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굳이 나아가야 한다면
“딱히 대단한 무언가가 되고 싶다고 마음먹은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아닌 채로 죽어갈 순 없잖아.”
재작년의 나는 흔한 아무개답게 잔잔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하고 싶어서 시작했던 일이 살아가기 위해 해야 하는 일로 바뀌어 버린 건 나의 무지성에 가까운 핑계들로 비롯된 것들이었다.
우주의 영원을 기준으로 친다면 되려 나의 짧은 생의 기간이 특이점일 뿐일텐대 그 짧은 찰나가 나 자신에게조차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니 그 얼마나 재앙이란 말인가.
어느 날 머릿속으로 “죽자.”라는 결심이 섰던 날.
무엇이 아쉬웠는지 하고 싶었던 것을 마지막으로 원 없이 해보고 죽자고 마음먹었다.
그건 역시나 영화였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다행이었던 건 영화라는 것은 한편만 제작하는 데에도 어마어마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것이었고 막상 시작해보니 그것을 원 없을 때까지 하려면 내 평생을 다해도 그 시간이 모자랄 만큼 영화라는 것은 너무나 높은 목표점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다.
내가 이번에 만들고 있는 “르네에게.”라는 영화는 음악 영화, 로맨스 드라마의 껍데기를 두르고 있지만 사실은 욕구에 대한 이야기이다.
“보편타당한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삶은 누구를 위한 삶인 것인가?”
물론 인간이 잘못된 욕구, 혹은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욕구까지 모두 이루며 살아갈 권리는 없다.
하지만 이름도 모르는 타인과 사회, 지인, 가족 아니면 스스로 만들어낸 핑계로 인해 사랑과 꿈, 낭만 같은 정당한 욕구까지 재단 당해야 할 필요는 또한 당연히 없을 것이다.
나는 이제 꿈과 사랑, 낭만이라는 욕구를 타인과 세상의 부당한 시선과 관점으로 인해 더이상 거세당하지 않기 위해 애 쓸 것이다.
“르네에게”는 결국 그것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었다.
이것도 결국 꿈과 사랑, 낭만을 거세당한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채로 서서히 죽어가는 존재일 뿐이라는 나의 극단적인 망상 때문일 것이다.
지난 며칠 간 친한 지인 몇 명에게 영화의 가편을 보여주었다.
그들 중 몇몇은 나의 마음이 상할까 조심스럽게 몇몇 아쉬운 부분에 대해 비평을 해주었지만 나는 간신히 만들어낸 이 영화에 대한 애착이 너무 심했던 나머지 온 마음이 갈가리 찢겨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몇몇은 아주 호평을 보였고 그 마음에 고마웠다. 하지만 결국 나를 다시 편집툴에 앉혀 놓아 수정하게 하는 건 결국 작품에 아쉬워하는 전자의 의견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만든 영화를 객관으로 바라 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영화의 마지막 촬영 회차 즈음의 어느 날 회식 자리에서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목 놓아 엉엉 울고 싶기도 했다. 물론 체면상 참아냈지만 말이다.
촬영이 끝나고 편집이 끝나면 이 영화의 주인공이 내 곁에서 떠나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사랑하던 연인, 오랜 친구가 떠나가는 감정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결국 영화의 주인공들은 나를 떼어내 붙이고, 나의 가족과 친구를 떼어내 붙이고, 해당 배우를 조금 떼어내 붙이고 내 주변인들의 모습을 조금씩 떼어내 붙인 일종의 감정적인 영역의 프랑켄슈타인 같은 인물들이었다.
당연하게도 나는 그 사람들을 진심으로 매우 사랑했다.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사람은 내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이들이 울고 웃고 말하고 움직이며 화면에 수놓는 이야기들을 객관적인 눈으로 스스로 평가하는 것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법이다.
나는 한동안 편집의 마무리 작업을 해내기가 도통 쉽지가 않을 것만 같다.
설령 아주 만약에라도 우리가 만든 이 영화가 잘 되더라도 내 인생에 좋은 날이 오진 않을 것이다.
난 이제 그 정도 즈음은 알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원 없이 표현하다 죽을 생각이다.
더 이상 재단 당하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