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들은 중요한 걸 만들고 있느냐
'기술공화국 선언'은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이질적인 느낌의 창업자,
팔란티어의 CEO 알렉스 카프의 책이다.
원제는 'The Technological Republic' (기술공화국)이니, 한국어 제목에서 '선언'이 추가되었다.
알렉스 카프 Alex Karp는 고점인 줄 알았던 올해에도 주가가 140% 뛰었다는 (4년간 10배) Palantir Technologies의 공동 창립자이자 CEO이다.
관심이 생긴다면 일단 주식을 사고 리서치를 해야 하나..라는 생각을 해본다. 양자물리학 다큐멘터리를 기획하던 2년 전에, 리서치하면서 취재하고 싶었던 회사는 아이온큐였다. (마찬가지로 몇 배 상승했다.) 만약 다음 프로젝트를 리서치하면 주변에 관련 기업을 추천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빅테크 기업의 영향력이 국가를 초월하고, 나아가 국가의 거버넌스와 결합한 기술공화국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 사람만의 주장은 아니다. 빅테크의 영향력은 2010년 이후 너무 크고 확고해져서 사실상 공공영역과 경계를 나누는 것이 힘들어지고 있다.
올해 가장 신선한 인사 발탁이라면 이재명 정부에서 대통령실 'AI미래기획수석비서관'직을 신설하고 네이버에서 AI연구를 이끌던 하정우 당시 네이버랩 AI연구소장을 뽑은 것이다. 네이버 같은 대기업과의 관계가 예전 같으면 조심스러울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런 걸 염두에 둘 틈이 없어 보인다. 그 자체로 뭔가 쿨한 실리콘밸리 느낌도 풍긴다.
대선 이전인 올해 4월, '모두의 연구소'와 '과실연(바른 과학기술사회 실현을 위한 시민연합)'주최의 AI포럼 미디어데이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때 과실연 공동대표를 하던 하정우 수석도 나와 열심히 소버린 AI의 필요성을 이야기했다. 민간 기업 단위에서 할 수 없는 프로젝트라는 이야기였다. 어쩌면 익숙한 풍경이다. AI라는 이 시대의 소재만 다르다. 참여연대와 같은 시민단체에서 캠프로 들어가고, 공직에 발탁되는 것이 지금까지 보던 풍경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권력을 감시하고 사회를 개혁한다는 로그라인만으로는 진보든 보수든 선뜻 손이 나가지 않을 것이다. 과학기술에 대한 전문성과, 공공영역에 대한 감각을 동시에 가진 사람의 영역이 넓어질 수밖에 없다.
그때 프레젠테이션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영국의 사례였다. 영국 정부는 2025년 1월 공식적으로 “AI 고문 (Advisor on AI / AI Opportunities Adviser)” 직책을 신설하고 스타트업 인큐베이터 EF의 대표 출신인 맷 클리포드를 임명한다. “AI 기술을 영국 산업의 기회로 전환하는 전략”을 설계하는 핵심 인물이 된 것이다.
관련 정책 우선순위 조정, 핵심 의제 제안, 각 부처에 걸친 AI 정책 통합 조정, 위험과 기회를 총리에게 자문, 장기적인 국가 AI 로드맵 설계... 대충만 찾아봐도 그 역할이 장관급 이상으로 보인다.
게다가 “Prime Minister’s AI Opportunities Adviser(총리의 AI 기회 고문)”라는 공식 직함은 통상 부처(예: 과학기술부, 디지털부) 산하 고문과 달리 총리실 직속이라는 뜻. 그는 정기적으로 총리에게 직접 보고서를 전달하고, 정책 결정에 자문한다고 한다. 영국이 얼마나 ai 산업화 전략에 진심인지 알 수 있다.
전통적인 관료가 아닌 민간 테크 생태계 출신 인물을 국가 전략의 중심에 앉힌 것은 지금까지 못 보던 일이다. 그러나 영국뿐만 아니라 미국, 일본, 프랑스, 싱가포르 등에서 이런 흐름을 볼 수 있다. 뭐가 맞는지 따지기 전에 이미 국가 간 레이스가 시작되어 버린 것이다.
