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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ul May 04. 2023

방패

나의 부모님


초등학교 고학년 즈음 있었던 일로 기억한다. 학교에서 혈액형 검사를 하고 온 날, 결과표를 받아 들고 집으로 향했다.

“아빠, 내 혈액형이 B+형이래요.”

그 소리를 들은 아빠는 어두운 기색을 내비치지 않고 “그래?”라고만 하셨다. 결과표에는 틀림없이 B+라고 쓰여 있었다. 다음날이 되어 아빠가 나를 부르셨다.

“아빠가 B형이고, 엄마가 O형이란다.” 그 날은 그렇게 넘어갔다.


중학생 때 다이어리 꾸미기가 한창 유행했는데 나는 B형의 특징들을 모조리 찾아 썼다. 그러고 나서 내 성격과 비교해보고 ‘음, 맞아. 나는 좀 화가 나면 불같고. 아빠도 그러시니까.’ 하며 맞는 부분이 나오면 좋아했다. ‘급하고 끈기가 없다? 이건 아닌 것 같은데. 뭐 사람마다 성격은 다 다른 거니까.’ , ‘B형이 예술가적 성향이 있다고? 그래서 내가 충동적인 면이 있고, 책, 노래, 그림 등등을 좋아하는 건가?’ 이런 식으로 끼워 맞추기 한 적도 있었다. 친구들의 반응은 “네가 B형이라고? 아닌 것 같은데.” 하며, 내게 O형 성향을 지닌 B형 같다고 했었다. 그래서 혈액형을 묻는 친구가 있으면 우스갯소리로 “나는 OB형이야.” 하곤 했다.


이윽고 고등학생이 되어 혈액형 검사를 다시 했을 때, 결과는 놀랍게도 O+형이었다. 나는 결과지를 받아들고 어안이 벙벙했다. 물론 그때는 생물학적으로 BO, OO가 감수분열하여 나올 수 있는 혈액형에 대한 지식이 생겼기에 O형도 자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결과지를 이번에도 부모님께 보여 드렸다.

“혈액형이 바뀔 수 있나요?”

그 당시 부모님은 목회하시느라 분주하셨고, 나도 입시로 동분서주하던 시절이라 부모님은 확인만 하시고 대답은 없으셨다.

‘내 진짜 혈액형은 뭐지? 혈액형이 바뀔 수도 있나?’ 생각했지만 촉각을 다퉜던 그 시기는 나를 사실확인과 점점 멀어지게 했다. 컨디션 난조와 천식으로 수능을 망치고(물론 혈액형 때문이 아니다), 재수를 결심하고 학원에 다니던, 스무 살이 되던 해의 어느 날이었다.


“성인이 된 것을 축하한다. 아빠에게 중대 발표가 있으니, 거실로 다들 모여라.”

도대체 무슨 일로 부르실까 하며 나와 동생은 아빠가 앉아계신 소파로 갔다. 다른 때에는 볼 수 없던 비장한 표정으로, 아빠는 말씀하셨다.

“아빠는 사실 O형이었다.”

“…….”

나는 잠시 어안이 벙벙하여 말을 잇지 못했다. 20년 동안 아빠를 B형으로 알고 살았는데, 하루아침에 O형이라니. O형과 O형이 만나면 B형은 나올 수가 없다. 그럼 초등학교 때 결과지는 틀렸던 건가? 과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나는 진실을 금방 밝혀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관심사는 과학과 거리가 먼 다른 것들이었고, 아빠의 말에 충격을 받은 나는 그 날로 피검사를 하러 갔다. 내 혈액형이 B형이라면, 나는 엄마, 아빠의 생물학적 딸이 아니다.




‘그러고 보니 내 코는 엄마도 아빠도 안 닮았는데. 정말 내가 주워온 자식이면 어쩌지.’

가면서도 얼마나 심각했는지 모른다. 만약 부모님의 자식이 아니라 해도 지금까지 친딸처럼 키워주셨으니 감사하고 평생 딸로서 살리라. 꽃다운 스무 살, 보건소로 가는 내 발걸음은 돌멩이를 질질 끌고 가는 듯 무겁기 짝이 없었다. 피를 뽑는 순간, 결과를 기다리는 1분 1초가 내게는 마치 슬로비디오 같았다. 결과지를 든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O+형’

A4용지 12pt쯤 되는 크기의 글자가 내게는 200pt쯤 되어 보였다. 집에 돌아가면서 생각했다.

