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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안 Sep 13. 2023

부모님 도움 없이 결혼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우리가 결혼할 때 나는 대학원생, 남편은 사회초년생이었다. 서로 맞았던 것 중 하나가 부모님 도움 없이 결혼하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양가 부모님들의 형편은 경제적으로 크게 어렵지 않다. 하지만 많이 여유로운 것도 아니다. 남편과 나는 모두 부모님께서 학업에 대해 아낌없이 지원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함이 있다. 그래서 적어도 노후를 준비하시는 과정에 부담을 드리고 싶지는 않았다.


처음 남편과 결혼을 결심할 때에는 예산을 최소한으로 잡고 계획을 세웠다. 부모님께 양해를 구하고 예단이나 예물 생략하기. 남편 소득과 대출 자금으로 작은 원룸에서 시작하기. 결혼식은 생략하거나 혹은 스몰 웨딩으로 준비하기. 국내로 신혼여행 가기. 이 외에도 크고 작은 일정들을 가능하면 생략하고 경제적으로 부담되지 않는 선에서 결혼하고 싶었다.


하지만 계획대로 된 건 거의 없었다. 자식이기만 했던 우리가 부모님의 깊은 마음까지 고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편과 둘만 이야기할 때는 결혼식을 준비하는 많은 과정이 다 허례허식처럼 느껴졌다. 각자 형편에 맞게 가정을 꾸리고 잘 살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게 우리 입장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놓친 건 부모님의 마음이었다. 사실 이 계획을 양가 부모님께 말씀드리면, 기특해하실 거라고만 생각했다. 어쩌면 부모님도 금전적인 부담을 덜어서 조금은 홀가분하지 않으실까 짐작하기도 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부모님들은 아쉬워하시고 속상해하셨다. 


누구보다 당당하고 멋지게 자식들의 결혼을 꾸며주고 싶으신 게 부모님의 마음이었다. 더욱이 우리의 결혼은 양가에서 모두 개혼이었다. 자식들 중 첫 결혼이라 더 설레고 기대가 크셨던 것 같다. 이미 시부모님께서는 아들의 결혼을 대비해서 자금을 모으고 계셨다. 게다가 마음에 드는 며느리를 본다는 걸 주변에 자랑하고 싶어 하셨다. 하나뿐인 며느리를 위해 꾸밈비까지 넉넉히 준비하셨다.


친정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우선, 딸이 대학원 학업을 마칠 때까지 뒷바라지해주고 싶어 하셨다. 결혼해서도 걱정 없이 공부하라며 돈을 보태주려고 하셨다. 물론 내가 거절했다. 혹여나 부모님 걱정 끼치기 싫어서 딸이 급하게 결혼하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까지 하셨다. 그리고 딸이 예쁘게 잘 살길 바라는 마음으로 사돈댁에 드리는 예단도 알차게 준비하셨다.


우리 입장에서는 그저 불필요한 행위들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부모님께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기어코 부모님 의견을 배제하고 우리 뜻대로 결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들의 사랑을 모른 척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온 마음을 다해 키운 자식의 결혼을 준비하면서 그 정도 행복은 누리실 자격이 있으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우리의 거창한 계획은 모두 반대로 이뤄졌다. 


결국 양가에서는 모든 예단과 예물을 주고받았다. 결혼식장 하객도 넘쳤고 대접하는 식사도 화려했다. 신혼여행은 해외 유명 휴양지로 다녀왔다. 결혼을 준비하는 동안 잠깐 원룸에 살기는 했지만, 곧바로 시부모님의 지원으로 아파트 전세로 이동했다. 또 몇 년 뒤에는 친정 부모님의 도움으로 조금 더 넓은 집을 마련했다. 절대로 남편과 내 힘만으로 할 수 없는 결혼식을 양가 부모님의 도움으로 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애당초 부모님께 손을 벌리고 싶지 않은 다른 이유도 있었다. 나는 부모님 밑에서 성장할 때 감사함 뿐만 아니라 항상 죄송함과 책임감을 느끼면서 커왔다. 부모님께서 고생하시는 모습을 봐왔기 때문에 나에게 들어가는 돈이 늘 부담됐다. 그만큼 성과를 내지 못하면 어쩌지라는 불안이 항상 있었다. 정작 부모님께서는 무언가를 바라고 나를 키우신 건 아니다. 하지만 자식 입장은 또 다르다. 아무튼 결혼을 통해 이런 마음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적어도 결혼할 때만큼은 남편과 내 힘으로 제대로 서야만, 앞으로 그런 부담감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둘 다 사회초년생이라 미래에 얼마나 많은 소득을 벌어들일지 예상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부모님께 지원받지 않고 결혼해야, 나중에 부모님의 노후로 인해 다시금 내가 걱정하는 일이 없을 거 같다는 막연한 두려움도 있었다.


시댁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은 또 다른 속셈도 있었다. 나 편한 대로 눈치 안 보고 살고 싶어서였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주변에서 주워들은 게 많아서다. 시댁의 도움을 많이 받은 지인들이 나름대로 겪는 어려움을 들었다. 돈이라는 게 참 신기해서, 받고 나면 입을 싹 닦을 수가 없다. 작든 크든 일단 받은 건 받은 거다.


이런 새까만 속내를 감추고, 결혼을 조촐하게 치르고 싶었다. 마음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얻은 것이 있다. 그동안 몰랐던 부모님의 마음을 많이 헤어리게 됐다. 생각해 보면 자식인 우리도 자식 노릇하기 힘들지만, 부모 또한 부모 노릇하기가 어려우실 것 같다. 결혼한 후 새삼 깨닫는다.


자식과 부모는 전혀 다른 세대를 살아왔기 때문에 절대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 나이가 들수록 부모는 지는 해고 자식들은 떠오르는 태양이라 자식들의 힘이 점점 더 강해진다. 머리에 피가 마르면서 부모님께 잔소리도 하고 가르치려 들기도 한다. 부모는 그저 해오던 대로 했을 뿐인데 시대가 달라지고 세월이 지나면서 갑자기 전세가 역전된 것뿐이다.


우리 둘만 결혼을 준비했다면, 우리는 부모님을 여전히 “옛날 사람”정도라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함께 준비하는 결혼이었기 때문에 양가 부모님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 과정을 한 단계씩 준비하면서 부모님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식은 부모가 되기 전에는 어디까지나 자식일 뿐이다. 깊고 넓은 부모의 마음을 어찌 다 알겠는가. 이제 나는 부모님께 받는 것들을 부담스럽게만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더 많이 감사해하면서 언젠가 또 다른 방식으로 갚아드릴 날이 오기를 바라며 열심히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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