얘기가 좀 샜지만..
민간기업과 공공영역, 그 어느 때보다도 선을 긋기 힘들어졌다. 아시안게임에 추신수도 나오고 박찬호도 나왔듯이, 프로선수인 테크 기업의 인사들 외에는 이 게임에 낄 수 있는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의 삶이 가장 큰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어쩌면 영원히 레이스에서 탈락해 '미래 먹거리를 놓치고 3류로 전락'할 수 있다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K-공포심도 있다. 이미 돈 잘 벌고 있는 사람들이 이제 정치도 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고, 한국 대표 선수들이 금메달을 딸 수 있게 응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최소한의 공공성, 즉 공화국(Republic: 국민주권국가)이 추구하는 공동체의 이익과 기업 혹은 개인의 이익이 충돌하는 일은 없을까 싶기도 하고, 인류가 도달한 현재의 민주주의 체제 역시 불평등 앞에서 작동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차라리 신선하기도 하다.
인터넷이 처음 등장했을 때 정보가 모두에게 동등하게 주어지므로, 좀 더 평등하고 오픈된 사회가 될 거라는 전망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 측면이 없지는 않지만, 그게 핵심이 아니었다는 것은 모두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더 파괴적인 기술인 AI는 어떤가. 여기서 기술공화국이라는 개념을 들고 나온 사람이 팔란티어의 수장 알렉스 카프다.
'기술공화국'이란 말은 '기술과 인문학의 결합' 같은 문장과는 좀 다르다. '기술과 권력의..'라는 테제에 가까울 것이다. 개인과 기업이 고도로 발달된 기술을 손에 넣어 그 영향력이 국가의 단위를 넘어설 정도로 커질 때, 어떤 판단 기준을 가질 것인가라는 질문을 여러 차례 던질 수밖에 없다.
알렉스 카프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것, 그리고 그가 운영하는 팔란티어가 CIA와 계약한 '빅 데이터 프로세싱 기업' 즉 수많은 데이터들로부터 정확한 추론을 제공하는 컨설팅회사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이너리티 리포트> 같은 SF영화에서나 보던, 범죄정보를 예측한다는 그런 업무, 그리고 테크 기업의 데이터 처리 능력과 국방정보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 것이 일반적인 빅테크 기업과 완전히 다른 면이다.
책의 로그라인은 '인류의 미래는 어디로 가는가'인데, 사실 그런 내용이 먼저 다가오지는 않았다. 다만 현재의 '테크 기업'에 대한 끊임없는 일갈 혹은 디스를 먼저 맛볼 수 있다. 사실 좀 통쾌하기까지 하다. 나는 전자책을 읽으면서 인상적인 부분들을 저장하는데, 다음과 같이 거의 랩 배틀에 가까운 지적을 즐겨볼 수 있다.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공유되는 요소들은 시민적이나 정치적인 게 아니라 주로 엔터테인먼트, 스포츠, 유명인, 패션에 집중돼 있다. 이렇게 된 연유는 단순히 어떤 메울 수 없는 정치적 분열의 결과가 아니다. 상당한 규모의 집단 내에서,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도 일종의 상상된 친밀감을 가능하게 해 주던 대인관계의 연결이 끊어지고 공적 영역에서 추방되었다."
"실리콘밸리의 리더들은 종교나 전통 같은 뚜렷한 뿌리가 없는 세대의 인재들로 맹렬한 세속주의 말고는 어떤 가치에도 헌신하지 않는 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실리콘밸리에서 흔히 혁신이라고 불리는 것 가운데 상당 부분은 그렇지 못하다. 실상은 과거에 잘 됐다고 알려진 방식을 그대로 복제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물론 이런 모방이 때로는 성공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지만, 대부분은 파생적이고 퇴행적이다."
