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지 학회 - 귀족적 품위의 감금 생활
해마다 유월에서 구월까지 한 학회당 일주일간 지속되는 퐁티니스리지 학회가 떠오른다. 스리지라살이라는 곳은 얼마나 깡촌인지 차로 오 분 이상은 달려야 마을이 나오고 인가가 보일 정도다. 내비게이션 없이 지도를 보고 가면서 연신 차를 세우고 물어물어 갔다.
초대받은 쟁쟁한 연구자들이 제각기 뭔가를 발표했는데 아무 준비 없이 청강생으로 간 나만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되었다. 어쨌거나 내가 알고 있는 책의 저자들을 실물로 대하니까 기분이 묘했다. 저작은 커녕 논문 발표도 까마득한데… 물론 나 말고도 청강생은 더러 있었지만 그들은 네르발 전공자는 아니었다.
문화재 건물로 지정된 17세기 성 본채 건물 꼭대기에서 댕댕댕 울려 퍼지는 식사 종소리가 가장 반가웠다. 수도원처럼 흐름한 나무 식탁이 놓인 식당이지만 스리지 체류 기간만큼 풍성한 포도주와 사과주에다 신선한 음식과 후식까지 완벽한 서비스를 받아본 적이 여태 없다. 식사 때면 프랑스 여자와 결혼한 미국에서 온 교수와 어울려 노르망디 지방 특산 사과주인 시드르를 참 많이 마셨다. 특히 점심 식사가 끝나면 풍만한 가슴을 다 드러낸 노르망디 젊은 여인네들이 본채 앞뜰에 놓인 탁자까지 커피와 함께 후식 서비스를 해주었다. 휴식 시간에는 혼자 산책을 하거나 일본 학자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오전, 오후로 콘퍼런스가 열리고 저녁에는 특별한 프로그램이 없었다. 여기서도 하루는 학회가 쉰다. 이때 일본 학자 둘을 내 차에 태우고 그리 멀지 않은 몽생미셸을 다녀왔다.
내가 묵는 별채 주변 언덕배기에 큰 나무들이 모여 작은 숲을 이루고 그 바깥쪽 풀밭에서 소들이 밤낮없이 풀을 뜯고 있었다. 새벽에는 한두 차례 비가 내리고 팔월 말인데 지레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비탈진 정원을 거닐다가 동료의 전화를 통해 경제위기 소식을 듣자 여름 동안 쌓인 피로가 채 가시기도 전에 근심만 깊어졌다.
나는 늦게 등록하여 행랑채인 오랑주리 꼭대기 방을 배정받았다. 창문이 없고 천장에 유리창이 난 방으로 나무 마룻바닥이 심하게 삐걱대었다. 물론 화장실과 샤워실은 공용이었다. 스리지 숙소의 특징은 68 혁명 이후로 문 잠그는 빗장이 사라진 것! "금지한 것을 금지하라![1]" 학회장인 고풍스러운 서재와 행정 사무실을 연결하는 복도에 퐁티니스리지 학회를 거쳐간 저명한 인사들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사르트르, 토인비, 이오네스코, 바르트, 로브그리에, 투르니에… 20대 초반의 자신만만한 사르트르가 담배를 꼬나물고 찍은 단체 사진이 인상적이었다. 또 투르니에는 스리지의 큰 나무들에 일일이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하는데…
꼭 다시 한번 스리지에 가고 싶었지만 지금까지는 역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귀족적 품위가 뭔지 알아 보려면 스리지성을 학회장으로 제공한 이 집안을 치켜세우지 않을 수 없다. 그때는 창립자인 폴 데자르뎅(1910-1939년까지 부르고뉴의 퐁티니 수도원에서 열흘간 열림)의 손녀사위와 둘째 손녀딸이 함께 스리지 문화센터를 대표하였는데 지금도 그 양반들이 아직 건재한지 모르겠다[2]. 프랑스의 인문학적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한 사례가 바로 퐁티니스리지 학회이다.
서클 합숙 - 지옥 훈련의 감금 생활
무슨 영문인지 대학 일 학년을 마치는 겨울방학 때 참가했던 열흘간의 서클 합숙이 덩달아 떠오른다. 새마을 운동 때 슬레이트 기와로 지붕 개량한 시골집의 방 두 칸에서 합숙했다. 필요에 따라 미닫이 문을 떼내면 길쭉하니 큰 방이 되었다. 한편 벽 너머에 바로 연탄아궁이 부엌이 딸려 있었다. 화장실은 마당을 가로질러가서야 밭 언저리 모퉁이에 자리 잡았다. 수원의 문*이네 집. 들판에 외따로 떨어진 이 집은 마당을 벗어나면 밭이 죽 펼쳐지고 몇 발짝 떨어지지 않은 곳에 소나무 몇 그루가 지키는 산소들이 옹기종기 모인 동산이 있었다.
