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둘이 사는 이야기 2
지난 주 금요일에는 늦잠을 잤다. 11시까지 운동을 가려면 10시 30분에는 집에서 나와야 하니, 8시에 일어나 여유롭게 아침도 먹고 책도 읽다가 바싹 마른 머리로 운동을 하겠다는 나의 계획을 무시하고 나의 손가락은 알람을 꺼버렸다. 눈을 뜨니 10시였고, 드라이기에는 손도 대지 못해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패딩 모자로 감싸고 서둘러 출발했다. 일찍 와서 웜업용 유산소를 하라고 하지 않았냐는 선생님의 잔소리로 시작된 운동은 평소보다 빡세다. 소리내서 웃기라도 하면 복근이 쑤셔오는 상태로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잠도 못 깬 채 다녀왔지만, 그래도 한 시간이라도 몸을 움직이고 오니 조금 활력이 생겨 점심으로는 파스타를 해 먹었다. 냉동실에 있던 새우를 찬물에 담가 녹이고 스파게티 면을 삶는 동안 마늘과 함께 굽는다. 간을 열심히 하기는 귀찮기 때문에 오늘도 조리대 위에 항상 올려놓는 허브솔트를 대충 뿌린다. 면이 다 익으면 올리브유 조금과 바질 페스토 한두 숟가락을 넊고 또 대충 섞는다. 혼자 먹는데 파스타를 섞은 볼 채로 퍼먹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조슈아에게 사진이라도 보내야겠다는 마음에 접시에 옮겨 담는다. 구워놓은 새우를 접시 가장자리에 눕혀놓으니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요리를 하는 것도 오래 걸리진 않았지만 먹는 시간은 더더욱 순식간이다. 평소 같으면 밥을 먹으며 틀어 놓은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한참 쳐다보다가 한두 시간 후에 화들짝 놀라겠지만 조금 더 서둘러 설거지를 해본다. 양치를 하고 옷을 다시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며칠 전 미처 해감이 다 되지 않은 조개를 먹다가 어금니로 모래를 씹었는데 그 후로 이가 자꾸 시린 것 같았다. 나아지겠지, 하며 반대쪽으로만 씹다보니 그 쪽 턱이 아파왔다. 며칠을 미루다가 결국 한 주의 마지막 날에 꾸역꾸역 치과 선생님 앞에서 입을 벌린다. 4천원이 넘는 진료비를 내고 들은 이야기는, 모래 때문에 어금니가 놀란 거니 한동안 반대쪽으로만 씹어라. 나의 귀차니즘이 내린 진단과 딱히 다를 바가 없다. 나온 김에 역류성 식도염 약을 받으러 내과에 갔다. 나의 식도염은 술과 담배와 매운 음식을 버리지 못하는 주인 때문에 나을 새가 없으므로 보통은 약국에서 적당히 타온 약으로 달래준다. 그래도 이렇게 한 번 진료비를 내고 처방받은 약은 확실한 차이가 있다.
뭐 별로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다시 집에 돌아오니 오후 4시가 넘었다. 늦잠으로 시작하긴 했지만, 그래도 일어나서 쉬지 않고 움직였다는 뿌듯함에 이제 좀 쉬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알찬 하루는 기분이 좋다.
토요일은 가사전문가의 하루를 살았다. 나를 아는 사람들이 믿지 못하거나, 믿어도 매우 신기해하는 부분이 있는데, 사실 나는 청소를 제외한 집안일을 좋아한다. 먹는 것을 좋아하는 만큼 요리하는 것도 좋아하고, 그 요리와 식사가 끝난 후에 설거지를 하며 부엌을 다시 원상태로 돌려놓는 것도 뿌듯하다. 며칠 동안 쌓인 빨래를 분류하고, 내가 좋아하는 향이 나는 세제를 넣어 세탁기와 건조기를 돌린 후에, 역시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듣거나 영상을 보면서 따뜻하고 포근한 빨래를 개키는 건 변태 같이 들릴 수도 있지만, 진정 행복한 일이다. 아, 물론 좋아하는 것과 잘 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에 가끔 조슈아가 나한테 안 들킬 것이라 생각하고 내가 한 일을 다시 해 놓는 경우도 있다.
어쨌든 토요일은 이렇게 내가 사랑하는 집안일로 가득 채운 하루였다. 조슈아가 해 준 아침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요즘 계속 바쁜 조슈아가 업무를 보는 동안 냉장고를 청소했다. 냉장고와 냉동실에 무엇이 들었는지, 상온 재료는 뭐가 있는지 적어놓은 메모지를 업데이트하고 차마 눈으로 볼 수 없는 냉장고 속 내용물들을 치워버렸다. 정리를 끝내고 잠깐 쉴까 싶어 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열어보니 벌써 점심을 먹을 시간이다. 날짜가 조금 지난, 뜯지도 않은 크림 파스타 소스가 있었기에 조슈아에게 냄새 검사를 받고 버섯과 베이컨을 넣어 슉슉 파스타를 해 먹는다.