"대규모로 만들어지는 앱, 게임, 영상 공유 플랫폼들은 막대한 자본과 인재를 빨아들이면서 더 의미 있는 프로젝트를 뒷전으로 밀어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앱, 게임, 영상 공유 플랫폼들은 심지어 안전하지도 않다. 특히 이 새로운 화면 기반의 주의력 경쟁이 아이들에게 미치는 장기적 영향과 해악은 이제야 비로소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을 뿐이다."
"이들은 택시 호출, 식당 예약, 휴가용 숙소 예약 같은 일상적 수고를 휴대전화 화면을 몇 번 터치하는 것만으로 간단히 처리할 수 있는 앱과 서비스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자기 자신과 또래에게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다는 환상을 제공하려 했던 것이다."
"2010년대를 기점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이후 세대의 창업가들은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이 택시를 부르고, 음식을 주문하며, 친구들과 사진을 공유할 때 느끼는 불편함을 발명 아이디어의 주된 원천으로 삼았다."
"막대한 자본이 흘러넘쳤지만, 이를 모을 국가적이거나 공동체적인 대의나 목표가 없었다. 사람들은 자기만의 사소한 일상 문제를 해결하려는 데 창업 에너지를 쏟았다. 그 가운데 많은 경우 생활 속 자질구레한 불편함이나 자존심에 상처가 되는 소소한 문제들을 다루는 일이 주류가 되었다."
알렉스 카프의 비전이 이게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귀에 피가 나오도록 계속 강조하는 그의 주장은
빅테크 기업들이 막대한 자본을 가지고 사소한 것들을 만든다.
인데, 택시호출 (우버), 식당예약 (옐프), 숙소예약(에어비앤비) 등... 그것 역시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다는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알렉스 카프가 보기에 그들은 의미 있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주의력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을 할 뿐이다. 지금 앱으로 억만장자가 된 실리콘밸리의 창업자들은, 세속적인 가치에만 집중하는 속물일 뿐 진정한 의미에서 '야망이 없었다'.
"문제는 사람의 욕구나 필요를 충족시킨다는 데 있지 않았다. 이 회사들의 야망이 얕고, 순간적인 가벼운 쾌락을 넘어서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는 데 진짜 문제가 있었다. 그 시대의 에너지는 창업을 꿈꾸던 사람들의 일상에서 느낀 불편을 해결하는 데 집중되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일종의 현자(GURU)로 자리 잡은, 거기에 자유로운 조직문화의 리더의 분위기를 풍기며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인류를 선도해 나가는 듯한 빅테크 기업들, 특히 앱을 개발하는 기업들의 상당수는 그저 장난감과 같은 소비문화의 욕망을 충족하는 것들이나 만들고 있다는 것인데, 그런데 그러고 보면.. 그런 면이 있기도 하지 않나?
자동차, 전화기나 세탁기가 생겼을 때. 상하수도가 개선되고 백신이 개발되었을 때의 혁신과 비교한다면 우리가 지배받다시피 하는 2000년대의 혁신은 어떤 종류의 '혁신'일까?라는 생각을 가지면서, 나는 조금은 설득되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국가의 이익이나 실질적인 기술 발전과 무관한 '참여 지표(engagement metrics)' - 클릭, 머무는 시간, 좋아요 수 - 에만 몰두하고 있다고 비판해 왔는데, 클릭수 같은 것에 집착하는 것이 사회적 분열을 조장하고, 진실보다 감정적 자극을 강화하며, 결국 민주주의의 토대를 흔들 수 있다고 경고한다.
특히 Meta나 Google 같은 기업들을 가리켜 이렇게 비판했다.
“They pretend to build technology, but what they really sell is engagement — clicks.”
(기술 개발하는 척만 하는 거지, 진짜 파는 건 클릭수잖아.)
인스타그램이나 우버, 유튜브, 그 외 각종 첨단 플랫폼 회사들의 리더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다. 그의 책이 나오고 나서, Washington Monthly라는 한 매체의 3월 기사의 제목은..
