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감자국퀴어 Aug 02. 2022

네 하루를 나에게 줘

정한새




* 여름 휴가를 공지하고 8월 1일에 돌아오겠다고 하였으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하루가 밀렸습니다. 약속에 대한 글을 들고 왔는데, 정작 연재 약속을 지키지 못한 아이러니를 양해해주시기 바라며, 다음 글부터는 다시 마감을 쫓는 정한새가 되겠습니다.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나 말고 다른 사람과 약속을 잡았다는 이유로 절교한 적이 있다.

이렇게 말하니 미친 소시오패스 같네요. 물론 그 전에 여러 가지로 관계에 균열이 생기고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가 있긴 했다. 그 신호를 쌍방이 다 같이 받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받고 있었던 건 확실했고, 내가 그런 신호를 받고 있다는 걸 나와 그 사람을 알고 있는 제삼자도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날의 만남은 나에게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나는 잔정이 많고 모질지 못한 편이라 인간관계 끊어내는 것을 어려워한다. 관계를 끝낼 때는 연착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마저도 최대한 미루려고 애쓴다(그리고 이런 성향은 대체로 정신병을 동반한다). 그날도 나는 절교가 목적이 아니었고, 충분한 대화를 나눠 균열에 시멘트든 아교풀이든 발라서 관계를 다시 튼튼하게 메꾸고 싶은 마음이 컸다. 혹시 대화가 격해질까 봐 중재해 줄 제삼자도 불렀다. 그리고 상대방은 약속 시간에 한 시간 이십 분 가까이 지각했다.

날 만나러 한 시간 이십 분을 늦게 와? 그것도 서울 놈이 서울에 있는 약속 장소에 두 사람을 만나러 오는 건데? 심지어 점심 약속이고 장소에 메뉴까지 정한 터라 괘씸함이 하늘을 찔렀다. 이십 분쯤 늦게 올 것처럼 말하던 게 삼십 분, 사십 분이 되고 결과적으로는 한 시간을 넘었다. 처음 늦을 것 같다는 연락이 왔을 때 나는 이미 기분이 상한 것 반, 왠지 더 늦을 것 같다는 촉 반으로 제삼자 씨와 함께 식당으로 이동했다. 결국 둘이 밥을 다 먹고 난 후에야 약속 상대가 도착했다.

상대는 늦어서 미안하다며 자기가 후식을 사겠다고 했다. 주문을 마치고 자리에 앉자, 그는 조심스럽게 자기가 다음 약속이 있어서 곧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이쯤 되자 관계 개선이고 뭐고 할 마음이 싹 사라져 버렸고, 제삼자 씨마저 황당해하는 상황이 되었다. 나와 제삼자 씨는 왜 그런 얘기를 만나기 전에 하지 않았냐, 그럼 너는 몇 시까지 우리를 만날 생각이었냐고 물어봤고 상대방은 그냥 만나서 적당한 시간이 되면 인사하고 갈 생각이었다고 했다. 단어만 변주한, 사실상 같은 내용의 질의응답이 커피와 케이크가 나온 뒤까지 이어졌는데 상대방은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그러나 나와 제삼자 씨에게는, 다음 일정을 공유하지 않은 채 한 시간 이십여 분이나 늦은 상대방이 무척 괘씸했다. 기본적인 예의 문제도 있거니와, 다음 약속이 있다면 지각을 하면 안 됐고, 지각했으면 뒷 약속을 미루거나 취소했어야 하며, 하루에 약속이 두 개 이상 있다면 모든 약속 상대에게 그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이야기를 돌아가면서 설명했는데, 여전히 상대방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나는 눈앞에 놓인 그 좋아하는 치즈케잌에 손도 대지 못한 채 마지막으로 물었다.


너 지금 나랑 관계가 위태로운 거 알고 있지.

응.

근데 너는 오늘 나랑 만나는 걸 알면서도 늦었어.

그치.

그리고 너는 이제 간다네.

응.

내가 가지 말라고 하면 안 갈 거니?

네가 가지 말라고 할 거라곤 생각 안 해봤는데.

우리 지금 아무 얘기도 못 했어. 이 상황에서 네가 가버리면 우리 관계는 끝이야.

다음에 다시 얘기하면 되잖아.

다음에 언제? 다음에 또 네가 늦고 만나자마자 가야 한다고 하면?

