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새로 일 찾기
그날도 하루 종일 치이다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오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이가 막 학교에 들어가 생각보다 일찍 끝나는 하교 시간 때문에 이 일을 계속해야 되나 라는 고민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일하는 엄마는 한 고비 넘겼다 싶으면 다른 고비가 찾아온다. 독서지도사 일은 아이들의 하교 시간에 맞춰 시작되는 것이라 아이의 하교를 챙길 수가 없다. 특히 1, 2학년 아이들은 이른 하교 시간에 맞춰 엄마들이 우르르 교문에 데리러 나온다. 학교생활을 잘 마친 아이가 교문에서 나오면서 ‘엄마~’라고 부르며 달려오는 눈빛을 본 적이 있는가. 세상 행복한 얼굴이며 평온한 얼굴이다. 나는 그런 순간을 아이에게 경험하게 해 준 적이 없다. 학교 앞에 아이를 데리러 가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아이를 맞이하는 것은 학원 차이다. 그마저도 하교 시간과 학원 차가 오는 시간이 맞지 않으면 아이는 도서관에 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시간에 맞춰 나와서 학원 차를 타야 하는 것이다. 겨우 8살이다. 아무도 챙겨주지 못한다. 엄마에게 전화를 해도 수업을 하는 엄마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스스로 시계를 보고 학원 차를 놓칠까 봐 부랴부랴 나오는 아이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조금만 늦어서 학원 차가 갔으면 어쩌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차를 기다리는 아이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가슴이 아프다. 학원에서 집에 올 때도 마찬가지 따뜻하게 맞이해 줄 엄마는 없다. 쓸쓸한 집으로 들어와 엄마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숙제도 하고 tv도 보면서 시간을 때운다. 하지만 엄마가 어린이집에서 동생을 데리고 집에 오려면 아직 멀었다. 외롭고 심심하다. 아이의 눈빛에서 그 마음을 눈치챘으면서 나는 애써 외면했다. 내가 숨을 쉴 공간을 찾기 위해 아이들의 희생을 강요한 셈이다.
아이들을 위해 시작한 공부였다. 내 아이의 독서 교육을 잘 시켜 보겠다고 시작했던 공부였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을 외롭게 놔두고 나는 정신없이 다른 아이들을 가르치겠다고 동분서주하고 있다. 다른 아이들과 학부모에게 어릴 때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말하면서 정작 집에 와서 아이들에게 책 1~2권 읽어주기도 바쁜 엄마이다.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엄마이다.
또다시 잔인한 선택의 시간이 왔다. 왜 이런 선택은 엄마만 해야 하는 걸까라는 생각까지 들면서 뭔가 또 억울해진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엄마가 아이를 키워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내 머리와 가슴에 새겨져 있는 것을, 그리고 돈을 더 버는 남편이 일을 하고 내가 집 안을 돌보는 것이 경제적으로도 더 낫다는 현실적인 결론도 내려 보았다. 바쁜 나를 보면서 힘들면 그만두고 아이들이나 잘 챙기라는 남편의 말을 들을 때도 속으로 무척 서운하면서도 그것을 반격하지 못하고 그래 애나 잘 보는 게 좋지 않을까도 잠시 고민을 했었다. 어렵게 다시 시작한 일인데 일하는 엄마들은 이렇게 매번 선택의 순간을 맞이한다.
가정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진정 자신만의 무엇을 만들어보고자 고군분투하며 세상에 다시 나오지만 또 다른 벽이 기다리고 있다. 누구를 위해 나는 일을 하는가라는 먹고사는 문제를 떠나서 그것은 나의 정체성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기에 일하는 엄마에게 일이란 일반 사람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 아닐까 싶다. 내가 일하는 목적과 이유에 대해서 스스로 끊임없이 증명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