A Tech Billionaire Attacks His Own Kind
(테크기업 억만장자가 동족을 공격하다)였다.
자, 그래서 그는 무엇을 주장하는 것일까? 기술 기업이 어떤 '야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는 실리콘밸리라는 유래없는 성공이 히피들의 차고에서 시작된 게 아니라, 냉전 시기 국가안보와 과학기술 연구의 결합에서 태어났음을 강조한다. 초기 실리콘밸리의 기업들 중 '페어차일드 카메라 앤 인스트루먼트'와 같이 현대 반도체 산업의 시조가 된 기업은 1950년대 CIA와 군산복합체를 위해 정찰위성용 고급 영상 장비를 납품하면서 첨단 반도체 기술의 필요성을 절감했다고 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트랜지스터 개발팀을 영입, 이 과정에서 실리콘 기반 트랜지스터의 양산화 기술을 개발, 진공관을 대체하며 현대 반도체 산업의 토대가 되는.. 이런 놀라운 전설의 시작이 실리콘밸리의 원래 모습이라는 것.
즉, 실리콘밸리의 진짜 ‘DNA’는 민간의 순수한 창업 신화가 아니라, 국가 프로젝트와 전략 기술의 공동 창출 역사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기술이 '난 정치는 잘 몰라'라는 태도를 버리고 적극적으로 미국이라는 국가 프로젝트에 함께 해야 하며, 국가적 문화와 가치, 궁극적으로 공동체의 정체성과 목표를 다시 확립해야 한다고 말한다. (어째 느낌이 싸하다..) 그 자신도 억만장자지만 기술기업으로 부를 이룬 창업자들이 세속적인 부 말고는 아무 관심도 없는 것을 맹렬하게 비판하면서, '무엇을 반대하고 용납할 수 없는지는 분명히 알았지만 무엇을 지향하는지는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팔란티어의 주요 고객이 CIA나 미 국방부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리고 2001년 9.11 테러 이후 몇 년간 미국 국방과 정보기관을 지원하는 활동을 시작하면서 설립된 기업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가 말하는 '기술공화국'이 조금 논란의 여지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트럼프 행정부와 적극적으로 협력, 반이민자 정책에서도 계약을 수행한다. 2017년 이후 팔란티어는 이민세관단속국(ICE)과 계약을 맺어 추방·단속을 지원하는 기술을 제공하기도 했는데,
핵심적인 것은 팔란티어가 ICE에 제공한 Palantir Gotham(배트맨의 그 고담시티 맞다..).
본래 정보기관, 군, 수사기관이 복잡한 데이터를 통합·시각화·추적하기 위해 개발한 분석 툴프로그램인데, 이것을 전장에 작용하면 적의 정보와 전쟁의 시나리오를 통합하는 것이 가능해지고, 범죄에 적용하면 잠재적 범죄자의 식별이나 작은 정보로부터 범죄가능성을 추적하는 등의 유용성을 제공한다고 한다.
운전면허 기록, 출입국 기록, 전화 기록, 신용카드 결제 내역, 위치 정보, 교통 단속 기록, CCTV·감시 카메라 정보, 소셜미디어 활동 및 관계망등을 망라하고 이를 통해 특정 범죄 용의자의 “사회적 지도(social graph)”가 즉시 시각화된다고 하니 이 시스템을 불법체류자에 적용했을 때.. 트럼프의 반(反) 이민 정책과 맞물려 논란의 중심에 선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이러니까 미국 내에서 진보진영으로 불리는 쪽에서는 팔란티어와 ICE의 협력 계약을 “공포 정치와 감시 국가의 결합”이라고 강하게 비판한다. 2019년 하원 청문회에서 미국 ICE 국장에게 팔란티어 기술 사용에 대해 직접 질문하며 “민간 기업이 추방 작전에 개입하는 건 민주적 통제를 벗어난 위험한 일”이라고 지적.
