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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승원 Jan 24. 2023

안녕, 뵈브 클리코야? 이제 2023년이야.

근데 석열이가 두 살이나 깎아줬어.

안녕, 뵈브 클리코야? 이제 2023년이야.

구정인데 집에 갈비찜도 흔한 전도 과일도 그 무엇도 아무것도 없어서 헛헛한 마음에 어떻게든 기분 낸다고 동네 시장 구판장에서 널 사 왔어.

그러고 마누라랑 둘이 오붓하게 따라 마셨지.

뵈브 클리코가 “한번 기분 내서 까마셔 봤어요.”라고 동네방네 자랑할 정도의 술은 아니란 거 나도 알고 있어. 내가 바보두 아니구 말야.

그렇지만 넌 특별하진 않아도 좋은 술이잖아. 내가 특별하진 않아도 좋은 사람인 것처럼.

괜찮아. 난 돔페리뇽보다 너가 더 좋더라.


나 취한 김에 말해보는데 메타버스, 투기 열풍, 레디컬 페미니즘, MBTI, 틱톡 챌린지, 비트코인, K-국뽕 열풍, 인스턴트 힙스터 같은 것들로 온통 세상이 뒤덮여 나 같은 애는 설 자리도 없어질까 봐 그게 그렇게 무서웠나 봐.

나는 늘 무서웠거든.

내가 사실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끝나버리는 엔딩 같은 거 말이야.

그래서 그렇게나 조바심을 내고 맘대로 되지 않으면 이런 데다 분노를 퍼부었나 봐.

내가 말주변이 좋으니까 그 분노들은 조금 있어 보였을지도 몰라.

하지만 난 그냥 조금 많이 고독했을 뿐이야. 아닌가? 외로웠나? 아니면 그 두 감정은 교묘하게 중첩되었나? 그래 중첩됐었을 거야. 아마 37년 동안이나.


나도 변명 한마디만 하자.

예를 들어 만약 누군가 담배를 미친 듯이 혐오한다고 생각해 봐. 근데 그 누군가의 아버지가 애연가라고 치자. 그럼 그 사람은 자기 아버지까지 혐오해야 할까? 그건 아니잖아.

난 위에 열거한 것들을 지독하게 미워하고 혐오했어. 하지만 그것들을 애호하거나 좋아하는 사람들, 해당 산업의 당사자, 아니면 휩쓸려서 따라한 사람들까지 나는 미워하지 않았어. 사실 얼굴도 모르잖아. 우리.

난 거시적 관점으로 본다면 우리 인간종을 너무나도 사랑해.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는 걸.

진짜 나쁜 놈들만 빼고 말이야.


그러니까 힙스터들아 나랑 화해하자.

작년엔 너무 미안했어.

나 너네 진짜 하나도 안 미워하구 좆밥들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아.

너네도 있어야지. 이 멋진 세상에 말야.

나 같은 애들도 사는 것처럼.

근데 너네는 절대 이 글을 읽지 않겠지.

아니 내가 또 시비 거는 게 아니고 너넨 원래 하잎 되는 거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잖아.

그래서 그래.

헤헤헤.


나는 요새 브런치를 예전만큼 자주 쓰지 않아.

나한테 글은 고름 같은 거야. 마음과 정신에 고름이 들어차면 그걸 잘 정리해서 양동이에 쏟아붓는 거지. 한참이나 열심히.

근데 나는 요새 머릿속에 생각이라는 고름이 끊이 게 됐어.  혼란 속에 닻을 내리고 정의를 내린다는 것이 조금 버거워졌어. 양동이로는 어림도 없는 느낌이야.


작년에 몇몇 사람들은 나의 그 고름을 보고 내가 좋은 사람 같아서 좋다고 말해줬어. 심지어 어떤 사람은 내가 되게 똑똑한 사람 같대. 나의 고름은 굉장해.

내가 일평생 남들한테 보여주고 싶었던 가상의 내 모습을 하고 있잖아. 기특해. 기이해. 슬퍼. 웃겨.


나는 있잖아.

돈자랑 말고는 아무것도 할 게 없는 사람이 되는 건 정말 싫어.

막 그런 거 있잖아.

명품 브랜드 로고가 대문짝만 하게 박혀 있는 옷, 신발, 모자를 걸치고 가격을 들으면 깜짝 놀랄 정도로 비싼 외제차랑 손목시계를 자랑하면서 남들이 자신의 가치를 더 높여 쳐주길 바라면서 사는 그런 삶 말이야.


혹은 시대를 관통하는 엄청난 명작을 만들어 동네 꼬마부터 할머니까지 누구나 우러러 봐주는 그런 삶을 바라는 것도 아니야. 정말이야.

옛날엔 쪼금 그랬는데 이젠 정말 아니야.

바라지 않아.


나는 예민하고 섬세한데 엉망이고 솔직한 사람이 될 거야. 그래. 난 그런 걸 자랑하는 사람이 될 거야.

내 나이 또래 아저씨 중에 나만큼 예민하고 섬세한데 엉망이고 솔직한 사람 절대 없을 걸 하고 자랑할 거라구. 그런 사람의 정신과 마음에서는 마구 고름이 나오겠지. 아마 엄청 많이 나올 거야.


뵈브 클리코야. 2023년이야.

2022년이고 2023년이고 다만 인간이 나눈 개념일 뿐인 거잖아.

왜 내가 겨우 그런 이유로 너를 사다 마셨겠어.

그냥 핑계가 필요했을 뿐인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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