‘아빠는 왜 내게 그런 거짓말을 하셨던 걸까.’ 그땐 깊은 뜻을 미처 몰랐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신발을 벗어 던지고 부모님께 결과지를 보여 드렸다.


“그럼 그렇지.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사실 그 날(내가 B+형이라고 쓰인 종이를 받아온 날) 부모님은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하셨다. 밤새도록 아이가 바뀌었을 가능성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셨다고 한다. 그러다가 아빠가 “내가 B형이라고 할게(바뀌었어도 주님 뜻이니 우리 아이로 키우자).” 함으로써 결론이 난 것이었다. 알고 보니 하루가 지나고서 부모님 혈액형에 대해 말씀해 주신 까닭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날로부터 8년 뒤에야 진실을 알게 된 나는 오열했다.

아빠는 나 때문에 수년간 거짓말을 해야 했고, B형인 척 사셔야 했다. 사실을 밝혔을 때 얼마나 홀가분한 표정이셨는지 모른다. 두 분이 빙그레 웃으시며 주거니 받거니 하신 말씀들을 요약하자면,

“네가 말도 안 되는 혈액형을 받아왔을 때, 닮았다고 생각했던 얼굴도, 성격도, 모든 것이 다 흔들리더구나. 그러나 너를 이때까지 키워오면서 내 딸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엄마는 이모한테 묻기도 했었단다. 그때 이모가 ‘꼭 빼다 박았는데 무슨 소리냐.’ 그랬지만 엄마, 아빠는 수없이 고민하고 힘들었단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 제대로 된 혈액형이 나오더구나. 그래서 안심하면서도 초등학교 때 나온 결과지 때문에 긴가민가했지. 그래서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상처받지 않도록 네가 성인이 되었을 때 말해 주려 했단다. 만일 생물학적 딸이 아니더라도 엄마아빠의 딸은 너 하나뿐이라고.”


최근 아빠가 내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에 대해 ‘덜떨어진 선생’이라는 표현을 하셨고, 평소 그런 말을 하시는 분이 아니기에 이상히 여겼다. 아무래도 고학년이라고만 생각했던 과거의 기억이 사실 6학년이었다는 심증으로 굳혀지는 순간이었다.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이가 갈리시는 듯…. 얼마나 마음 졸이셨을까. 혹시나 B형으로 굳혀져 충격 받을까봐 피검사 하라고 하지도 못하고. 잘못된 결과지를 붙잡고 산 세월 동안, 제대로 패악을 부리던 사춘기 시절을 거치며 얼마나 딸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으셨을까 말이다.


엄마가 우리 집 기둥이라면 아빠는 내 방패였다. 나를 굳세게 지켜주는 방패. ‘여호와는 나의 요새, 나의 산성, 나의 방패시라.’ 는 다윗의 고백이 있다. 그만큼 아빠의 존재가 든든하다는 소리다. 이 사건은 내게 자신감을 주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부모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리라.'

아이를 낳은 지금은 생물학적 연결고리가 어떤 의미인지 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이미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이 얼마나 더 위대한지 간접적으로 느낀바, 설령 친자가 아니라 해도 지금은 나 역시 아빠처럼 할 수 있을 것 같다(같은 맥락에서 신애라나 사유리 같은 사람을 존경한다).

그저 떠올리는 것만으로 든든한, 사람이나 기억 하나로 인간은 힘을 얻는다. 지금도 옅게 미소 띠고 눈물지으며 회상할 수 있는 소중한 기억. 그런 기억 하나쯤 있다면 인생의 풍파도 맞설 만하다. 나를 방패처럼 지켜주신 부모님을 나름 인생의 풍파를 겪는답시고 칼로 찔렀던 지난 시절을 돌아보면, 회한의 눈물이 난다. 이제는 방패에 하도 많이 부딪혀 무뎌진 칼날을 아예 부러뜨리고, 남은 인생은 부모님을 지키는 방패가 되고 싶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런 존재이고 싶다.

그저 떠올리는 것만으로 든든한, 사람이나 기억 하나로 인간은 힘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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