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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쥬르 Feb 23. 2024

조금만 천천히 자라 주겠니

땡땡이의 폭풍 성장


아침잠이 덜 깨 몽롱한 상태에서 아이패드를 켠다. 유튜브를 틀고 아침 스트레칭을 하려다 맨 위 칸에 ‘이날의 추억’이라며 지난겨울 땡땡이와 함께했던 사진이 뜬다. 오늘은 분명 잘 풀릴 것이다. 땡땡이 사진이 떴으니까.


조카는 올해도 폭풍 성장했다. 오랜만에 본 내게 다다다 달려와 꼬옥 안겼다. 항상 옆에 있어주지는 못해도, 일 년에 한 번씩 한국에 가 라포를 쌓아와서일까. 녀석과 나의 관계는 꽤 끈끈하다. 일주일에 한 번이든, 한 달에 한 번이든, 일 년에 한 번이든, 관계에도 ‘꾸준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땡땡이를 통해 배웠다.


호동그란 눈으로 내게 멀뚱멀뚱 호기심만 보이던 꼬맹이 땡땡이는 미국 이모가 오든 가든 별 감정의 동요가 없는 듯했다. 하지만 이젠 날씨가 쌀쌀해지면 이모가 오는 겨울을 손꼽아 기다린다고.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조카바보 이모는 흐뭇한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역시 겨울마다 투자한 가치가 있어. ㅎㅎ”


이번에도 한국 갈 짐과 가족 선물을 한 보따리 싸며 한 살 더 먹은 땡땡이를 상상해 보았다. 얼마나 컸을지 내심 궁금하면서도, 여전히 산타의 존재를 믿고 있기를 바랐다.


조카는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고 구사하는 어휘도 늘고 키도 많이 컸다. 일 년 만에 길쭉길쭉해진 녀석의 모습에, 중학생이 되면 나보다 더 크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장난기는 여전하지만 좀 더 씩씩해지고 사려 깊어진 느낌이다.


“이모가 어렸을 때 나 선물 많이 줘서 나도 이거 준비했어.”라며 미니어처 클래스에서 만든 초콜릿 수제 쿠키를 선물해 주었다.


땡땡이가 만든 수제 쿠키, 과자 선물로 햄볶아요!


“땡땡아, 어린이는 원래 마음껏 선물 받아도 돼.”


“그래도 이모가 선물 너무 많이 줘서 미안했어. 이제는 나도 커서 이렇게 만든 거야.”


땡땡이의 말에 흠칫 놀라며, 어린이는 왜 이렇게 빨리 성장하나 싶다.


한국에 오면 매일 저녁 땡땡이를 씻기는 것도 내 몫이 된다. 하루를 마치며 기쁨으로 임하는 루틴이다. 땡땡이의 작고 말랑말랑한 몸과 윤기 나는 머리에 비누 거품을 낸다. 샤워할 때 큰 소리로 떠들면 이웃집에 다 들린다고 엄마한테 여러 차례 꾸중을 들으면서도, 자작곡 부르기와 더운 김이 찬 거울에 그림 그리기 등 온갖 장난을 멈추지 않는다. 역시 땡땡이는 아직 아가구나… 하며 약간의 안도감이 든다.


“이몽, 내가 씻겨주고 싶어. 내가 등 밀어줄래!”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장꾸력이 폭발하던 땡땡이가 갑자기 어른스럽다. 이제 자기도 할 수 있는 게 많아졌다며 이모를 살뜰히 챙긴다.




한국에 오면 지인과의 만남, 미뤄둔 병원 방문, 쇼핑 등으로 내 스케줄이 빡빡이 채워지지만, 제1순위는 무조건 땡땡이와의 시간이다. 그런데 녀석은 내 마음속 1순위가 자기라는 걸 아직 모르는 듯하다. 경기도민인 내가 서울에 한 번 다녀오려면 하루 종일이다. 저녁 무렵 미안한 얼굴로 빼꼼히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면, 눈을 새초롬하게 뜨고는 ‘한국에 오면 친구들 만나느라 자기랑 놀아주지 않는다’며 삐져있다. 그걸 아는 나는 서울에서 뭐라도 하나 사 손에 쥐여준다. 언제 삐졌냐는 듯 헤헤거리며 “애모, 놀아줘!”라며 살살거린다.


올겨울도 땡땡이와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스머프 보드게임도 하고, 바둑알까기에 구슬치기도 하고, 땡땡이가 어릴 때 한 번이라도 요가를 접했으면 좋겠다 싶어 함께 요가 줌 수업도 들었다. 한 15분 정도 열심히 따라 하더니 힘들다며, 어느새 식탁에서 간식을 먹고 있다. 중간중간 와서 내 손도 잡아주고 부들부들 떠는 내 발도 잡아주면서 “이모, 힘내요!” 하고 응원해 주더니 안방으로 슝 가버린다.