그러나 누가 뭐라 하든 갈 길을 가는 알렉스 카프는.. 사실 이렇게 '넌 극우!'라고 비판하기는 불가능한 사람이다. 그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학파로 유명한 괴테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이곳은 소위 '비판이론'으로 유명한 그리고 1960년대 '신좌파'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곳이다. 아도르노, 하버마스,. 자세히는 몰라도 이름은 들어본 그 철학자들의 후배인 셈이다.
“I grew up reading critical theory. Technology without responsibility is dangerous. Power without accountability leads to the kind of state my parents fled from.”
“나는 비판이론을 읽으며 자랐다. 책임 없는 기술은 위험하다. 민주적 통제 없는 권력은 전체주의로 향한다.”
라고 말하는데. 흠... 결국 '책임 없는 기술'을 무엇으로 보느냐의 관점이 거의 180도 달라진다. 알렉스 카프는 지금의 빅테크들이 소비중심으로만 흐르고 중요한 일을 해결하지 못하는 것, 더 나아가 국가라는 프로젝트와 상관없는 듯한 집단(실리콘밸리 그 자체)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 점, 그래서 국가안보와 상관없이 러시아든 중국이든 사업파트너로만 본다는 것을 '책임 없는 기술'로 보고 있는 것 같다. 반대로 팔란티어가 AI와 빅데이터를 방산, 범죄, 이민자 통제 등에 활용하는 것을 비판하는 쪽에서는 인권 침해의 요소가 있고 국가권력에 윤리적 고려 없이 활용되는 것을 '책임 없는 기술'로 볼 것이다.
알렉스 카프는 심지어 여러 인터뷰에서 자신을 “유럽식 사회주의자”라고 밝히며 실리콘밸리의 자본주의를 비판해 왔다.
“I’m a socialist — a European-style socialist. I believe in strong welfare, health care, and limiting inequality. What I don’t believe is that we should abandon our nation’s security.”
(나는 유럽스타일의 사회주의자다. 강력한 복지와 건강보험구조, 그리고 불평등을 억제하는 것을 추구한다. 내가 믿지 않는 것은 우리가 국가안보를 내버려야 한다는 주장뿐)
여러모로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분명한 것은 그는 억만장자들이 진보 리버럴 성향의 PC주의로 무장하는 것에 진저리를 친다는 것이다.
“The people in Silicon Valley are so politically correct they can’t deal with reality. They think that talking about a problem is solving it. It’s not.”
(실리콘밸리의 사람들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할 만큼 정치적 올바름에 갇혀 있다. 문제를 이야기하는 게 해결이라고 착각한다.)
구글의 프레이즈 'Don't be Evil'에 대해서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한두 달 전에 다큐멘터리 지원사업을 준비하면서, AI의 활용에 대한 사회적 이슈에 대해 리서치해볼 기회가 있었다. 그때 관심 있게 본 소재가 프로젝트 메이븐(Project Maven)이었다.
미 국방부에서 드론 타격 시 목표물을 탐지하는 등 머신러닝으로 전투 지역 데이터를 분석해 표적을 포착하거나 전술을 제안하는 군용 AI 프로젝트다.
드론 영상에 AI를 적용해 적군과 민간인을 구분하고 목표 식별을 자동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이 프로젝트의 민간 기술 파트너는 원래 구글이었는데, 2018년 한 기자가 이 프로젝트에 구글이 기술 파트너라는 것을 폭로한다. 원문기사는 다음과 같다.
https://gizmodo.com/google-is-helping-the-pentagon-build-ai-for-drones-1823464533
특종을 보도한 기자 Kate Conger는 2018년 3월 6일 Gizmodo 단독 보도를 통해 구글이 미 국방부의 Project Maven에 인공지능 영상 인식 기술을 제공하고 있음을 공개했다. 이 계약은 이전까지 대외비였으며, 구글 내부에서도 소수만이 인지하고 있던 사안이었다.
이 보도 직후 수천 명의 구글 직원들이 내부 서한에 서명하며 프로젝트 참여 철회 요구 운동을 벌이게 된다.
