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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미영 Sep 11. 2023

‘여성국극’의 부활과 노익장

  눈이 번쩍 뜨였다, 예상하지 못했던 기사가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걸린 걸 보고나서다. 아싸 이 늙은 나이에 그들을 다시 볼 수 있게 되다니. 그립던 이산가족을 찾은 것 마냥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여성국극의 추억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오랜 간 내 몸이 기억해서 길어올린 샘물과도 같다. 그것도 형언할 수 없으리만치. 단숨에 그 추억을 사들였다. 공연을 앞둔 여러 날, 기다림도 지루해 예매알림 통지문만 여러 차례 만지작거릴 정도였으니. 웬만해선 저녁 일정을 잡지 않는 편인데 그 날만은 예외였다. 지금처럼 다채로운 문화예술을 접할 수 없던 그 당시. 어릴 적 살던 내 동네에는 소녀의 감성에 진한 감동을 질러준 문화의 산실, 동양극장이 있었다. 그 곳에선 여성국극단의 공연이 늘 성시를 이루었다. 며칠 멀다않고 내다 걸린 눈에 익은 배우들의 모습이 그려진 화려한 간판들. 안산시 공연장으로 달리는 전철 안에서 나는 아스라한 추억에 빠져들었다.    


  열흘 전, ‘레전드 춘향전’의 막이 올랐다. 숨죽이고 기다려온 아이처럼 내 얼굴도 환하게 바뀌었다. 93년생부터 93세 최고령에 이른 배우들이 총망라된 공연이다. 생존의 공연, 마지막일지 모르는 1세대부터 3세대에 이른 명인들이 함께한 세대통합의 무대다. 그 감동을 어찌 표현할까. 증조부와 부모세대 그리고 손주세대로 잇는 극적인 무대가 종횡무진 거침없어 콧날을 시큰케 했다. 이런 무대를 언제 다시 만날까 싶은 조급함이 배우들 동작 하나하나에 내 시신경을 곤두세웠다. 주역 1세대인 이소자 93세, 조영숙 90세. 2세대인 이미자 79세, 이옥천 78세, 김성예 70세. 그리고 신세대 박수빈 38세, 황지영 93년생인 30세. 이 같은 합동 무대는 앞으로도 전무후무하지 않을까 싶다. 

  내친김에 추억의 뒤안길로 돌아섰다. 여성국극 창시자이자 걸출한 남장 전담배우인 임춘앵(1923~1975)씨를 어찌 빼놓을 수 있겠나. 1950년대부터 쇠퇴기인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인기를 한 몸에 받은 그녀였다. 천연덕스런 그녀의 남장연기에 반해 극장을 수시로 드나들었는데... 50대 이른 나이에 사망해 어떤 무대서든 만날 수 없게 된 임춘앵. 무대에서 사라진 그녀지만 생전에 얼굴 볼 기회를 영영 잃었다는 점은 무척 아쉽다. 때마침 그녀의 탄생 100주년인 올해, 여성국극의 부활공연과 겹쳐진 점은 꽤 의미심장하다. 짙은 분장과 화려한 의상의 조명 아래 더 반짝였던 건 전통의 우리 소리와 연기가 조합을 이룬 여성국극의 역사다. 사이사이 절묘한 동작과 전통춤사위가 곁들여진 우리 종합예술의 극치였다. 그런데 지금 뮤지컬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없는 우리고유의 장르를 정부는 왜 지원할 생각을 하지 않아 사향 길을 걷게 했을까. 그런 최악의 상황에 있었음에도 그들은 들꽃처럼 견디며 자생적 힘으로 버텨왔다. 바로 끊어질 듯 이어지고 사라질 듯 하며 부활의 동력을 키워낸 것이다. 뒤늦은 감은 있지만 안산시가 이에 주목해 기틀을 마련해준 일로, 기사회생의 길이 열렸음은 그나마 안심이다.


  이번 일로 나는 한층 고무되었다. 그들 90대에 비하면 내 나이 겨우 70대에 불과하지 않나. 얼마 전까지 80대 이후의 활동에 제동을 건 일은 철회하기로 했다. 건강을 지리 짐작해 활동 전선에 선 긋는 일을 저질렀던 것이다. 아직 닥친 일도 아니면서 마음이 쫓기 듯 심각한 주변 상황에 민감해져서 용쓰고 있는 나를 발견한 일이었다. 이렇게 좋은 몸 컨디션을 유지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단 말을 성급히 내뱉으면서. 나 이제... 사회활동이 허락될 만큼의 육신일 때까지, 해맑은 정신일 때까지, 하고픈 일에서 손을 떼지 않으리라.  

  내 남은 노년기, 사유의 세계를 알음알음 넓혀가기로 했다. 이로써 나로 인해 갇히지 않은 세계를 구축하는 길이다. 배움의 스펙트럼을 다양하게 쌓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뒤늦게 배운 도둑질이 내겐 독서요 인문학 공부였다. 글의 힘을 믿기에 내 비록 늙어 힘이 달리긴 하겠지만 향후 내 나이가 몇이 되던, 끌리는 학문의 호기심을 결코 외면하지 않는, 지금의 페이스 유지에서 좀 더 앞서 가기로 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되돌아보건 데 그건 아주 흥미롭고 자못 단단한 세계로의 안착을 확신시켜 준 일이었다. 나는 정신적으로 더 안정화되었고 미래에 대한 불안에도 의연하다. 자신을 향해 던지는 남겨진 여생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포기하지 않아, 마음의 근육을 키워낸 전력이 공고해지는, 자기 돌봄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신체적 건강에 앞질러, 주체적 삶의 세계를 키운 일이 건강지킴의 단초임을 체화했기 때문이다. 


  사회 곳곳에서 노익장을 과시하는 주인공들이 존재감을 내보이며 손짓한다. 90세인 이순재씨도 최근 연극공연에서 놀라운 활동으로 건재하고 있다. 70 80대에도 시도 가능한 일을 나이 탓으로 돌리며 주저앉아 버린 노인들이 꽤 많다. 주변 공원에서 할 일 없이 어슬렁거리거나 애꿎은 술과 담배로 달래면서 남은 에너지를 속절없이 날려버린다. 한 송이의 꽃도 활짝 피어내기까지 긴긴 세월 허구한 날 인내하며 견뎌낸 시간들로 채워내는 법. 때를 만나 만개를 이룰 우리 인생도 이와 같지 않을까. 누구에게나 다가올 이 개화의 기회를, 늙음을 핑계 삼아  꽃피울 희망을 지레 접는 일은 직무유기나 다름없다. 노랫말에서 자주 인용되는 눈물의 씨앗은 인생의 덤일 뿐, 자기 안에 깊숙이 내장된 희망의 씨앗을 꺼내 저마다의 가슴 속에서 발아시키면 좋겠다. 힘들다는 이 세상이 그래도 살만한 세상임을 살아 알게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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