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 돈이란
엄마가 아슬아슬하게 내 신경을 건드리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엄마 상태가 거의 회복했다는 뜻이다. 분명 좋은 일임에도 씁쓸함이 올라왔다. 큰 고비를 넘기고 나니, 다시 드러나는 습성(習性)을 어찌 막겠는가.
그리고 엄마가 나아진 만큼 나는 소진되었다. 혼자만의 시간이 꼭 필요했던 나는, 엄마 앞에서 최대한 말을 아꼈다. 휴대폰을 잘 안 보는 편이지만, 엄마랑 있는 동안은 휴대폰도 자주 보았다. 책이 잘 읽히지 않았으므로. 사유가 자주 멈췄다. 글 쓰는 데 몰입하는 시간이 확보되지 않으니 갑갑해서 짜증이 올라오려 했다.
짜증내기에는 아까운 시간들이다. 있는 재료로 할 수 있는 요리 레시피를 자꾸 떠올렸다. 늘 움직이고는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아슬아슬했다. 엄마와 싸워 본 경험치가 있기 때문이다. 예상치 못한 엄마의 삼시 세끼를 차리고, 매일 산책을 시키며, 반신욕 혹은 대화를 주고받는 일이 '새로운 루틴'으로 자리 잡자 내 습성도 불편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려는 것 같았다. '맞춤형'간병은 명백한 노동이었다. 비록 엄마라 할지라도.
힘에 부치는 체력이 원망스러워질 무렵이었다. 탄력 있던 내 마음 근육도 여기까진가 했다.
'더 이상 예전처럼 무너질 순 없어.'
몇십 년 동안 봐 온 엄마이기에, 이 구조에서 밀리지 않는 방법을 알고 있다. 이제 벗어날 때다.
엄마에게 오늘은 산책을 잠시 미루자 하고, 3시간 내내 책을 읽었다. 살 것 같았다. 산책할 때는 기를 쓰고 내 팔짱을 끼고 다니려는 엄마와 떨어져 혼자 걸어 보았다. '내 모든 일상에 밀착하여 내 영혼의 색깔이 투명해질 때까지, 그 색깔을 자신의 보호색으로 흡착하려는 엄마'라는 삿된 생각을 떨치기 위해서였다.
즐겨 듣던 오디오북을 켜고 소설 속 주인공들의 비극을 곱씹었다. 사각거리며 밟히는 겨울나뭇잎 소리가 개운했다. 그들보다 나은 거겠지. 역시 예정된 비극보다는 알 수 없는 희극을 품고 사는 게 나은 거였어. 작품 속 스토너와 이디스의 삶 곳곳에 지난날의 내가 있었다. 그러니 지금 엄마 일도 '내 삶의 전부'는 아닌 것이다. 어느덧 산책 중반. 홀로 서서 윤슬을 내려다보며 강바람을 맞았다. 따스했다. 갑자기 한파라며 어수선 떨던 아침 일기예보가 우습게 느껴졌다.
30분의 산책은 늘 마법처럼 완벽했다. 비타민 D탓일까. 산책 후 리셋된 나는 캠핑의자에 앉은 엄마를 향해 씩씩하게 웃을 수 있었다. 마음껏 블랙유머를 날릴 수 있었다. 오리, 왜가리, 비둘기, 까치새떼들에게 인간의 화법으로 말 걸며 내일을 기약하는 게 가능했다. 엄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날 여기 버려두고 혼자 지(자기) 갈 길 가다니.'
40년 넘게 봐 온 엄마 성격으로는 당시의 내 행동을 그렇게 회상하실 분이다.
'그러라지.'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일주일이 한 달이 되면 어떻게 될까. 내 행동에 설명은 필요 없어지리라. 스스로 의지박약인 자들은 힘겹게 구축한 루틴을 지키는 나 같은 사람을 그저 '애쓴다'라고 일축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감히 말한다. 바닥이라 할 만큼 힘들어본 자, 나를 구원해 준 것은 바로 나였으며 어떤 일이 있어도 무너지지 않는 루틴 덕이었음을 말이다. 그리고 그 루틴 속에 반드시 '나를 돌보는 시간'을 확보하지 않으면 인생이라는 길을 제대로 걸을 수 없다는 사실을, 엄마는 알까.
점심 먹을 때에도, 저녁 먹을 때에도 엄마는 자꾸 돈 이야기를 꺼냈다. 내 재정상황을 파악하고 이리저리 생각하며 상대 심리의 주도권을 쥐려는 신호다. 안도와 슬픔이 동시에 밀려들었지만,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엄마. 내가 얼마나 돈이 있는지는 말 못 해도, 얼마나 없는지는 말해줄 수 있어요. 말해 드려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엄마는 내가 '살 만한 자식'이라는 이미지를 쑤셔 넣는 중이리라. 확인에 확인을 거듭하고 싶은 마음이야 오죽하겠는가. 내가 어떻게 대답하든 엄마의 오차 범위 이내임이 틀림없다.
우린 또 한 번 어색한 식사를 했고,
나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엄마는 남은 돈을 어떻게 쓰고 싶은 걸까. 자신도 모르는 그 답을 눈치껏 가늠하느라 애쓰는 모습이 안쓰럽다.
뭔가 다 털어놓고 싶어도 말할 수 없고, 말해서도 안 되는 '엄마의 돈.'
비밀이 많다는 건, 믿을 만한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믿을 만한 사람이 없다는 건 정서적으로 고립되었다는 뜻이고, 고립되었다는 건 당연히 끝없는 외로움과 불안을 유발한다.
'엄마 스스로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