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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독립 Mar 21. 2022

A.R(After Resignation) 1년 -1

혼자, 둘이 사는 이야기 5

2021년 10월 1일. 나는 이 날을 A.R 1년, 나의 새로운 원년으로 정했다. 퇴사한 첫 날이었다.




쉬어 본 적도, 고민해 본 적도 없이 지내온 수 년을 뒤로 하고, 이제 새로운 삶을 살 것이라고 다짐했다. 퇴사 후기를 남긴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꿈이나 목표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우선은 쉬겠다."는 것 외에 아무런 계획이 없었지만 그 계획을 세우는 것부터가 내 삶의 리셋버튼이라고 생각했다. 병원 투어를 다니며 썩어빠진 몸뚱아리를 조금 구제하고, 바쁘다는 핑계로 의지 없이 미뤄 두었던 운동을 하고, 담배를 끊고, 술을 줄이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탐색하는 그 모든 활동이 나의 리셋 버튼이었다.


그러나 거창하게 이름붙인 A.R 1년 1월 1일은 반 년 가까이 지나는 동안 아무런 인상도 남기지 못 하고 기억에서 사라졌다. 새로운 마음가짐과 새로운 생활 방식이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저 한 달 동안 쓸 수 있는 근무시간을 다 써버리고 컴퓨터가 켜지지 않아 하릴없이 불안한 마음으로 집에 앉아 업무전화나 받던 월말 휴가와 다르지 않았다. '오늘까지는 그거 마무리해야 될 텐데 하고 있나?' 싶다가도 '아, 몰라, 알아서들 하겠지.' 하며 애써 눈돌리려 노력할 수 있다는 게 다르긴 했지만.




출근을 했다면 인상을 찌푸리며 침대에 앉아 멍을 때릴 시간에 잠이 깼다. 얇고 노란 꽃무늬 커튼을 거쳐 약간 바래진 햇빛이 쏟아졌다. 빌라 1층에 있는 서울우유에서 누군가 "흰 우유 10개, 커피우유 5개 주세요." 주문하는 목소리가 생생히 들려왔다. 아직 잠들어 있는 조슈아를 깨워 출근을 시키고 다시 침대에 누워 늘어지게 잠을 잤다. 눈도 뜨지 못 하고 겨우 세수를 하고 화장을 떡칠하던 날을 일부러 떠올리며 여유로운 오전을 만끽하고 싶었다. 다시 깨어나서는 멋진 카페에서 먹을 수 있는 브런치를 만들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아마 실패했던 것 같다.) 그리고는 아마 넷플릭스나 밀린 웹툰을 한참 쳐다봤겠지. 


마침 조슈아의 생일이었다. 산책 겸 모자를 쓰고 나가 슈퍼에서 미역을 사고, 옆에 있는 반찬 가게에서 잡채를, 또 그 옆 정육점에서는 국거리용 한우를 샀다. 백선생님의 두꺼운 집밥 레시피(신혼이라면 요리책 한 권쯤은 있어야지, 하며 샀고, 동거한 지 약 5개월이 지난 그 당시 이 책에는 라면 국물이 잔뜩 묻어 있었다.)를 꺼내 들고 미역국 요리법을 찾았다. 냉동실에서 얼마 전 엄마가 준 한우 떡갈비를 꺼내놓고 미역국을 끓였다. 하라는 대로 했는데 어느 순간 국물이 다 졸아들어 2인분의 결과물은 국대접 하나를 미처 다 채우지 못했다. 떡갈비를 에어프라이어에 돌렸는데 밑에 종이호일을 깔지 않아 받쳐 두었던 접시에 고기가 다 달라붙었다. 프라이팬에 잡채를 데울 때쯤 조슈아가 퇴근했고, 처음으로 직접 차려준 생일상에 조슈아는 기뻐하며 밥그릇을 비웠다. (반 그릇이 겨우 나온 미역국은 생일자에게 돌아갔다.)


이틀 뒤는 결혼식이었다. 모든 일에 그러하듯이 나의 결혼식 준비는 절대 만반이 아니었다. 혹시 몰라 입어 보았던 피로연용 정장 바지의 허리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어울리는 벨트가 없다는 것도 알아차리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내일 벨트를 사러 가야 한다고 얘기한 것이 내가 뿌듯해 할 만한 준비 중 하나였다. 당시 코로나로 인해 본식 입장 인원이 제한적이었는데, 그제서야 라이브방송을 하자는 결정을 내려 이틀 뒤에 촬영을 해 줄 수 있는 업체를 찾아 부랴부랴 예약했다. 영상으로 본식을 볼 수 있다는 안내문을 만들어 프린트하고, 예식장에 보낸 후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결혼서약서를 뽑아 함께 한 번 읽어보고, 본식 당일에 필요한 현금을 봉투에 넣어 챙겨두고 나니 새벽이었다. 당연하게도 운동은 하지 않았고, 맥주를 마시고 있었으며, 담배를 뻑뻑 피워댔다. 



잠자리에 누워 조슈아가 퇴사 첫 날은 어땠냐며 물었을 때에서야 '아, 맞다. 나 퇴사한 거지.' 라며 놀랐다. 물론 하루 종일 내가 퇴사한 사실을 모르는 회사 사람들이 업무차 연락을 하기도 했고, 그 때마다 나의 퇴사 사실을 전해 주긴 했다. 다만 마치 휴가 중에 업무 연락을 받은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아, 제가 휴가 중이어서요, 팀장님. 저희 팀 ***한테 말씀해 주시면 처리해 드릴거예요." 가 "아, 팀장님, 제가 어제 미처 인사를 못 드렸네요. 제가 퇴사해서요, 저희 팀 ***이 앞으로 그 업무 담당할거에요. 그 쪽으로 연락해 보시겠어요?" 로 한 문장 정도 추가되었을 뿐. 놀라거나 아쉬워하는 사람들과 인사하고 통화를 마친 후에는 앞으로 이 사람과 연락할 일이 없겠구나, 싶은 시원섭섭한 마음에 혼자 싱긋 웃기도 했지만 그것도 순간이었던 것이다. 나의 퇴사를 되새겨주는 조슈아의 말에 당황스러웠다.


'오늘부터 나 새로운 삶을 살기로 했었는데.'


조슈아는 내가 앞으로도 그 회사에 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고 큰 행사를 앞두고 있으니, 내 새로운 세상은 신혼여행 뒤로 미루고, 리셋 버튼도 그 때 누르자며 나를 안심시켰다.


물론 나의 새로운 삶이라는 기점은 신혼여행에서, 한 달만 더 쉬고, 두 달만 있다가, 로 늘어졌고 나의 불안이 시작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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