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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미영 Nov 30. 2023

들겨울달과 ‘니체’

  날씨가 부쩍 추워졌습니다. 이른 아침에 고양이 사료를 주러 나갑니다. 잔뜩 옷을 껴입고요. 급작스런 추위에 아파트 내 인기척은 뚝, 발부리에 이리저리 나뒹굴어 밟히는 낙엽 소리만 정적을 깨더군요. 사각사각 휘익. 머리 위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송과 단풍 이파리들이 마치 눈을 뿌리는 것과 같은 착각에 빠뜨리게 합니다. 부리나케 이곳저곳을 돌아 사료를 주고 나서 그 멋진 풍광을 즐기기로 했습니다. 아파트 청소노동자들 손길에 의해 쓸려나가기 전에요. 추위도 잠시 잊게 하는 이 가을의 마지막 정취를 부여잡고 싶은 날이었으니까요. 비록 우거진 숲길은 아니지만 잘 가꿔진 아파트 내 정원을 휘젓고 다니니 떠오르는 시구가 있었습니다.


                           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리니. 

                           가까이 오라, 밤이 오고 바람이 분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


  젊은 날 한 때, 입가에 읊조렸던 레미 드 구르몽의 ‘낙엽’이란 시(詩) 한 구절입니다. 버버리 코트 깃을 살짝 올리고는 센티멘털한 기분에 빠져 덕수궁을 거닐었던 시절이었죠. 그런데요 나이 든 지금은 같은 현상을 두고 냉철한 철학적 사유에 이끌리게 됩니다. 감성의 객관화라고 할까요. 지난 날 단순한 감정이입에 들었다면, 지금은 나무들의 생존방식인 낙엽 떨굼 현상을 우리와 진배없는 성장통으로 바라보게 되었어요. 낙엽을 떨군 뒤 숲 바닥 아래에서 일어나는 나무들의 연대와 강인함에는 이를 지원하는 진균의 존재를 생각합니다. 이 같은 생각의 진폭이 깊고 넓어지게 되면 자기객관화는 어느새 다가오더라고요. 그러면서 요즘 철학서를 더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최근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곁에 두고 틈틈이 읽고 있어요. 젊어서부터 귀동냥으로 익히 알던 책이었으나 그땐 왠지 손에 머물지 못했습니다. 흰머리 날리는 나이에 귀한 배움의 기회를 갖게 된 거죠. 술술 읽히는 책이 아니라서 공부한다는 표현이 오히려 걸맞지 않나 싶습니다.  


  니체가 권유하는 ‘행복론’을 소개합니다(행복이 넘치는 섬들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중에서). 이 주제가 모든 이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선이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관점에서 행복론을 펼칩니다. 첫째, 거짓된 신(神) 관념에서 벗어나라는 권유. 둘째, ‘힘에의 의지’를 가지고 창조자로 살아가라고 합니다. 무기력하게 어떤 신의 존재에 의존적으로 살지 말거니와. 어떠한 인생의 성적표를 받게 되더라도 그 결과에 따라 좌고우면 영향 받는 것이 아닌,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인생 전반에 걸친 지속가능한 과정을 가감 없이 펼치라는 겁니다. 니체는 책 머리말에서 사람들은 잘못된 행복을 진정한 행복으로 착각해 살고 있다고 여러 번 지적합니다.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는 지적이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르떼(德 또는 탁월성)의 개발로서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에 그의 주장을 보탭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탁월성을 거론할 때는 육체가 아닌 영혼의 탁월성을 일컫게 됩니다. 어떻게 해야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 진지한 물음을 자신에게 던질 때가 바로 낙엽 나뒹구는 11월, 들겨울달인 것 같습니다.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로 이어가겠습니다. 노벨문학 고전서입니다. 늙은 어부가 돛단배에 의지해 나간 바다 위에서 청새치와의 처절한 과정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엄청난 크기와 힘으로 버티는 청새치와의 사투를 벌이고 난후 끝내 잡고야 맙니다. 청새치를 배에 매달아 안도하며 귀환하는데 어이없는 일을 또 겪습니다. 난투 중에 흘린 피 냄새로 상어의 밥이 되어버린 청새치였죠. 뼈만 남겨 앙상해진 승전의 성과물에 혼절할 일입니다. 언뜻 허망한 결과로 보이지만 여기서 놓치면 안 될 반전의 섬광과 맞닥뜨립니다. 작품에서 향유하고자 했던 ‘노인의 행복’은 고기를 잡던 ‘충실했던 순간순간’에 방점이 찍혔으니까요. ‘결과’가 아닌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과정’을 더 부각시킨, 헤밍웨이가 독자에게 던진 강렬한 메시지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어쩌면 우리 삶을 통틀어 니체의 ‘행복한 섬’에 다다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실하게 살아낸 찰나의 점들 하나하나가 행복에 이르는 정점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명상을 통해서 알게 된 경험입니다. 모든 일들은 찰나의 한 점 한 점임을요. 성공도 한 순간이며 실패도 찰나에 지나지 않고 즐거움과 슬픔도 한때 지나가는 무형일 뿐. 분명한 건 얼마 후면 그 지점에서 머무르지 않고 사라진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자신이 이룬 정점이 세간에서 주목받지 못할지라도, 자신의 최선이었다면 긍정의 마음을 지녀도 될 일입니다. 내가 먼저 나를 인정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인정하겠나요.   

  “살면서 내 인생은 왜 이리 풀리지 않는 걸까.” 라는 푸념에 젖은 적은 없나요. 한 때, 나도 그랬으니까요. 이제부터는 모든 일에 있어 잘 되지 않을 걸 미리 걱정하기보다, 내가 최선의 마음을 바칠 수 있을지 그것을 걱정할 일입니다. 자신이 최선을 다했으면 그만이요 떳떳할 일이란 겁니다. 속세 기준의 성과물에 결코 매달리지 않기를. 


  만추의 계절, 철학자처럼 지혜의 두레박을 건져 올린 하루였습니다. 여러분, 각기 다른 색조로서 ‘행복한 섬’을 꾸며가길 바랍니다. 니체의 말처럼, ‘당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길이 행복을 유지하는 길’임을 마음껏 외치면서요. 아모르-파티(amor-f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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