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엄마인 내가 답변을 했지만, 말을 잘하게 된 요즘은 아이가 냉큼 대답해왔다. ‘혼자’라는 말을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하는 걸 보면 내가 참 많이도 그런 뉘앙스의 말을 했었나 싶다. 나는 ‘외동이에요.’라는 대답을 했던 것 같은데, 아이 나름대로 이해한 것은 ‘나는 혼자다.’라는 의미인 것 같아서 가슴 언저리가 쓰렸다.
인터넷 신문기사를 읽었다. <우리나라의 출산율은 점점 감소하여 2022년 2분기 0.75명이라고 하며, 한 자녀 가정의 비율이 50%를 넘어섰다>는 내용이었다. 어렴풋이 알았는데 숫자로 나타내니 확 와닿았다. 더 낳지 않는 부모들의 심정을 생각해 보았다. 경제적인 이유거나, 하나만 낳아 잘 키우려고, 혹은 난임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가 난임을 겪기 전, 우리 회사에서는 일명 ‘경단녀’ 재취업을 장려하기 위해 신입 한 명을 경력단절 여성으로 뽑았었다. 사람들은 왜 그리 사생활이 궁금할까, 그 날도 그랬다. 밥을 먹으며 그분이 아들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꼬리를 무는 질문이 이어졌다. 몇 살이냐, 같이 사느냐, 그러다 형제가 있느냐에 이르렀다. 그분은 잠시 멈칫하다 웃으며 “외동이에요.” 하셨다. 사람들은 괜히 질문했다 싶은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 업무에 빨리 복귀하실 수 있어서 좋으셨겠어요."
그러나 나는 그들이 ‘왜 하나만 낳았을까?’를 궁금해하는데 차마 그것까진 묻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마 경우의 수를 헤아려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을 것이다. 부끄럽지만 나의 시선도 그랬었다. 직장에 복귀하는 외동 엄마들을 보면 ‘저러려고 하나만 낳은 거지.’ 생각한 적이 많았다. 자신이 편하려고, 육아가 체질에 맞지 않아서, 지금까지 쌓아온 사회적 지위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그랬을 거라고 말이다.
대학 시절, 우리 부부는 해맑게 이야기했었다. 셋은 말고, 둘만 낳자고. 혼자는 너무 외롭다고. 지금 생각하면 그저 마냥 즐거웠던 젊은 날의 치기 어린 대화였다.
외동으로 키우고 싶어서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걸 난임을 경험하며 깨달았다. 다른 커플들은 하룻밤 밀회에도 아이가 생기는데, 우리는 연애 9년, 결혼 3년이 지나도 무소식이었다.
“자연임신이 어렵습니다. 시험관을 곧장 시도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충격이었다. 길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울부짖었다. 뭐가 잘못된 걸까, 젊은 날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서 이렇게 됐나. 어렵다는 의사의 말이 뇌리에서 쟁쟁 울렸다. 그래도 차마 포기할 수 없었다. 남편의 검사결과도 좋지 않아 우리는 처절하게 노력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호르몬 주사를 배에 놓는 일이 무서웠지만, 그 길밖에 없다 하니 독한 맘을 먹었다. 배에 주사 자국과 멍이 생겨나고, 호르몬 과다로 배꼽 아래 임신선 비슷한 선이 그어져도, 마치 임신한 듯 기뻤다. 수술대에서 나는 온갖 즐거운 상상을 했었다. 다리를 벌리고 눕지만 부끄럽지 않았다. 평온한 음악을 들으며, 유원지에서 회전목마를 탄 아이가 내게 손을 흔드는 환영을 보았다.
이윽고 나는 꿈에 그리던, 내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을 얻었다. 우렁찬 울음을 가진 사내아이였다. 젖가슴으로 파고드는 작고 소중한 생명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난생처음 해 보는 엄마라는 직업은 고되었지만 행복했다.
내 아이는 빠른 아이였다. 18개월에 “동생 낳아주세요. 우유 먹여주고 책도 읽어 줄게요.”라는 말을 했었다. 36개월 무렵 한창 아기 돌보기 놀이를 좋아해서 해 주었다. 늘 내가 아기 역을 하고, 아이는 오빠 노릇을 했다. 눈치 빠른 아이라, 행여 질투할까 봐 동생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심어주려고 애썼다. 다섯 살에 유치원에서 또래를 만나게 되면서 아이는 자신이 외롭다는 것을 알았다. 내게 친구나 형제 역할을 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역할놀이 시 엄마는 아무래도 어른의 시야로 보게 마련이라 아이의 눈에 맞춰 대화하기란 쉽지 않았다.
아이에게 형제를 만들어 주려고 재작년부터 시험관 시술을 다시 시작했다. 벌써 네 번째다. 작년 7월에 받은 시술은 결국 화학적 유산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번에는 배아를 꼭 지키려 했었다.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결과는 참 무심했다. 병원에서 한참을 울고 돌아온 내게 아이가 물었다.
“엄마, 아기는 어떻게 됐어?”
“아기가 여기 손가락 끝에 대롱대롱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고 했지? 그런데 이렇게 떨어졌대.”
그 말을 듣고 목놓아 우는 아이 모습에 나도 눈물이 핑 돌았다.
의사는 난자 수도 적고 질도 좋지 않아서 임신이 어렵다고 했다. 이쯤 되면 포기해야 하는데, 아이 어렸을 적 입던 옷가지 중 하나도 혹시 하며 버리지 못하는 나를 본다. 포기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욕심일지도 모른다. 인간이란 참 간사한 것이 제발 하나만 달라고 절규했었는데, 이번엔 둘을 달라고 부르짖고 있다. 내 고통은 아이가 없는 부모에 비하면 축복이다. 그런데 왜 난 이겨내지 못하고 눈물 젖은 종이에 글을 쓰고 있는 것일까.
아이를 키워보니 내 모든 것을 다 주고 싶다. 훗날 우리가 세상을 떠나면 혼자 남을 자식을 생각하니… 몸이 만신창이가 되더라도 끝까지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편 잇따른 실패 후 무너질 내 모습과 목놓아 울 아이 얼굴을 떠올리면 시도조차 두렵다. 그래서 스스로 휴지기를 두었다.
인생이란 뜻대로 되는 일이 없다. 나는 앞서 외동아이 부모에 대해 가졌던 편견을 뼈저리게 반성한다. 그들의 인생도 다 사정이 있을 텐데, 가볍게 생각했다. 이제야 깊은 사죄의 말씀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