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다 Jan 24. 2023

싸움의 기술(4)

복싱으로 배워보는 심리학- 2장 : 맞더라도 상대의 주먹을 보라

         

시합 시작종이 울리자 나는 호기롭게 잽을 날렸고 상대는 뒤로 주춤했다. 나는 더 따라 들어가며 압박했고 마침내 상대가 링 구석까지 몰렸다. ‘어? 이렇게 쉽게 물러서다니 이상한데?’라고 생각할 즈음에 상대가 반격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단단한 주먹이 휙휙 들어왔고 나는 뒤로 엉거주춤 물러났다. 나도 팔을 뻗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어느새 나는 반대쪽 코너에 몰려 있었고 무차별적으로 나오는 상대의 펀치를 피해 몸을 숙이다가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무서웠다.     

“번쩍” 눈앞에서 섬광처럼 하얀빛이 선명하게 일어났고 나는 중심을 잃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내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려 했으나 심판은 경기를 종료시켰다. 상대의 라이트 훅이 나의 왼쪽 광대뼈 부근을 정확히 타격했던 것이다. 보지 않고 맞은 대가는 컸다. 큰마음 먹고 출전했던 세 번째 시합은 이렇게 물거품이 되었다.      


“맞더라도 상대의 주먹을 보고 맞아야 해. 보고 있으면 그래도 몸이 준비를 하니까 충격이 덜 한 거야. 정신 놓고 있다가 별안간에 땅 맞으면 그 펀치에 주저앉는 거야”          


유난히 인파이팅 (근접 전)에 약한 나에게 관장님이 틈틈이 해 주시는 말씀이다.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내가며 얻은 귀한 교훈은 ‘맞더라도 상대의 주먹을 보라’이다.      

취미 수준에서 하는 운동이지만, 굳이 내 복싱 스타일을 말하자면 상대와 거리를 벌리면서 잽이나 원투 스트레이트를 많이 쓰는 아웃 복서다. 인파이팅에는 처음부터 약했다. 계속해서 어퍼와 훅을 연습하지만, 여전히 나의 스타일은 아닌 것 같다. 내 가까이에, 바로 내 눈앞에 나의 상대가 있는 것이 두렵다. 내 스파링을 자세히 보던 한 관원은 ‘태완 형님 인파이팅 할 때 몸이 굳어버려요. 거리를 벌려서 할 때만큼 스피드가 나오지 않아요’라고 날카롭게 짚어주었다. 내가 겁을 집어먹는 것이다. 인파이팅이 적성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실은 내가 겁을 집어먹는 것이다.    

       

스파링을 하며 상대의 눈을 본다. 특히 스파링을 막 시작했을 때 오고 가는 긴장된 눈빛이 인상적이다. 스파링 중간중간에도 상대의 눈을 본다. 근시인 내가 안경을 벗고 하는데도 상대 눈빛이 정확히 보인다. 코가 보호되는 헤드기어를 쓰는 경우 얼굴이 많이 가려 눈만 겨우 보이는 상황인데도 상대의 눈빛은 선명하게 보인다. 지금 지쳐있는지 두려운지 나를 만만하게 보는지 등등이 눈빛에서 나온다. 몇 대 얻어맞았으나 괜찮다는 것도 눈으로 표현한다. 크게 맞았으나 다시 평정을 유지한 눈빛을 상대에게 쏠 수 있을 때 상대는 오히려 겁을 먹기도 한다. 




눈을 보는 것은 스파링에 필요한 기싸움이기도 하지만 상담을 하는 나에게 매우 도움이 되는 훈련이다. 상담을 하면서도 내담자의 눈을 봐야 한다. 위로와 공감이 오가는 순간에도, 증오와 협박이 오는 상황에도 눈을 봐야 한다. 특히 내담자가 힘겨루기를 해 올 때는 피하지 않고 이에 응해줘야 한다. 그럴 때 눈을 볼 수 있는 것은 중요하다. 긴장된 상황에서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떨구는 것과 상대의 눈을 응시하는 것에는 차이가 크게 난다. 타고난 베짱이 작은 나에게 자꾸 긴장된 상황에서 상대를 보는 스파링 연습은 큰 도움이 된다. 문제는 상대가 주먹을 내지를 때이다. 상대와 나만 있는 사각의 링에서 아픈 현실을 피하려고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아버린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픈 현실을 마주하는 법을 몸으로 배운다. 맞더라도 상대의 주먹을 봐야 한다.           




너무나도 명확하고 설명이 필요 없는 진리이지만 우리는 삶의 곳곳에서 눈을 감아버리고 귀를 닫아버린다. 스콧 팩 (1978)은 삶에서 마땅히 겪어야 할 고통을 미루고 회피한 대가는 정신질환이라고 단언한다. 복싱에서 상대가 끊임없이 움직이듯 세상도 쉬지 않고 변한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미래에 일어날 일을 궁금해하지만 사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정확히 보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변화에 맞추어 자기 생각을 바꾸는 일은 귀찮고 때로 고통스럽다.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변화하는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눈을 감고 하나의 행동, 하나의 사실에 집착하는 상태를 강박이라고 볼 수 있다. 마음에 들지 않는 현실을 거부하고 스스로 만들어 낸 판타지 세상에 사는 것이 망상장애다. 요즘 부쩍 늘어난 것처럼 보이는 공황장애도 어쩌면 다루지 않은 삶의 스트레스와 고통을 피한 대가가 설명할 수 없는 공포로 엄습해 오는 것이다. 고통을 마주하자. 생각보다 아프지 않다. 견딜만하다. 복싱을 통해 몸으로 배운다.      

작가의 이전글 싸움의 기술(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