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 15일, 토요일
운아당에게
오늘은 남편의 생일이야.
이틀 전부터 마트를 오가며 장을 봤어. 무거운 장바구니를 두 손 가득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이들이 말하더라.
“엄마, 그냥 식당 가서 먹자. 뭐 하러 이렇게 고생해?”
순간, 나도 그러고 싶다는 생각이 스쳤어. 예전처럼 몸이 가뿐하지도 않고, 부엌에서 몇 시간을 서 있는 일이 예전보다 더 힘들게 느껴질 때가 많으니까. 하지만 남편은 바깥에서 사 먹는 걸 싫어해.
“밥 한 끼 먹는 게 뭐가 힘들다고 나가서 먹어? 그냥 집에서 간단하게 해 먹으면 되지.”
간단하게? 말은 참 쉽지.
장을 보고, 재료를 다듬고, 하나하나 정성 들여 차리는 게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지 직접 해보지 않으니까 모르는 거야. 콩나물 하나 가려주지 않으면서도, 한 끼 식사를 별일 아니라고 말하니까 속상했어.
그래도 나는 오늘도 부엌에서 손을 움직였어. 식구들이 함께 모이는 날, 정성스러운 한 끼를 차려주고 싶은 마음 하나로.
저녁이 되자 손주들, 딸, 사위까지 온 가족이 하나둘 모였어. 커다란 상을 둘러싸고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모습에, 오랜만에 사람 사는 집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리고 이번엔 남편의 아이디어로 케이크 대신 피자를 준비했지. 케이크는 늘 남기기 일쑤였지만, 피자는 남김없이 사라졌어. 아이들도, 어른들도 기분 좋게 한 조각씩 집어 들었지.
손주들이 작은 손으로 꾹꾹 눌러쓴 편지를 건넸어.
삐뚤빼뚤한 글씨, “할아버지 사랑해요.”라고 또박또박 읽어 내려가는 목소리.
돈으로 살 수 없는 선물, 정성이 가득 담긴 그 작은 글자들이 마음을 울렸어.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함께 음식을 나눠 먹었어.
따뜻한 미역국, 정갈한 나물, 갓 구운 생선, 손수 만든 반찬들로 가득한 식탁이 참 예쁘더라.
남편도, 아이들도, 손주들도 맛있게 먹으며 웃음꽃을 피웠어.
문득 생각했어.
식당에서라면 이렇게 편안하고, 이렇게 자유롭고, 이렇게 시끌벅적하게 생일을 보낼 수 있었을까?
조금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집에서 음식을 장만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
가끔은 서운하기도 해.
남편은 내가 이틀 동안 장을 보고, 하루 종일 부엌에서 종종걸음 친 걸 모를 거야.
그저 "맛있다. 수고했다." 한마디로 끝나겠지.
그런데 그 순간, 손주들의 까르르 웃는 소리에 그런 서운함은 눈 녹듯 사라졌어.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손자가 직접 만든 놀이 거리를 가져왔더라.
주사위를 던져 이동하는 단순한 게임이었지만, 온 가족이 손자의 리드에 따라 빠져들었어.
꼬맹이로만 알았는데 제법 방법도 알려주고, 순서도 정해주는 모습이 의젓하더라.
그리고 게임판 위의 "처음으로" 칸. 그곳에 걸리면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가야 해.
주사위 눈이 그 칸을 가리킬 때마다 탄식이 터지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사람이 엉덩이로 이름을 쓰면서 방 안은 웃음바다가 됐어.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생각했어.
아직 내 손으로 가족을 위해 음식을 만들 수 있으니 감사하다고.
몸이 아파서 하고 싶어도 못 하게 되는 날이 오지 않았으니,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건강한 두 손으로 차린 밥상.
그 앞에서 웃음 짓는 남편과 아이들.
그 사이에서 해맑게 뛰어노는 손주들의 웃음소리.
이보다 더 감사한 일이 또 있을까?
그래서 나는 바란다.
내년에도, 그다음 해에도, 또 그다음 해에도
기꺼이 국을 끓이고, 생선을 굽고, 나물을 무칠 수 있기를.
가족들이 행복하니 나도 행복하다.
림에게,
편지를 읽으며 네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담아 이틀 동안 장을 보고, 하루 종일 부엌에서 종종걸음 치며 음식을 준비했을지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어.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너의 솔직한 고백에 나도 마음이 찡해졌어. 그래도 네가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손끝으로 정성을 다하는 모습이 참 아름답다.
누군가는 ‘그냥 간단하게 먹으면 되지’라고 말할지 몰라도, 그 간단함 뒤에는 수많은 손길과 정성과 노고가 깃든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어. 하나하나 다듬고, 씻고, 삶고, 굽고, 무치는 그 모든 과정이 너의 사랑이라는 걸. 가족을 위해 기꺼이 팔을 걷어붙이고 애쓰는 너의 수고가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걸 나는 알아.
하지만 림, 혹시 너무 힘든 날엔 잠시 쉬어가도 괜찮아. 네가 정성스레 차린 밥상도 소중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너의 건강이야. 가끔은 아이들 말처럼 편하게 식당에서 먹는 것도, 한 끼쯤은 간단히 해결하는 것도 괜찮아. 너의 사랑은 반드시 음식으로만 표현되는 것이 아니잖아? 네가 웃고, 즐기고, 가족들과 따뜻한 시간을 보내는 것, 그것도 충분히 사랑의 한 모습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네 손으로 가족을 위해 음식을 만들 수 있음에 감사하다는 네 마음이 참 예쁘고 따뜻해. 아마도 내년에도, 그다음 해에도 너는 그렇게 정성스레 음식을 준비하며 가족들의 행복을 바라볼 거야. 그리고 나는 바란다, 그 순간순간마다 네가 지치지 않고 행복할 수 있기를. 네가 하는 모든 수고가 네 마음을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에게도 기쁨이 되기를.
림, 네 마음이 전해지는 편지를 읽으며 나 역시 감사한 마음이 들었어. 가족을 위해 애쓰는 너의 모습이 너무나도 소중하고, 그 순간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네 마음이 참 귀하다는 걸 기억해 줘. 그리고 가끔은 너 자신을 위해서도 한 번쯤은 쉬어가기를 바라. 네가 건강하고 행복해야 가족들도 더욱 환하게 웃을 수 있으니까.
따뜻한 마음을 담아, 운아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