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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독립 Feb 23. 2022

돌고 돌아 인과

기사단장 죽이기 (무라카미 하루키)

◆ 줄거리

갑작스러운 아내의 이혼통보를 기점으로 주인공은 한동안 목적지 없는 여행을 지속하다가, 절친한 친구의 아버지이지 유명 일본화가의 산골짜기 집에서 지내게 된다. 생계를 위해 초상화를 그리던 화가로서, 주인공은 본인의 새로운 작품세계를 구축하고자 하지만 선뜻 시작하지 못한다. 하루 종일 집의 본 주인인 아마다 도모히코가 그려서 숨겨 둔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걸작을 쳐다보기만 하는 날도 있다. 그러던 중, 거금의 보수를 제안한 이웃 멘시키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며 주인공은 여러 가지 사건에 휘말리고 성장하게 된다.

주인공은 집 근처 사당 쪽에서 들리는 방울 소리로 인해 며칠간 불안에 떨고, 멘시키의 도움을 받아 커다란 구덩이와 그 안의 불구(佛具)로 보이는 오래된 방울을 찾는다. 그리고 곧 이 방울로 말미암아 도모히코의 그림에 나오는 “기사단장”의 모습을 취한 ‘이데아’가 나타나 주인공에게 이런저런 제안이나 충고를 하기도 한다. 주인공은 이데아와의 대화를 이어나가며 멘시키의 초상을 완성한다. 이 초상화는 그동안 주인공이 그려왔단 사실적인 초상화라기보다는, 대상의 내면을 드러내는 일종의 추상화의 형태를 띤다.

한편, 멘시키는 자신의 딸일 것으로 추정되는 아키가와 마리에라는 소녀의 초상화를 주인공에게 부탁한다. 주인공은 멘시키와 사적으로 엮이는 것에 부담을 느끼며 망설이지만 예술적 영감을 믿고 마리에를 그리게 된다. 주인공은 마리에 초상 작업 외에도, 본인이 여행을 하며 마주쳤던 “흰색 스바루 포레스터의 남자”의 초상과, “잡목림 속의 구덩이” 작업도 진행한다. 그림을 그리고 멘시키와 더 많은 교류를 하는 과정에서도 기사단장은 가끔 주인공에게 모습을 드러내며 조언을 한다.

그러던 중 마리에가 실종되고 주인공은 기사단장의 조언을 받아들여 친구의 아버지이자 본인이 살고 있는 집의 주인 아마다 도모히코의 병문안을 간다. 도모히코와의 대화 끝에 주인공은 기사단장을 죽이고 은유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주인공은 얼굴 없는 남자와 대면하고, 여동생과 돈나 안나의 목소리를 쫓아 동굴을 기어나가는 등의 모험을 거쳐 자신이 극복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들을 이겨낸다. 현실로 돌아온 주인공은 멘시키 저택에 숨어있던 마리에가 나타났음을 알게 되고, 전 부인과 재회한다.




◆ 책의 메시지 이해하기


문득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고 싶을 때가 있다. 차가운 듯 보이는 문장과, 비현실적일 정도로 쿨한 주인공들, 그리고 주인공 스스로도 “이건 말이 안 되는데...” 라면서도 착실히 단계를 밟아 나가는 판타지가 마음을 끌어당길 때가 있는 것이다. 『기사단장 죽이기』를 처음 손에 잡았을 때도 같은 마음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워낙 호흡이 길고 여러 가지 사건이 시공을 초월하며 동시에 진행되니 한 작품을 충분히 소화하기에는 나의 독서 집중력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하루키의 문장을 맛보는 만족감을 목적으로 한 독서였다. 그리고 역시나 “뭔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재미있었다!”며 마지막 장을 넘겼다.


그러다가 어쩌면 처음으로 하루키 소설을 완독한 후에 독서록을 써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마음에 들었던 구절을 옮겨 적다 보니 『기사단장 죽이기』의 전체적인 메시지가 보이는 것이 아닌가! 수많은 사람들이 “기록을 남기라”고 주구장창 이야기하는 까닭을 새삼 실감한 순간이었다. 설사 내가 느낀 메시지가 하루키가 의도한 바와는 다른 방향일지라도, 내가 느낀 점이 있다면 그걸로 충분할 것이다. 독서의 즐거움을 한 차례 더 느낀 날이었다.


『책이라는 선물』을 시작한 편집자는 직선적으로 책을 읽는 어른에게 독서란 마라톤과 같다고 비유했다. 책을 다 읽어갈 때쯤 남은 장수를 세어가며 결국 다 읽었을 때에는 책의 메시지보다는 “와, 끝났다!”라는 성취감과 뿌듯함만 느낄 때가 있다고. 마침 『기사단장 죽이기』를 끝내고 뿌듯해하자마자 시작한 책의 첫 마디가 책의 전체적인 이야기를 씹어먹으라는 것이라니. 왠지 민망한 기분이 들어 줄거리만 적당히 써두었던 독서록 파일을 다시 열었다.




