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이란 어떤 사람과 관계가 끊어지거나 헤어지게 됨을 의미하거나, 어떤 것이 아주 없어지거나 사라짐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전적 의미에 추가해야 할 사항이 있다. ‘갑작스런’ 또는 ‘허망한’이라는 수식어이다. 단지 관계가 끊어지거나 헤어지는 일, 또는 사라져 없어진다는 것에 ‘갑작스런’이라는 의미가 붙지 않는 것은 상실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상실’이라는 어휘를 더욱 ‘상실’스럽게 하는 조건이다.
나의 최초의 상실은 연이었다.
내게는 친구들처럼 문방구에서 파는 좋은 연이 있을 리 없었다. 할아버지는 직접 나무를 깎고 창호지를 발라 가오리연을 만들어주셨다. 바람이 부는 날이면 언덕에 올라 손이 꽁꽁 어는지도 모르고 연을 날렸다. 뜨지도 못하고 꼬라박기만 하던 연을 제법 갖고 놀 수 있게 되었을 때야 연싸움에 끼어들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만들어주신 가오리연을 이길 수 있는 문방구 연은 없었다. 나는 연싸움의 강자가 되었다. 그런 나의 연줄을 꺾은 연 역시 수제 연이었다.
모진 연줄이 끊기는 건 순간이었다. 그렇게 허망하게 나의 연이 하염없이 하늘로 올라갔다. 나는 몇 번을 자빠지면서도 죽어라고 연을 쫓아 달려갔다. 그렇게라도 해서 연을 붙잡을 수만 있다면, 이라고 생각했다. 텅 빈 얼레에 남은 연줄만 쥐고 엉엉 울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너무나 멀었다. 허탈함과 상실감을 이기지 못하고 몇날며칠을 앓아누웠어야 했다.
두 번째 상실은 새 운동화 한 짝이었고, 그 후로도 유독 나를 잘 따르던 강아지를 갑작스런 사고로 잃은 적이 있고, 균형감각에 이상이 있어 한쪽으로만 기울어져 잘 걷지 못하는 고양이를 할머니가 개장수에게 팔아버리면서 큰 상실감으로 울었던 적이 있었다.
그랬다. 무언가 허망하게 잃어버리거나 떠나보내고 나면 그래도 울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삶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조금씩 익어갔고, 너무 큰 상실은 때론 눈물조차 허락하지 않기도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2017)과 케네스 로너건 감독의 《맨체스터 바이 더 씨》(2017)가 바로 눈물조차 허락하지 않는 그런 크나큰 상실에 대한 이야기이다.
『바깥은 여름』에 수록된 7편의 단편 중 절반은 갑작스럽게 소중한 사람을 잃은 상황이 전개된다. 「입동」에서는 후진하던 어린이집 차에 아들을 잃고, 「노찬성과 에반」에서는 강아지를 사고로 잃으며,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에서는 타인을 구하려고 뛰어든 남편을 잃는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주인공 ‘리’의 형은 채 성인이 되지도 않은 조카를 남기고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지만 평소 심장질환이 있었고, 오래 살지 못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몇 번의 응급 상황으로 이별 연습이 있었기에 준비된 상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신의 실수로 불이 난 집에서 아이 셋을 상실했던, 돌이킬 수 없는 과오가 있다.
『바깥은 여름』과 《맨체스터 바이 더 씨》에서 느껴지듯 상실을 대면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지칠만큼 울고 또 울거나, 현실을 외면하거나, 상실을 부정하며 이겨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상실 자체가 없던 일로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상실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상실을 인정하는 것, 빈손, 빈자리를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상실이 상실인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책과 영화를 떠올리며 내가 상실한 것들에 대해, 상실해서 고통스러웠던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최근 큰 상실감에 빠져 있었다. 생각해보니 그만큼 얻은 것이 많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애초에 갖지 않았더라면 잃지 않는 법이다. 빈손, 빈자리를 고통으로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