...

너 지금 우리 관계가 좋지 못하다는 걸 알면서도 절대 다음 약속 취소 안 하는 건, 그냥 나와의 관계가 여기까지라고 생각한다는 거야. 나는 그것까지도 되게 기분 나빠.     


대화가 거기까지 갔는데도 상대방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가고자 하는 의지가 굳건했고, 나와 제삼자 씨는 글렀다는 걸 알았다. 그게 나와 상대방의 마지막이었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상대방이 서울 촌놈이라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억측일 수 있지만, 나와 제삼자 씨는 지방 출신이고, 상대방은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나와 제삼자 씨는 장거리 이동에 익숙했고, 따라서 누군가와 만날 때 그 한 건을 위해 움직이는 건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장거리 이동에 익숙하다는 말은,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KTX를 타는 게 대단한 결심이 필요한 일이 아니라는 거다. 너를 만난다는 건 그런 거니까.

나는 지방 출신 계획형 인간의 전형으로, 시간 약속에 엄격한 편이다. 사실 이 말도 우습다고 생각한다. 9시에 약속을 잡았으면 9시까지 오는 것이 당연할진대, 5분 10분 늦는 것도 봐주지 않는다며 투덜거리는 사람이 있다면서요? 그럴 거면 약속 시간을 9시 15분으로 잡았어야지. 나는 춘천에서 대구로 사람을 만나러 가도, 부산을 가도, 부천을 가도, 서울을 가도, 약속 시간에 늦은 적이 없다. 이놈의 지방 사람은 규모가 있는 행사에 참석하려면 반드시 수도권으로 가야 하므로, 이동 시간을 계산하는 데 도가 텄다. 집에서 기차역이나 버스터미널까지 가는 시간, 도착해서 탑승까지 걸리는 시간, 이동 수단에서 내려서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 거기서 또 움직이고 내려서 걷는 시간, 초행길이니까 헤맬 가능성, 선물을 아직 안 샀으면 가는 길에 꽃집이라도 있는지 들여다봐야 하고 어쩌고저쩌고. 물론 내가 일찍 도착할 가능성도 계산해서 근처에 앉아 있을 만한 카페나 구경할 만한 기념품 가게가 있는지 같은 것도 따져본다.

경기도에 사는 지금도 이 버릇이 애매하게 남아서 한 번 서울 갈 때 어지간한 볼 일을 다 해치우고 오려고 한다. 친구도 만나고, 왁싱도 하고, 전시회도 가고, 카페도 가고, 녹음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타투도 받고, 아무튼 24시간 안에 해결할 수 있는 모든 일정을 다 잡아서 욱여넣는다.

윗말과 어쩐지 상충하는 것 같다고요? 전혀 아닙니다. 이 24시간 안에 사람 만나는 것에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하기 때문이죠. 전시회 – 친구(점심 먹고 디저트까지) – 왁싱 – 서점 코스를 짰다고 치면, 친구와 만나는 시간이 길어져도 안심이다. 왁싱을 미루고 서점을 안 가면 되니까. 하지만 친구1 – 친구2 – 친구3 코스는 죽었다 깨나도 그런 조절이 쉽지 않다. 차라리 돈과 시간을 들여서라도 서로 다른 날에 만나는 게 낫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상대방은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속에 늦는 건 나쁜 습관이라고 치더라도, 하루에 약속을 두 개 잡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닐 수도 있겠지. 만날 수 있는 사람 풀이 지하철 타면 20분 거리 안에 있다면, 그리고 그런 생활반경에서 평생을 살았다면 오히려 내가 이상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미 관계는 끝났고, 그 사람이 그런 환경에서 자랐다고 하더라도 이해해줄 수 있는 분야는 아닌 것 같다. 어디에서 어떻게 살았건, 그 정도의 역지사지도 못하는 사람과 무슨 큰 일을 도모할 수 있겠는가. 같은 맥락으로 서울 사람이 ‘나는 가기 힘드니까 네가 와’라고 한다면, 역시나 절교하는 편입니다. 네가 나에게 오는 길은 가시밭길이고 내가 너에게 가는 길은 꽃길일 리가 있겠냐고요.




Torsten Dettlaff님의 사진: https://www.pexels.com/ko-kr/photo/69866/

작가의 이전글 3년 만에 서울 퀴어문화축제에 다녀왔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