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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미영 Oct 15. 2023

거스를 수 없는 ‘숙명’

  자식들이 하나 둘 떠나 빈 둥지에 단출해진 부모들. 퀭한 빈자리를 메우느라 애쓴 흔적은 어느덧 씁쓸한 뒤태로 포개집니다. 비교적 넓은 공간에서 홀로 지내는 지인에게 어려운 일은 없냐는 말로 시작됐습니다. 이따금 불안할 때도 있지만 혼자 사는 게 훨씬 좋다는 말이 흘러나옵니다. 그러면서 가끔 집으로 방문하는 딸들의 잔소리만 없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보태지더군요. 어머니에게 이래라 저래라 살림훈수를 둔다는 것입니다. 누가 그걸 모르겠나, 늙은 몸이 뇌의 명령을 이기지 못해 그런 것을. 늙어가는 과정을 모를 수밖에 없는 자식들이 그 점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과년한 딸과 함께 사는 한 친구는 “왜 엄마는 자꾸 바보 같은 행동을 취하는 거야. 빠릿빠릿하지 못하고.”라는 호통을 귀(耳)에 달고 산다고 했습니다. 이럴 때 서로 두둔해 줄 또래가 필요하니, 행동이 굼떠지는 노년에는 이해 못하는 자식 보다 친구가 낫다는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늙어서도 넋두리를 받아 줄 상대가 있어야 마음 속 응어리를 털어낼 수 있습니다. 늙음의 연혁을 서로 공유할 수 있을 때, 연대감은 견고해지고 정서적 안정도 취하게 됩니다. 이렇게 노년의 삶 유지에는 또래의 관계가 미치는 함수가 크지요. 그러니 늙어가면서 또래와의 접속에 게을리 하지 않을 일입니다. ‘인연도 산길과 같다. 매일 오고가지 않으면 잡초만 무성해진다’는 옛말도 있지 않은가요.


  30년 전 일입니다. 모 복지단체의 인솔 하에 일본노인시설을 탐방한 적이 있었지요. ‘노인체험기기’를 처음 대하게 되었는데, 외부에서 듣고 보는 현상을 ‘소리와 영상’으로 나눠 노화의 이해를 돕는 프로그램 중 하나였습니다. 기기의 소리버튼을 누르니 ‘베토벤의 교향곡’이 흘러나오더군요. 음절 마디마디가 고무줄처럼 늘어지며 제대로 들리지 않아 퇴화된 노인의 청력을 확인한 순간이었습니다. 이어 펼쳐진 TV영상도 정상시력에서 볼 수 없는 아메바와도 같은 화면이 펼쳐졌고요. 40대중반의 나이에 마주한 그 체험은 내겐 발생하지 않을 남의 얘기로 치부했습니다. 


  그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무섭게 치달아온 노인 좌석에 안착한 요즘. 장마가 길었던 지난여름인가 돋보기를 쓴 채 화장실 볼일을 보다가 벽면타일에 눈이 멈췄습니다. 엷게 곰팡이 핀 구석이 확대되며 경악을 했습니다. 혹시나 하여 둘러본 부엌타일에서도 다를 바 없더군요. 형편없이 떨어진 노안 때문이지요. 이젠 돋보기를 착용한 채 부엌일과 청소를 해야 할 판입니다. 그 뿐인가요. 평소 왼쪽 귀에 이명증을 달고 살아 청력마저 떨어진 지 여러 해. 아직은 보청기를 착용할 때가 아니란 진단을 받았건만. 강의 현장에서는 늘 불편한 상황을 맞습니다. 강연자가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아 좀 떨어진 곳에 앉아있으면 정확하게 들리지 않아 애를 먹을 때가 많아요. 에고 식사 때에는 어떤가요. 식탁 위에서 밥알이나 반찬을 제법 흘리고 있답니다. 이 모든 일을 지적할 자식이 없는 나로서는 천만다행이라 여길만합니다.


  나이가 뒤로 겹쳐갈수록 저마다의 이유로 거스를 수 없는 순간을 맞습니다. 젊은이에겐 받아들이기 꺼릴 부분이겠지만, 삶이 던지는 ‘늙음’은 이때껏 감지 못했던 낯선 동굴의 영역이지요. 직접 발을 내딛어야만 윤곽을 조금씩 드러내는 부분. 노화는 누구나 피할 수 없고 시도 때도 없이 끼어드는 병력은 각자 짊어지고 가는 숙명과도 같습니다. 기왕 내칠 걸음이니 적극적인 자세로 받아들이면 두려움도 줄고 의외의 반전도 기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불가항력적인 일이기는 하나 마음가짐에 따라 무거움도 기체화되어 가벼워진 순간을 맞지 않을까 해서요. 활동 가능한 ‘지금’, 내 삶을 제대로 마주해 영글게 하는 계기가 끝내 오기를. 이렇게 불만족상황에 이르더라도 마음먹기에 따라 새 국면으로 전환되는 능력을 자라게 하는 계기로서 말입니다. 


  늙어가는 과정에 숙지할 별도의 일도 따릅니다. 애써 마음의 준비에 나서야 하는 것이죠. 귀가 어두워질 무렵 대화 도중에 엉뚱한 일로 비약해 관계에 손상을 입히는 일은 종종 생겨납니다. 보청기 착용이 귀찮아서 그저 늙은 대로 살겠다고 주장하면 주변에 심려를 끼칠 뿐입니다. 제대로 대화가 이어질리 없어 고립을 자초하게 됩니다. 따라서 자신의 늙은 몸을 잘 관리하면서 그때그때 퇴화하는 부분을 메우도록 노력하는 일이 노인이 따라야 할 책무입니다. 어차피 언젠가는 돌봄에 의지할 날이 돌아옵니다. 그럴 때, 자신이 살아온 습관대로 돌보는 이에게 일방적인 요구를 내세우면 안 될 일입니다. 생전의 나를 먼저 죽여 놔야 훗날 제대로 죽어질 수 있는 겁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노인이 마지막 길을 닦아야 할 대목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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