열심히 요가 수업하다 딴짓 중...  태권소녀가 된 땡땡이


땡땡이는 누굴 닮았는지 계획의 화신이 되었다 (극강의 J형인 나라고 말하고 싶지만…). 주말에 자기랑 뭐 하고 놀지 사지선다형 질문을 만들어 주질 않나, 아직 먹어보지 못한 마라탕과 탕후루도 다 먹어봐야 한다며 위시리스트까지 작성해 주었다. 언니와 형부, 조카와 처음으로 마라탕, 마라샹궈를 먹어 본 금요일 저녁, 땡땡이는 말했다.


“이모, 이제 마라탕 체크~! 그럼, 탕후루만 남았네?”


내게는 말하지 않아도 미리미리 갈 곳과 먹을 것을 투두리스트로 챙겨주는 귀요미 조카가 있다. 호기심 가는 곳을 따라 쉴 새 없이 헤엄치는 땡땡이의 투명한 눈동자와 불의 요정처럼 신나게 흥을 표현하는 유연한 몸, 수백 가지 표정을 야무지게 담아내는 알밤 같은 얼굴을 보며, 다시 1년을 달릴 힘을 얻고 온다.


이모 닮아?! 계획 대마왕이 된 땡땡이, 마라탕과 함께라면~~ 탕후루를 받아랏!


나는 신체적 성장을 멈춘 어른이다. 스스로 끊임없이 배우고 정신적 자양분을 주지 않으면 어느 순간 정신적 성장도 멈추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렇게 성장을 멈춘 내가 매년 성장하는 땡땡이를 보며 함께 성장하는 기분이 든다.


예전 회사에서 알고 지내던 한국인 상무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지나씨는 결혼 생각 없어요? 나이도 있는데 얼른 결혼해야지… 아이가 무럭무럭 크는 걸 보는 게 여자한테 얼마나 큰 기쁨인데…”


뒤에 ‘쯧쯧’이 생략된 듯한 이 문장은 틀린 말도 아니다. 아이가 성장하는 걸 보는 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 나도 조카의 성장을 보며 톡톡히 느끼고 있으니까. ‘작년에는 아베베 하더니 어휘가 많이 늘었네. 일 년 사이 손이 이렇게나 정교해졌네’? 내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일 년에 한 번 땡땡이의 성장을 지켜보고 있자면, 형언할 수 없는 놀라움과 행복감이 찾아온다. 이모 마음도 이런데, 땡땡이 엄마인 친언니가 느끼는 행복감은 얼마나 클지 상상이 안 된다. 하지만 막상 언니에게 물어보면, 애 키우느라 정신이 없어 행복을 깊게 음미할 시간은 많이 없다고…


베란다에 만든 작은 정원, 미술시간에 그린 그림, 일본 정식 미니어처


자식의 성장을 지켜보는 부모가 느끼는 행복의 크기와 형태는 조카의 성장을 바라보는 주변인의 그것과 매우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감히 행복의 크기를 비교할 수 있을까? 일 년에 한 번 땡땡이를 보는 내가 느끼는 행복감이 양적인 면에서 한없이 작을지는 몰라도, 농도만큼은 평소 즐겨 마시는 일리(illy) 아라비카 에스프레소 농도와 비슷하다고 자부할 수 있다. 훈육 책임이 없기에 더 아낌없이 사랑을 퍼주고 미국으로 돌아온다. 조카의 성장을 목격하는 기쁨은 무한대로 자유롭다.


땡땡이와 함께하는 등굣길 5분은 나의 하루를 ‘맑음’으로 지속해 주는 봄날의 햇살이다. 첫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주인을 반기는 강아지처럼 폴짝폴짝 뛰며 땡땡이는 말했다. 쏟아지는 눈을 보며 길이 막힐지 걱정은 해도, 눈을 느낀 지는 너무 오래된 어른에게...


“우왕, 눈 온다! 첫눈이에요. 이모도 느껴봐요~~”


“땡땡이는 눈이 왜 좋아?”


“눈이 너무 좋아요. 눈이 오면 겨울이고, 이모가 오잖아!”


땡땡이와 함께한 등굣길, 티 타임


순간 눈물이 찔끔 날 뻔했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에 가끔 이런 말로 이모를 놀라게 하는 땡땡이 속에는 벌써 작은 어른이 크고 있다. 이제 체중 걱정하지 말고 맛있는 것 실컷 먹고 요가도 열심히 하라며 새해 덕담까지 해주었다. 조카의 폭풍 성장을 목격하는 매 순간이 경이로우면서도 조금 짠한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땡땡이가 조금만 천천히 커 주었으면 좋겠다. 조카에게서 영원히 천진난만한 아이의 모습을 보고 싶은 건 이모의 과한 욕심일까?


영원히 산타를 믿었으면 좋겠고, 샤워할 때마다 말도 안 되는 자작곡을 실컷 불렀으면 좋겠다. 내 허리가 휘어지게 등에 올라탔으면 좋겠다. 이모에게 선물은 안 줘도 되니, 먹고 싶은 군것질거리가 있으면 사달라고 떼를 썼으면 좋겠다. 등교 시간 걱정 말고 눈 오리 만들 생각에 한껏 들떴으면 좋겠다.


눈이 오면 행복해요~! ☃️❄️❤️

덧. 오늘은 미국 날짜로 2월 22일. 브런치 2주년을 맞아 땡땡이에게 이 글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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