◆ 시작을 알 수 없는 원인과 결과


주인공은 평화롭지만은 않은 일상 속에서 갑작스럽게 은유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 자신의 약점을 극복한 것처럼 그려졌다. 하지만 그가 은유의 세계 속에서 온갖 시련을 이겨 내고 전 부인과 재회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부인과 헤어지고 오랜 여행을 했던 덕분이고, 산 속 외딴 집에서 멘시키와 만나고 그의 초상을 그리며 본인의 작품 세계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기 때문이며, 또 마리에라는 소녀와의 정서적인 교류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주인공이 그림을 시작했다거나, 그래서 지금까지 끈끈한 관계가 유지되는 친구를 사귀었다거나, 또 그래서 부인이 이혼을 언급하기 전에 부인의 외도를 알아차리지 못했다거나, 그런 앞선 일들까지 생각한다면 어느 것에도 “사소하다”는 형용사를 붙일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다. 그리고 그 원인들은 한 때의 에피소드나 자연스럽고 사소한 일상으로 여겨질 수도 있으며, 가끔은 “왜 이렇게까지 할까?”라는 의문을 자아내면서도 모른 척 넘어갈 수도 있는 또 다른 사건일 것이다. 되돌아보면 모든 일들이 “이렇게 되려고 이런 일들이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한편, 되돌아보는 그 순간에는 모든 것이 정해진 것 같다는 두려울 정도로 운명론적인 감상이 스치기도 한다.


더 이상 회사의 사람과 일을 견뎌낼 수 없고, 이러다가는 날 망가뜨리게 될 것 같다는 공포에 휩싸여 도망치듯 퇴사를 선택한 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무슨 생각으로 회사를 그만 둔 거지, 앞으로 난 어떻게 하지, 이렇게 빈둥대다가 일생을 보내는 것이 아닐까.”라는 불안감이 또 스멀스멀 올라오는 때였다. 하지만 어쩌면 나는 퇴사 직전의 순간으로부터 도망친 것이 아니며, 내가 “그 때는 좋았지.”라며 추억하는 그 훨씬 전의 시간들로부터 퇴사라는 결과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또 지금의 불안은 훗날 내가 새로운 모습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는 원인일 수도 있는 것이다. 운명론적인 관점에서 나의 운명이 밝고 희망차길, 그래서 나의 힘겨웠던 순간들이 또 다른 원인이 될 수 있길 바라본다.


역시 같은 관점에서 열심히 닦는다고 닦은 가스레인지가 아직도 끈적끈적한 것은 나의 살림 솜씨만이 원인이 아니길 바라며 가스레인지 청소는 주말로 다시 미뤄본다.




▷ 선생님은 무언가를 납득하는 데 보통 사람보다 좀더 시간이 걸리는 유형 같아요. 하지만 길게 보면 시간은 선생님 편이 돼줄 겁니다.

▷ 변명은 아니지만, 그때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올바른지 판단할 여유가 없었다. 그때 나는 나무토막을 붙들고 물이 흐르는 대로 떠내려갈 뿐이었다. 주위는 칠흑같이 어둡고 하늘에는 별도 달도 없었다. 죽어라 나무토막을 붙들고 있는 한 익사는 면할 수 있지만, 내가 어디쯤 있고 어디를 향해 가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 멀리서는 대부분의 것들이 아름다워 보인다.

▷ 시간이 흐른 뒤 돌이켜보면 우리 인생은 참으로 불가사의하게 느껴진다. 믿을 수 없이 갑작스러운 우연과 예측불가능한 굴곡진 전개가 넘쳐난다. 하지만 그것들이 실제로 진행되는 동안에는 대부분 아무리 주의깊게 둘러보아도 불가해한 요소가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우리 눈에는 쉼없이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 지극히 당연하게 일어나는 것처럼 비치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치에 맞는지 아닌지는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비로소 드러난다.

그러나 이치에 맞건 아니건, 최종적으로 어떤 의미를 발휘하는 것은 대개 결과뿐일 것이다. 결과는 누가 봐도 명백하게 실재하며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그 결과를 가져온 원인을 가져온 원인을 가려내기란 쉽지 않다. 원인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이거야’하고 남에게 보여주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다. 물론 원인은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달걀을 깨뜨려야 오믈렛을 만들 수 있는 것처럼. 장기튀김처럼 하나의 장기짝(원인)이 먼저 옆에 있는 장기짝(원인)을 넘어뜨리고, 넘어진 장기짝(원인)이 다시 옆에 있는 장기짝(원인)을 넘어뜨린다. 그것이 연쇄적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사이 가장 먼저 일어난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는 대개 흐릿해져버리는 것이다. 혹은 아무래도 상관없어지거나. 혹은 딱히 아무도 알고 싶어하지 않거나. 그리하여 ‘어쨌든 많은 장기짝이 연달아 넘어졌답니다’라는 식으로 이야기가 끝난다.

▷ 타자와 대면하는 자신을 정의하는 일과도 통하는 데가 있을 것 같군요. 자명하되 그 자명성을 언어화하기는 어렵다. 말씀대로 ‘외압과 내압에 의해 결과적으로 생긴 접면’으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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