방학하면서 곧바로 우리의 합숙이 시작되었다. 우리의 합숙은 쉴 짬도 없이 진행되는 맹훈련이었다. 프로그램이 워낙 빡빡해서 딴청을 떨거나 개인적인 감상에 빠진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데카메론]의 인공낙원에서는 동반한 하인 일곱이 완벽한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우리의 합숙에서는 식사 준비나 설거지며 청소도 조를 짜서 우리들이 돌아가며 맡았다. 일어 강독에 이어 경제이론 공부 그리고 시각 교정을 위한 세미나... 분담 토의와 전체 모임이 파하면 밤늦게까지 개인적인 이야기도 나누었다. 불을 끄고 나서도 옆에 누운 상대와 소곤소곤 지쳐 빠져 잠들 때까지 속내 얘기도 나누었다. 자연 오전은 늦게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일어나 정신 차리고 아침 겸 점심을 먹으면 거의 다 가버렸다.
그때 같이 합숙했던 동료들이며 선배들, 이젠 이름이며 얼굴조차 가물가물해졌다. 어쩐지 나이브해 보인 심*, 고민에 찬 얼굴로 제법 논리 있게 발언한 득*, 어쩐지 "방방" 떠서 거부감이 느껴진 자*, 말발에서 남한테 밀리지 않으려 딱딱거리던 *선, 일어 강독 때 발군의 실력을 보여준 최*. 합숙을 분담하여 지도하던 2학년 선배 *이, *현, 만*, 문*… 중간에 합류한 영* 선배도 있었지. 일 학년인 우리한테는 하늘처럼 우러러 보이던 3학년 선배들 중 *선 누나를 빼면 현*, 진*, 하* 형은 처음과 막판에 고문으로 짧게 얼굴을 내비쳤다. 합숙 도중 짐 싸들고 진주로 내려가버린 통에 존재감이 별로 없던 정*. 그리고 누군가 더 있었는데 이름이 쉬 떠오르지 않는다. 참 같은 과 친구 조용한 *경이도 있었지. 연속 두 번 학사경고 받고 딴 학교로 간 친구도 있었고, 누군가도 그렇게 잘렸는데 이듬해 같은 과로 재입학했다.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평점 1,62이라는 우수한 성적(시험거부의 결과이지 공부를 게을리한 탓이 아님)으로 학사 경고가 나오는 줄도 모르고 장학금 신청을 했다.
합숙 기간 내내 매섭게 추웠다. 아무 일 없이 마음만 들뜨는 크리스마스도 지나갔고 합숙 중간쯤에 함박눈이 내렸다. 세미나를 내팽개치고 다 함께 벌판으로 나가 한바탕 눈싸움을 벌였다. 우리의 합숙훈련을 위문하러 들른 최고참 선배가 세* 형이 풀려나 합숙소에 올 수도 있다고 해서 기대에 부풀었지만 소문으로 끝나고 합숙도 막을 내렸다. 스미쓰, 리카르도, 마르크스 경제학 용어들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지대, 이윤, 자본, 소외, 잉여 생산, 계급투쟁... 서로 주소를 교환하고 뿔뿔이 헤어졌다. 전화는 가족 공용에다 부재중이면 별 소용이 없는지라 그때만 해도 편지가 주된 연락 수단이었다. 새 학기에 다시 보자며 잘 지내라는 인사를 서로 나누고 열흘 동안 단 한 번도 울타리를 벗어난 적이 없는 정든 합숙소를 떠났다. 우리 합숙소였던 장소는 이미 오래전에 택지 개발되어 아파트 숲으로 뒤덮였으리라.
[1] 68세대들이 주장한 것 가운데 하나가 프리섹스인데 30여 년 전 일어난 일탈적인 성생활로 2020년과 2021년 연초에 연달아 프랑스 사회의 여론이 들끓고 있다. 두 경우 다 적어도 2년 동안 지속되었고 피해자의 나이는 14세 무렵이었다. 지난해 밝혀진 사례는 당시 프랑스 문단에서 영향력 있던 중년의 작가(Gabriel Matzneff: 1936-)가 여중생과 가진 성관계였다. 올해 폭로된 사건은 책 출판 며칠 전까지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고위층 인사(Olivier Duhamel: 1950-)가 의붓아들한테 가한 근친상간이다.
[2] 형부 자크 페루(Jacques Peyrou)는 2015년에 돌아갔고, 처제 에디트 외르공(Edith Heurgon)은 아직도 활동 중이다. 바로 에디트 외르공이 도착하던 날 스리지의 역사며 건물 소개를 해주었다. 마지막으로 꼭대기 방에서 참석자 전원한테 노르망디 지방의 특산주인 칼바도스를 한 순배 돌리면서 자기소개하는 행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