내부 커뮤니케이션 채널에서 논쟁이 급속히 확산됐다. 드론 감시 영상을 AI로 분류·표식 하는 도구에 구글 기술이 쓰인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군사용 전용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중심 쟁점이 됐다.
사내에서는 며칠 새 공개서한 초안이 돌기 시작했고 (방송사 파업 때 비밀리에 대자보 준비하던 기억이 난다..) 수천 명이 서명한 형태로 경영진에게 전달됐다.
이 서한은 “Google should not be in the business of war”라는 문구를 사용하며 메이븐 철회와 향후 군사용 무기 개발 참여 금지를 요구했다. 서명 규모는 보도에 따라 3천 명대에서 4천 명 안팎으로 집계됐다.
일부 직원들의 업무 거부 의사 표시와 팀 단위의 강경한 문제 제기, 경영진과의 질의가 이어졌고 이것이 압박 수단으로 작용했다. 5월 중순까지 최소 “약 12명”이 윤리적 이유로 퇴사를 선택했고, 메이븐 관련 업무를 거부한 직원 사례도 보도됐다.
결국 구글은 메이븐 계약을 “만료 후 갱신하지 않겠다”라고 내부에 통보한다.
이후 무기 개발에 쓰이는 AI와 국제 규범을 위반할 소지가 있는 감시 기술 등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AI 원칙’을 공개했다. 다만 국방 분야 전반과의 협업을 전면 중단한다는 뜻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이 프로젝트 메이븐 사태는 기술 기업 내부에서 윤리 문제를 두고 조직적 집단행동이 일어난 대표적 사례로 기록되었다.
구글 직원들이 자신의 신념을 지킨 용기는 이 판단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노조나 집단행동이 들어갈 틈이 없어 보이는 기술 기업에서도 의사결정 과정에 일반 직원들이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런데 프로젝트 메이븐에서 구글이 빠진 자리는 바로..
2019년부터 Maven의 핵심 민간 파트너로 팔란티어가 영상 및 데이터 분석 플랫폼을 국방부에 제공하면서 운용 주력 업체가 된다. 특히 팔란티어의 소프트웨어 Palantir Gotham(고담프로젝트)이 Maven 프로그램과 결합돼 실전에서 활용되기 시작했다.
2024년의 기사를 보면 결국 이 '프로젝트 메이븐 사태'이후 팔란티어가 급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
한 보고서에 따르면, 팔란티어는 미 국방부의 '메이븐(Maven)' 스마트 시스템 계약 한도를 7억 9500만 달러(약 1조 700억 원)에서 13억 달러(약 1조 7000억 원)로 올렸다고 한다.
구글의 능력이 좋긴 좋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미 국방부의 1순위 파트너였으며, 직원들이 '우리의 기술이 전쟁에 활용되어선 안된다'며 용기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어쨌든 경영진은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다만 순다 피차이는 이 결정을 어떻게 보고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구글 본래의 정신을 지켰다는 이미지를 전 세계에 보여주긴 했으나, 거대한 시장을 잃었다. 팔란티어는 어쩌면 특정 영역에서는 구글의 경쟁자가 되었다.
더 큰 관점에서 보면, 기술 발전이 겪는 필연적인 과정을 미국에서 보여준 것이다. 오히려 한국에서는 이런 일들에 대해서 너무 관심이 없지 않았나, 2018년에 과연 누가 이런 사건을 해석할 만한 인사이트를 가졌나 싶기도 하다. 번갈아 정권이 바뀌는 일에만 몰두해서 어쩌면 한국에서는 기술 발전이 주도하는 어떤 큰 흐름을 해석할 만한 저널리스트가 잘 나오지 않는 것 같다.
어쨌든 이 일에 대해 알렉스 카프는 내심 감사해야 할 것 같은데.. 책에는 이 중요한 프로젝트 메이븐 사태에 대해 실리콘밸리의 젊은 기술자들에 대한 그의 생각이 나와 있다.
