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춘 晩春 Late Spring, 1949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郎)'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건 아마도 '야마다 요지(山田洋次)' 감독의 동경가족(東京家族, 2013)이라는 영화 때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작품이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東京物語, 1953)'를 리메이크한 영화라고 들었고, 이후에도 많은 거장들의 코멘트 속에서 그의 이름이 종종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젠가 그의 작품을 한 번 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최근에서야 드디어 한 편을 감상했다. 바로 '만춘(晩春, Late Spring, 1949)'이라는 작품으로, 오즈 야스지로의 수많은 영화 중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챗 GPT의 추천을 받아 선택한 영화다.
만춘 (晩春)
Late Spring, 1949
만춘은 홀아비인 '쇼키치 소미야' 교수와 27세의 미혼 외동딸 '노리코'의 이야기다. 간단히 요약하면 홀아비가 혼기가 지난 딸을 시집보내려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아버지가 이 과정에서 대단한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친구인 '오노데라'와 술을 마시며, 딸인 노리코가 시집갈 나이가 되었다는 막연한 생각만 하고 있을 뿐이다. 오노데라의 딸인 '미사코'가 24살이 될 때까지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던 것에 비하면 이미 27살인 노리코의 나이는 결혼 적정 연령이 훌쩍 지난 터였다. 과거에 병을 앓았던 노리코의 사연이 그에 대한 변명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영화에서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결국 쇼키치는 여동생 '마사'의 도움을 받아 딸의 결혼을 진행하기로 결심한다.
노리코는 아버지와 단둘의 생활이 평화롭고 행복한 일상이다. 다도를 배우고, 독서와 자전거를 즐기며 도쿄와 지인들 사이를 왕래하는 활기차고 밝은 성격의 여성이다. 하지만 오노데라의 재혼에 대해서는 불결하다고 말을 하거나 결혼을 앞둔 핫토리와 선을 긋는 모습들은 에둘러 단호한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 스스로 '질투가 많다'라고 말하는 만큼, 아버지와 젊은 미망인의 결혼 이야기가 나오자 돌연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노리코 주변 동기들은 대부분 결혼을 했다. 아이가 넷인 동기, 일을 그만두고 시집을 가는 동기, 이제 막 임신한 동기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을 때마다 알 수 없는 초조함도 밀려오지만, 여전히 아버지와의 생활을 고수하려는 고집도 보인다.
고모인 마야는 홀아비인 오빠와 결혼하지 않는 노리코가 걱정이다. 노리코의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한다고 할 만큼은 아니지만, 두 사람은 함께 다도 수업을 듣거나, 마야가 외아들만 있는 처지를 생각해 볼 때 사실상 친딸처럼 여기는 듯하다. 무엇보다 고모가 걱정하는 것은 오빠의 외로움보다, 노리코가 결혼하지 않고 노처녀가 될까 봐 드는 우려가 더 큰 듯하다. 물론 영화의 뒷부분이 있었다면, 결혼하고 아이를 가진 노리코의 모습을 보여주며, 오빠의 재혼 자리를 추진했을지도 모르지만 다행히도 이 영화에서는 단순한 중매쟁이의 모습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노리코의 친구 아야는 미혼인 노리코와 달리 연애결혼을 했고, 이미 이혼을 경험한 이혼녀다. 노리코의 아버지 쇼키치는 이혼녀인 아야가 걱정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스테노그래피(속기사)로서 자립하여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흐뭇해한다. 노리코는 이혼녀인 아야가 오히려 자신의 결혼을 독려하는 모습을 보고 놀리기도 하지만, 언제나 고민이 있을 때 가장 먼저 상담할 수 있는 친구이자 때로는 언니, 선배처럼 조언을 아끼지 않는 인물이다.
영화는 소미야네 부녀의 소소한 일상을 보여주며, 주변 인물들로 하여금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결혼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녹여낸다. 그 정도가 매우 일상적이라 우리네의 이모, 삼촌, 고모들의 대화처럼 느껴지고, 때로는 동년배들 사이의 소소한 대화로 들리기도 한다. 그만큼 자연스럽다 보니 때때로 영화적 집중이 흐려지는 경향이 있다. 생각해 보라 본가에 놀러 온 고모와 아버지의 대화를 극장에서 듣고 있는 기분을... 하지만 이 영화는 바로 이런 소소한 장면들을 통해 노리코와 아버지인 쇼키치에게 영향을 미치고, 이야기를 한층 더 진전시킨다.
노리코는 결국 주변의 권유에 따라 결혼을 결심한다. 혼기가 찬 여성이 결혼을 결심하는 단순한 결말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 결단은 그렇지 않다. 아버지와의 안정적인 생활을 떠나 독립하고, 자신의 길을 걷기 위한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비록 그 과정이 수동적이고 재촉에 의해 이루어진 결정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런 그녀이기에 결혼이라는 결정이 얼마나 중요한 인생의 결심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아버지 또한 더 이상 자신만의 욕심으로 사랑하는 딸을 잡아둘 수 없다. 혼기가 찬 딸을 둔 아버지로서 급한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럼에도 딸의 의견을 존중하며 억지로 강요하지 않고,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조용히 배려해 준다.
결혼을 결심한 후, 부녀는 오노데라 가족이 있는 교토로 마지막 여행을 떠난다. 노리코는 오노데라의 새 아내가 좋은 사람임을 알게 되고, 아버지에 대한 미움도 고백하지만, 잠든 아버지의 옆모습을 보고 마음속 깊이 그 감정을 담아둔다. 다음 날,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며 노리코는 시집가기 싫다는 마지막 억지를 부려보지만, 아버지는 차분히 그녀를 타이르듯 말한다.
지금부터 드디어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거야
만춘은 그녀의 시간을 의미한다. 노리코의 시간은 아직 봄이다. 홀아버지를 돌보며 어느덧 봄의 끝자락에 다다랐지만, 꽃이 지기 직전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치장하고 자신의 결혼식을 맞이한다. 그녀는 자신을 키워준 아버지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결혼식을 향한다. 늦봄이 지나면 초여름이 시작된다. 노리코의 시간도 그렇게 만춘을 지나 초하(初夏)로 흐를 것이다.
결혼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 쇼키치는 조용히 의자에 앉아 사과를 깎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의 칼질이 멈추고, 사과 껍질은 힘없이 끊어진다. 가을에 무르익은 사과가 결국 땅으로 떨어지듯 노리코도 마침내 아버지의 곁을 떠나 새로운 인생을 향해 나아가고, 쇼키치의 시간 또한 가을을 지나 초동(初冬)으로 접어든다. 그는 고개를 떨군 채, 딸의 부재 때문인지, 아니면 밀려오는 세월의 덧없음 때문인지 모를 감정에 잠긴다. 그저 해변가의 거센 파도만이 그의 쓸쓸한 마음을 대변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