몇 년 전 조슈아와 함께 롱패딩을 샀는데, 올해 조슈아의 롱패딩은 주머니에 구멍이 뚫리고 등뒤에는 어디에서 칼침을 맞은건지 일자 상처가 나 있었다. 한 스물두 번쯤 잔소리를 한 끝에 함께 새 패딩을 사러 나섰다. 각자의 패딩과 조슈아의 바지를 두 벌 사고, 지하 식품관에서 장을 보았다. 장보기 목록에 없는 재료를 10개 정도밖에 사지 않았다니, 역사적인 날이다. 집에 돌아와 저녁을 준비했다. 며칠 전 먹겠다고 냉장고에 내려놓고는 비늘 벗기기가 귀찮아 방치해두었던, 이제는 얼른 먹어치워야 하는 임연수를 굽고, 어묵을 볶는다. 나가기 전 불려놓은 건가지에 간장과 다진 마늘을 넣어 볶고, 매콤한 게 필요해 묵은지를 꺼내 매실청을 넣어 볶는다. 함께 끓인 북어국을 한 그릇 뜨고 냉동실에 있던 현미밥을 데워 조슈아와 먹는다.
조슈아에게는 또 2시간만 자고 일하러 나가고 싶은 게 아니면 얼른 지금 일하라고 다시 한 번 잔소리를 해놓고는 설거지를 한다. 사온 옷을 정리하고, 세일을 하기에 잔뜩 사온 양말도 하나하나 개켜놓는다. 그리고 얻어온 지 어언 2주째 손도 대지 않고 냉장고 채소칸에서 죽어가고 있는 냉이 한 봉지를 꺼내 다듬는다. 냉이는 처음 만져보는 거라 '이렇게 하는 게 맞는건가' 하면서 한참을 조물락거린다. 한 서른일곱 번째로 보는 것 같은 '해리포터와 불의 잔'에 한창 집중했는데 조슈아가 방에서 나와 '뭐 해? 안 자? 12시야.' 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왜 벌써 12시인가에 대해 깜짝 놀라면서 조슈아와 함께 고찰을 하다가 냉이를 끝내버리고 1시쯤 자리에 누웠다. 오늘도 쉬지 않고 빨빨거리고 움직였구나, 하며 알찬 시간에 대한 뿌듯함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려 한다.
순간, 영화 '리틀포레스트'에서 류준열이 김태리에게 하는 말이 귓구멍에 박힌다.
"그렇게 바쁘게 지낸다고 문제가 해결돼?"
가사노동을 전문으로 하시는 분들께는 죄송한 말이지만, 나에게 집안일이란 내가 해야 할 일을 모른 척 미루면서도 내가 뭔가 열심히 하고 있다는 기만적인 보람을 주는 힐링요소 중 하나이다. 오늘 꼭 빨래를 하지 않아도 폭신하게 마른 수건은 가득하며, 내일 신을 양말도 충분하지만, 논문을 읽지 않은 변명을 만들기 위해 빨래를 개킨다. 어제 저녁에 해 둔 반찬을 꺼내 밥을 먹으면 되지만, 조슈아가 오랜만에 집에서 저녁을 먹는다는 핑계로 특식을 준비하며 오늘 듣기로 한 강의를 내일로 미룬다.
보통 나의 알찬 하루는 지금 이 순간이나 오늘 저녁, 아니면 이번 주, 아무리 멀리 봐도 이번 달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행동들로 채워진다. 이는 아무런 생각 없이, 혹은 아주 일차원적인 생각만으로 해내고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는 행위들이다. 내가 가장 뿌듯해하는 집안일도 아주 간단하게만 생각하다보니 잘못된 빨래로 망가진 옷들이 수두룩하며 아무리 자주 점검해도 냉장고에는 썩은 음식이 그득하다. 반대로 '나 오늘 왜 이렇게 쓰레기 같이 살았지...' 라며 후회하고 반성하는 날은 조금 더 먼 미래를 위해 해야 할 일 한두 가지를 겨우 해낸 날이며 (가끔은 그마저도 없다.), 이는 머리를 자꾸 써야 하는데 웬만하면 재미도 없고, 내가 즐거워 하는 무언가와 동시에 할 수도 없는, 그래서 더더욱 미루게 되는 목록이다.
이렇게 나의 알찬 하루들의 기만과 모순을 문득문득 깨달으면서도, 오늘도 다시 한 번 깨달았으면서도, '음... 가스레인지가 더러운 것 같은데... 한 번 닦을까...' 싶은, 나른한 월요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