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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내 집에 놀러 와

by Merry Christmas

3번 침상이 비워지고, 두 번 날짜가 바뀌었다.

기상청에서 예고한 대로 주말 동이 트자마자 태풍이 한반도에 상륙했다. 올해는 무슨 물난리가 나려는지 역대급으로 긴 장마의 끝에 또다시 태풍이 비를 몰고 왔다.


이 와중에 남편은 아이를 데리고 면회를 온다고 했다.

며칠 전부터 말렸지만 듣지 않았다.

대구에서 경기도 화성까지 거리도 거리이거니와 태풍을 뚫고 오겠다는데 더 걱정되지 않겠는가.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기어이 아침 9시에 출발한다는 통보를 했다.

운전 중에 전화를 하면 더 위험할까 봐 잘 오고 있느냐는 전화도 하지 못한 채로 나는 걱정만 할 뿐이었다.


내가 누워있는 1번 침상에는 창문이 없는데도, 건너편 침상 창문을 흔들어대는 비바람 소리가 커다랗게 들렸다. 자리에 누운 채로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간호사들이 시트와 침구를 들고 병실로 들어왔다.

비어있는 3번 침상에 또 다른 환자가 들어오려는 것이다.


우리 셋은 서로 얼굴을 쳐다봤다. 이틀이나 지났지만, 아니 고작 이틀 지났기에 우리는 영애언니에게 닥친 일로 아직 마음이 편치 않은 생태였다. 그 와중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온다니, 우리는 다들 고등교육을 받은 배운 사람들이고,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 3번 자리가 가진 이력 때문에 괜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또 다른 무엇인가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있으려니 11시쯤 새로운 환자가 왔다. 검은 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린, 순한 눈매와 가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또래 여성이었다. 사교성이 좋은지 들어오면서 우리에게 웃으며 인사했다.


또다시 효진 씨의 호구 조사가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평소보다 어조가 조금 더 조심스러웠다. 그녀의 조사로 알아낸 바는 다음과 같다.


이름 정려원. 광주에서 왔다고 한다. 현재 22주. 태명 '딱풀이'. 다른 병원에서 예방맥수술을 했었는데, 다시 경부길이가 짧아져서 재수술을 위해 입원했다고 한다. 오늘이 토요일인 데다가 심각한 상황은 아니어서 월요일에 수술 예정이라고 했다. 심각한 상황이 아니라는 말에 우리 셋은 모두 안도했다. 그리고 나란히 다시 놀랐다. 22주 된 '딱풀이'는 무려 셋째였다.


"셋째요? 와.. 대단하십니다."


요즘 같은 저출산 시대에 수술까지 하면서 셋째를 가지다니. 애국자가 아닌가. 다들 같은 생각인지 3번 려원 씨에게 존경의 눈빛을 열렬히 보내고 있었다.


상냥한 뉴페이스와 담소를 나누는 동안에도 나는 남편과 딸아이가 무사히 오는지 걱정스러웠다. 주말이라 다른 가족들이 속속 면회를 위해 오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으로 점심 배식을 알리는 급식차소리와 함께 병실로 나의 가족이 들어섰다.


고작 2주 만에 다시 보는 것인데도, 무척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딸아이는 그 새 또 자라 있었다.

오랜만에 엄마를 봐서 어리광을 부릴 만도 하건만, 엄마에게 안기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오자마자 배가 고프다고 했다. 여전히 먹성이 좋구나.

아이가 좋아하는 크림스파게티를 주문해서 드물게 일어나 앉아 함께 밥을 먹었다. 입원 이후로 계속 누워서 밥을 먹고 있었던 나는 앉아서 밥을 먹는 것이 새삼스럽게 감개무량했다. 그래서 혈당에 대한 걱정은 접어두고 딸과 함께 열심히 스파게티를 먹었다. 스테이크를 주문한 우리만큼 식욕이 없는지, 고기를 작게 잘라 딸과 나에게 나누어주기 바빴다. 엄마는 아랑곳없이 먹는데 열을 올리던 딸이 밥을 다 먹자 드디어 나에게 대화를 시도했다.


"엄마, 다음에는 엄마가 내 집에 놀러 와."


병원에 있지 말고 집으로 오라는 말일 텐데, 내가 아예 한 집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울컥했다.


"그 집 니 꺼 아니고 내꺼야. 내 명의로 샀어."


시큰둥하게 대꾸했더니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라고? 아림이 집 아니야?"


"공동명의인데..."


남편이 소심하게 한마디 추가하고 몇 가지 대화를 주고받으며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무렵. 남편과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풍이 오고 있기도 하고, 장거리 운전을 해야 하는 만큼 해가 지기 전에 가는 것이다. 보고 싶은 마음이야 너무나 당연하지만 고작 두 시간 남짓의 면회를 위해 대구에서 태풍을 뚫고 와서, 그 길을 다시 내려가야 한다니.


"천천히 조심해서 가요."


내 인사에 딸이 집에 가지 앉고 엄마랑 있겠다며 떼를 쓰기 시작했다. 나는 또다시 사랑하는 내 아이에게 거짓말을 했다.


"저기 병원 밖에 쪼금만 차 타고 가면 공룡이 있어. 아빠하고 공룡 보고 와."


"공룡?"


아림이는 기대감에 웃으며 다녀올게 하고 손을 흔들고 아빠를 따라 나갔다. 남편과 나는 눈인사를 했다.


조심해서 가.


마음으로 한 말을 알아듣고 남편이 고개를 끄덕이며 병실 밖으로 나갔다.


면회를 온 가족들이 하나 둘 병실을 떠났다. 거리가 가장 먼 우리 가족이 가장 먼저 가고, 마지막으로 집에 동탄이라 가장 가까운 효진 씨의 남편과 아들이 병실을 떠났다. 모두 다 갔을 무렵, 창 밖에 어둠이 내리고 남편에게서 잘 도착했다는 전화가 왔다.


아림이는 차에 타자마자 잠이 들어서 가는 내내 잘 잤다고 한다. 차에서 내릴 때 잠에서 깨고는 엉엉 울어서 달래느라 지금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고 했다.


오늘은 8월 29일. 블루베리가 26주 0일 되는 날이다. 내가 다시 입원한 지 2주. 최초 입원일로부터 25일이 지났고, 예정일은 12월 5일이다. 아직 갈 길이 멀었다. 빈말로라도 빨리 집에 가고 싶다고 할 수 없는 나는 그저 최대한 이곳에 오래 입원할 수 있기를, 그러나 시간은 빨리 흐르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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