1년 전인 2018년 4월, 구글 직원들이 시위를 벌인 끝에 회사는 미국 국방부와 맺은 프로젝트 메이븐 계약을 갱신하지 않기로 했다. 프로젝트 메이븐은 특수부대의 작전 기획과 수행을 돕기 위해 위성 등 정찰 영상을 분석하는 데 쓰이는 핵심 시스템이었다. 순다 피차이 CEO에게 보낸 3,000명이 넘는 직원이 서명한 공개서한에서 “미군이 수행하는 감시 활동과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작업을 도우려고 이런 기술을 개발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당시 구글은 “비공격적인 목적을 위한 것”을 회사가 수행한다며 프로젝트 참여를 방어하려 했다.
우리는 젊은 엔지니어들이 디지털 무기 시스템을 만드는 일을 얼마나 꺼리는지 직접 보아왔다. 이들 중 일부는 지금 자신들이 누리는 사회 질서와 안전하고 안락한 삶을 미국이라는 프로젝트가 정의로워 따라오는 당연한 결과로 본다. 국가와 이익을 지키기 위한 치밀하고 집단적인 노력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이런 안전과 편안함이 싸워서 쟁취한 게 아니라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당연한 기본 조건처럼 여긴다. 이런 엔지니어들은 이념적이든 경제적이든 대가 따위는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 듯 보인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알렉스 카프의 '팔란티어 테크놀로지' 창업자와 회사 모두에 흥미를 느꼈다.
알렉스 카프는 보통 '빅테크' 하면 생각날 실리콘밸리의 엘리트들, 그리고 그 테크놀로지 회사들이
실제로는 그냥 도파민을 자극하고 시간을 때우는 서비스를 자극할 뿐이라고
더 중요한 일에 자신들의 능력을 활용하지 않고 그저 마케팅 수준의 회사들을 세웠다고 가차 없이 혹평한다.
또 이 회사들이 주로 가지고 있는 진보적 가치의 느낌 - 예를 들어 구글이 'Dont be Evil'이라고 했던
수준의 PC주의 등에 대해서도 가차 없다.
뭔가 통쾌하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해 보이는 인물.
기술의 발전을 가지고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한다면, 필연적으로 '국가와 결합'될 수밖에 없는데
현재의 기술 기업들은 이 운명을 거부하고 좀 더 무의미한 일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가에 개입하는 기술기업이란 건 결국 국방과 같은 폭력에 관계될 수밖에 없는데, 이에 대해서도
알렉스 카프는 차라리 정확하게 윤리적인 입장을 갖고 - 그러니까 미국이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고 압도적인 군사력을 가지고 이권을 챙기고 때로는 평화를 유지하는 역할을 한 것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총괄 지휘자인 오펜하이머의 사례를 인용하기도 한다.
이렇게만 보면 전체주의에 물든 사람인가 싶다가도, 그는 또 "자본주의의 무분별한 수용으로 발생한 막대한 불평등에 가장 회의적인 사람들이 국가와 문화 개념 옹호를 꺼리기 때문에 공백이 생긴다. 그렇게 발생한 공백을 시장이 채워가고 있다는 걸 그 사람들이 깨닫지 못한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불평등에 회의적인, 불평등이 극복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 전통적인 좌파진영에서 국가라는 개념을 전체주의로만 놓고 '국가라는 프로젝트'를 거부했기 때문에 어디로 갈지 방향을 잃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백은 그저 도파민을 충족시키는 시장이 채워가고, 가벼운 PC주의나 스포츠나, 이런 것들이 채워간다는 것이다.
자, 한 번으로는 알쏭달쏭한 책이다. 그렇다고 엄청나게 정교한 철학자의 사상 같지도 않다. 그러나 분명히 지난 10년간 불평등이 크게 악화되었고, 정치적 양극화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심화되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 역시 서로 정확하게 듣고 싶은 말만 들려주는 채널을 듣는다. 또, 그렇지 않은 콘텐츠는 흥하기가 어렵다. 뭔가를 파고들어가는 정교한 저널리스트보다는, 근엄한 얼굴로 자기 진영이 들을 레토릭을 내려주는 사람이 더 환호받는 게 현실이다.
