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내 심장을 뛰게 하는가?

by 드림포터

거울 앞에 선 낮선이 에게 언뜻 아버지의 모습이 비친다. 가까이 다가가 본다. 인상을 쓰지 않아도 이마에 주름이 잡힌다. 까맣게 염색한 머리를 밀고 나오는 하얀 머리는 일정한 라인을 형성하면서 이 순간에도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흐르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출근길 현관 앞에서 신발을 신으려다 잠시 고민을 한다. 뒷굽이 닳고 가죽이 바래져, 버리려고 한쪽 구석에 처박아 둔 낡은 신발이 자꾸 눈에 밟힌다. 새 구두를 사기 전 에는 일말의 애착도 없었는데, 막상 버리려고 하니 마음 한편 애잔한 마음이 일어 자꾸만 주저하게 된다. 결국 새 신발을 두고 낡은 신발을 신는다. 보기에는 좀 거슬려도 편안하기로는 이만한 게 없다.


회사 출근길에서 만나는 직장 동료들이 먼저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한다. 내가 먼저 머리 숙여 인사할 사람들은 손에 꼽을 만큼 많지 않다. 그렇게 많던 선배들은 알게 모르게 하나 둘 떠났다. 이제 그 자리를 푸릇푸릇한 젊은이 들로 채워지고 그리 머지않은 날 나의 빈자리 또한 그들로 채워질 것이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위로 갈수록 좁아지고 외로워지는 것을.


일어서서 허리를 굽혀본다. 손끝이 발목 근처에도 못 간다. 전신이 뻣뻣한 통나무를 닮아간다. 그래도 그건 괜찮다. 나이가 들어가는 자연스러운 현상 이려니 하고 스스로 위로를 한다. 그런데 두려운 것은 몸이 굳어가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굳어가는 것이다.

점점 감정이 메말라 웬만한 일에는 감동도 없고 놀라움도 즐거움도 없다. 눈물이 메마르니 감정도 마르고 표정도 굳어져 간다. 사소한 일에도 감정이 격해지고 고집은 세져 간다.


거무죽죽하고 윤기 없이 초췌한 모습. 거기다 까칠하고 심술궂은 표정.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상상했던 중년의 모습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이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중년을 넘어 노년을 향해 늙어 간다는 것을. 아무리 지랄 발광을 떨어도 시간을 붙잡아 둘 수 없다는 것을. 게다가 최악인 것은 어릴 적 그 많던 꿈들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 꿈들이 사라진 것일까? 꿈들이 사라져 버려 늙어 버린 것일까!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하드웨어는 빠르게 노화 되는데 소프트웨어는 노화 속도가 느리다. 마음은 육체의 노화를 따라가지 못한다. 마치 영화나 드라마처럼, 어느 날 갑자기 깨어나 보니 삼십 대 청년의 정신이 50대 몸속에 들어온 듯하다. 그나마 애써 위로를 한다면 노안과 함께 심안, 마음의 눈이 뜨인다는 것이다. 노안이 오면 너무 가까운 거리는 잘 보이지 않는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어야 비로소 보인다. 심안이 뜨이면,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인다. 하늘이 보이고 구름이 보인다. 계절마다 색이 변하는 산들이 보이고 나무가 보이고 새싹이 눈에 들어온다. 나뭇잎의 색상이 어떻게 바뀌는지 낙엽이 언제 어디로 사라지는지. 해가 어디서 뜨고 어디로 지는지. 오랜 시간 같은 길을 수없이 오가면서 한번도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언제부턴가 내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렇다고 심장이 멈춘 것은 물론 아니겠지만, 심장이 두근거릴 만한 일들이 없어진 것이다. 긴장감도 사라지고 열정도 사라졌다.


무엇이 내 심장을 뛰게 하는가?


예전의 기억들을 끄집어내어 본다. 처음으로 미국에 출장 갔을 때 그 긴장감과 설렘. 처음으로 외국인들 앞에 브리핑하던 그때는 긴장감과 함께 뜨거운 열정이 있었다. 서재가 있는 새 아파트에 입주할 때도 가슴이 뛰었고, 꿈꾸던 마당 딸린 주택을 짓겠다고 설계를 하고 축대를 쌓고 토목공사를 할 때 그때도 심장의 떨림이 있었다. 어디로 갔을까 나의 꿈들은? 이대로 예전의 추억만을 새김질하며 살아가야 하는 건가!


십여 년 전부터 습관적으로 해왔던 메모와 탁상 달력을 뒤진다. 지나간 시간들 잊혔던 기억들이 아련하게 소환되어 지나간 발자취를 증언한다. 그것들을 모두 지워버리는 순간 지나간 나의 삶은 고장 난 메모리 카드처럼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메모장을 열어 몇 개의 카테고리를 만들고 메모를 유형별로 분류하여 찾기 쉽게 정리해 본다. 그러다 문득 이 메모들을 정리해서 자서전이라도 써볼까 생각을 해본다.


그러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간다. 내가 무슨 유명인도 아니고 정치인도 아닌데 자서전 이라니. 평생 일기 한번 제대로 써본 적이 없기에 글을 쓴다는 것이 생뚱 맞고 책까지 낸다는 것은 어불성설 인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도전해 보고 싶은 욕구가 밑바닥부터 스멀스멀 올라온다. 코앞에 다가온 정년 퇴임. 변화가 필요한 시점. 꽤 매력적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