는 내 글을 읽었기 때문에 그 당시 심정을 이해하고 있었다. 처음에 외벌이라는 경제적 이유로 하나만 낳자고 했던 남편은, 내가 쓴 '나는 외동아이의 엄마다' 수필을 읽고 내가 왜 이렇게 노력하는지 알게 되었었다. 우리 부부가 떠난 뒤 아이가 훗날 외로울까봐 형제를 만들어 주고 싶은 엄마의 마음을. 동생을 원하는 아이의 마음을. 그리고 포기하기 위해 1년이라는 시간을 갖자고 결심한 것도 안다. 그럼에도 포기가 안 되어 변덕이 죽 끓듯 다시 검사까지 받은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배아를 잃었을 때도 그는 울지 않았었다. 이번에도 눈물은 보이지 않았다.
"만신창이가 될 때까지 해봐. 장렬히 전사하는 거야."
우스갯소리를 던지는 남편. 말이 쉽지, 내 안에서 실패를 견디는 힘이 도대체 어디까지 존재하겠느냔 말인가.
"무슨 소리야."
"아니, 네 마음속에서 포기가 안 된다면 그렇게라도 하라는 거야."
"…. 나 옷 정리할 거야…. 이제 때가 된 것 같아."
결심했으면 말로 내뱉어야 한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봐 주고 도와주는 존재. 엄마는 최근까지도 내 결심을 응원했었다.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고.
"되면 좋고, 안 되면 할 수 없고, 그런 심정으로 하는 것도 괜찮아. 엄마는 네가 포기가 안 되면 끝까지 해보라고 해주고 싶어. 그러다 되면 좋은 일이고."
"엄마는 갱년기 때 어떤 심정이었어…? 엄마 많이 우울했었던 걸로 기억이 나는데"
그 당시 엄마는 기분이 오락가락했고, 교회 건물주와의 일로 공황장애까지 와서 그야말로 너무 힘든 갱년기를 보냈었다….
"그건 갱년기 때문만은 아니었어. 네 아빠 목회 때문에 힘들어서 그랬지. 생리 안하면 편하고 좋지 뭐."
어휴, 딸이 힘들까 봐 또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듯 넘기신다.
'엄마, 나는 여자를 잃어버린 기분인데….'
뭐라 말을 하려다 삼켰다. 입 밖으로 낼 순 없었지만 나는 딱, 그런 기분이었다. 뭔가 아주 많이 허전한 기분.
아직 폐경이 온 것은 아닌데도, 진행 중이라는 사실 만으로도 크나큰 상실감을 느끼고 있었다. 원인? 의사는 원인 같은 것을 설명해 주지 않는다. 그들은 불확실한 추측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오직 지금 이 순간 확정적인 팩트만을 전달할 뿐이다.
"엄마, 나 포기하려고…. 이번엔 진짜 포기할거야. 실패를 견뎌낼 자신이 없어."
옆에서 듣고 있던 아빠가 수화기를 낚아채셨다.
"그래, 잘 생각했다. 네가 둘째를 가지려면 한나처럼 울부짖고 매달려야 하는데,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아빠, 나는 이미 첫째를 가질 때 그렇게 해 봤잖아. 아시잖아요. 얼마나 울부짖었는지, 하나님께 바치겠다고까지 해서 얻은 아들인 것…."
"그래, 둘째도 그렇게 할 수 있겠니. 쉽진 않을 거다…. 아빠는 네가 힘든 걸 보고 싶지가 않구나."
부모님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손주보다도 늘 딸이 우선이시다.
"너는 어린 것이 뭘 그렇게 짊어지고 스트레스를 받고 살았니, 이것아. 이제부터라도 스트레스받지 말고 살아."
엄마의 말에 물기가 묻어 있다. 그때 식당에서 다 울었다고 생각했는데, 엄마와 다시 통화하면서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엄마, 그때 꿈은 뭐였을까? 예쁜 뱀 꿈 말이야. 엄마가 비단뱀을 들고 와서 내가 속으로 투명한 유리 상자에 담아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내 꿈이 아니고 동생네 태몽이었나 봐."
"…그랬나 보지."
나는 친정에서 태몽 비슷한 것을 꾼 적이 있다. 그게 틀림없는 내 꿈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다 속절없는 춘몽이었다.
"엄마는 그저 네가 좋은 쪽으로 했으면 좋겠어. 네가 정말 원한다면 편하게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
"당신 또 그런다! 얘가 포기한다는데 왜 그러오. 괜한 희망 불어넣지 말고 빨리 끊어요."
"아니, 이번에는 정말 포기할 거예요. 좋게 생각하도록 노력해 볼 테니 엄마, 아빠도 저 때문에 스트레스받지 마세요."
전화를 끊고 두 분이 옥신각신하셨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혼자 끙끙대는 것보다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 무언가 결심을 했을 때 말로 선포한다는 건 생각보다 중요한 일이다. 글을 쓰는 일도 그의 일환 같다. 글을 쓰면 생각이 정리되고 마음이 차분해진다. 지금 나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에 있다.
제대로 포기하기 위해 잡은 시간 1년. 작년 7월부터 9개월이란 시간이 흐르고 내 입에서는 드디어 포기라는 단어가 나왔다. 이를 입에 담기까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시간의 마법이라는 것은 내게도 적용되어 드디어 오랜 미련을 끊어내기까지 이르렀다. 당장 포기를 외치는 것이 어렵다면 나처럼 시간을 두고 조금씩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다. 도전에도 용기가 필요하지만, 포기는 도전보다 배로 큰 용기가 필요하더라.
"아빠, 아이에게는 뭐라 얘기하면 좋을까요?"
"지금은 노력하고 있다고만 이야기하거라. 훗날 다 이해하게 된다."
결혼식이나 집안 행사에서 둘째 계획을 묻는 지인들에게, 나는 지금도 흐릿하게 웃으며 "노력하고 있어요."라고 말한다. 아직 그들에게까지 "포기했어요."라는 말은 못 하겠다. 하지만 이제 덧붙여서 말한다.
"첫아이와 터울이 많이 져서, 어쩌면 이대로 외동으로 키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러면 황급히 외동도 좋다, 아들이니까 집안의 대를 이은 것이 아니겠느냐, 이런 소리로 나를 안심시키려 한다. 예전에는 상처도 많이 받았었지만 이제 무뎌진 것 같다.
좋게 생각해 본다. 나는 복을 많이 받았다. 남편에게는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아들이 나를 많이 닮아서 행복하다. 얼굴도 나 어릴 때 얼굴선이 그대로이고, 귀 모양도 똑같고, 체질도 비슷하다. 책을 빨리 읽은 것도, 심지어 식당에서 양말을 벗는 버릇까지 똑같다. 친구가 우스갯소리로 내게 했던 말이 있다.
"야, 너는 아들이 너 미니미라 좋겠다. 나는 남편 미니미라 그렇게 부럽더라고…."
그 말이 예전에는 살짝 고깝게 들리기도 했었다. 그건 내 생각이 잘못되었던 거라는 걸 지금에 와서는 안다. 나를 닮았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이고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미안해서 남편 닮은 예쁜 딸 하나 낳아주고 싶었는데 이제는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