또,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구호로도 투쟁으로도 정치로도 작동하지 않는다. 보수 정권에서도, 진보 정권에서도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삶은 나빠질 뿐이라는 허무함이 몰려온다. 몇몇 빌런들을 비웃을 수도 있고 그들을 감옥에 보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과연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 나도 고민하던 차였기 때문에 일단은 열린 마음으로 읽었다.
무엇보다도 '불평등'을 직시하지 않은 채 벌이는 PC주의적인 논쟁들보다는 낫지 않을까. 어차피 기술공화국이라는 형태의 체제는 언젠가는 올 수밖에 없다. 2030년이나 2040년의 세계는 어떨까. 그 때 각 나라에서 어떤 인공지능을 활용한 체제를 가지고 경쟁할까. 또, 그 때 부동산이나 청년취업같은 문제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여전히 과거의 문제를 가지고 서로 논쟁하고 있을까.
어딘가 위태롭다. 이대로 과연 괜찮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놀라울 정도로 아는 사람이 없다. 물어볼 사람도 없다. 롤모델이 될만한 삶도, 그 어떤 사상가도 없이 그저 복층 한강뷰를 얻은 창업자들을 존경하는 세대들은 계속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이 시점에서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수상한 CEO'이자 철학박사 알렉스 카프의 주장은, 마치 위험한 테러리스트와 같이 들리기도 하고, 신선하고 진정성 있는 똑똑한 정치인의 일기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다만 팔란티어가 결국 전쟁으로만 지속가능하다면 그가 말하는 '좀 더 공동체에 도움이 되는, 위대한 일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허무한 레토릭이 될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소설가 미셸 우엘벡이 자꾸 생각났는데..
<소립자>, <투쟁 영역의 확장> 등을 쓴 프랑스의 대표적인 소설가다.
그도 서구 사회가 개인의 자유와 쾌락을 최우선 가치로 두는 자유주의를 발전시켜 온 결과 인간이 극단적으로 고립되고 외로워졌다는 세계관을 드러낸다. 소설에서 종종 '방종했던 히피 세대'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그 공백을 채워준 할머니 같은 스토리가 나온다.
그는 서구 사회를 뒤바꾼 1968년 5월 혁명(일명 ‘68혁명’) 세대를 매우 비판적이고 냉소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이 세대를 “해방을 외쳤지만 실은 자기 욕망의 해방만을 추구한 세대”, “자유의 이름으로 공동체를 파괴한 세대”로 묘사한다.
즉 '자유'가 가족을 해체하고, 전통적인 관계들을 해체하고, 모든 것을 해체한 결과 소속감도 의미도 없는 세계에 쓸려다니는 젊음만 남은 듯한 씁쓸한 이야기들을 쓰는데.. 약간 일베 느낌이나 조커 느낌이 나서 일반적으로 소설가들이 가진 멘탈과 너무 달라서 신기했던 기억이 있다.
알렉스 카프 역시 그런 느낌의 기업가 겸 철학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마나 억만장자라는 점은 변하지 않고 뭐 인생을 알고 저러나 싶기도 하지만,
일단은 자기 생각을 드러내는 사람들은 돈만 벌고 은밀하게 숨어 사는 부자들보다는 낫다는 생각도 든다.
적어도 이렇게 선언은 한다.
그러니 조금 더 읽어보는 걸로...
좋은 삶을 이루는 것은 무엇인가,
사회가 함께 추구해야 할 공동의 과업은 무엇인가,
공유된 국가 정체성이 무엇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가와 같은
중요하지만 복잡한 질문들은
이미 구시대의 유물쯤으로 여겨져 한쪽으로 밀려났다.
우리는 더 잘할 수 있다. 아니 더 잘해야만 한다.
(무엇을?)
알렉스 카프, <기술공화국> 서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