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종일 낚시만 하는 멕시코 어부에게 한 미국인 부자가 찾아와 성공하는 법을 알려줄테니 20년간 일해서 백만장자가 되어보는 것은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멕시코 어부는 이에 대해 20년이나 걸려서 백만장자가 된 다음에는 무엇을 할 수 있냐고 물으니, 부자는 원하는 만큼 낚시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멕시코 어부는 이미 그렇게 살고 있는데 뭐하러 굳이 시간을 내어 부자가 되어야 하는지 물었다.
모든 병이 그렇겠지만, 우울증은 특히나 스트레스에 취약하다. 10대 때 나의 가장 큰 스트레스가 학업이었다면, 20대 때에는 취업이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진로는 나에게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내가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좋아하는 것은 어떤 일인지, 나에게 맞는 환경은 어떤 곳인지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10대 때 그래도 몇가지 고려해둔 진로가 있었지만, 여러 현실적인 요건들 (가령, 유학 비용이나 나의 부족한 능력 등) 때문에 모두 포기한 상태로 어느 진로에도 확신을 가지지 못한채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나를 제외한 대학 동기들은 입학 때부터 모두 명확한 목표를 정해두고, 일찍이 활발하게 스펙을 쌓고 대외활동도 희망하는 진로에 맞게 일관적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지 못했던 나는 벌써부터 취업 경쟁에 실패한 것처럼 느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선뜻 어느 것 하나 시작하지 못하고 더욱 불안해지기만 했다.
조급해지는 마음에 결국 대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외교관 시험을 준비해보기로 했다. 그래도 해외 경험으로 영어와 불어를 할 줄 아는 이점이 있었고, 공무원 하기를 바라시던 부모님의 기대에 맞출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순환근무와 국제정치 및 외교를 하는 일이 잘 맞을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다양한 스펙을 필요로 하는 대기업 취업과는 달리 늦더라도 시험 공부에만 전념하면 성공할 수 있는 명예로운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당시 시험 공부에 전혀 집중하지 못했었다. 취업 준비를 제대로 시작해보기도 전에 도피했다는 생각과 함께, 이 직업을 진정으로 하고 싶은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험에 떨어지면 어떡하지, 그러면 취업을 준비하기에는 늦고 하고 싶은 일도 없는데'라는 불안과 걱정 때문에 우울증이 심해졌다. 우울증 때문에 하루종일 무기력해서 공부에도 집중이 되지 않고 무엇보다 우울증의 증상 중 하나인 인지능력 저하로 공부한 내용이 머리 속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수험 생활을 지속하다가는 시험도 제대로 보지 못하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렇게수험생활 1년을 채우고서는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목표가 사라진 나는 생각을 지워보려고 노력하였다. 복잡한 생각들은 멀리 치워두고, '일단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걸 해보자'라고 결심했다. 그래서 재학생이어도 해볼 수 있는 인턴을 알아보았다. 직무에 필요한 경력이 전혀 없었던 나는 그저 학과에서 했던 과제와 팀플 경험을 쥐어짜내서 자소서를 써냈다. 그럼에도 지원한 회사에서 면접 제의 연락이 왔다.
몇년만에 느껴보는 성취감이었다. 회사가 인턴에게 바라는 것도 그리 크지 않아서 면접도 수월히 해냈다. 방황하느라 무기력하게 대학 생활을 보내서 남들과는 달리 화려한 스펙도 없었고, 내가 어필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성실함 뿐이었다. 그럼에도 좋게 봐주셨다. 그렇게 일단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대기업 인턴은 아니었지만, 작은 회사라도 내가 보탬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크게 기뻐했다. 그간 3년간 나는 이 사회에 쓸모없는 사람인줄 알았는데 인턴 한번 합격한 것으로 자기효능감이 크게 향상됐다.
그런 자신감을 한번 얻고나니, 인턴 생활을 열정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혼자 회사의 SWOT 분석을 했다. 지금 회사의 부족한 부분과 개선 사항이 무엇인지를 한낱 인턴인 내가 대표에게 직접 메일을 써서 보냈었다. 3개월짜리 인턴의 아이디어에도 귀 기울여주시는 대표님은 내 메일을 꼼꼼히 읽으시고, 제안서를 써서 모든 팀장들 앞에서 PT를 해보라고 말씀해주셨다. 나는 또 신이나서 어떤 전략으로 회사를 브랜딩하고 마케팅을 해야 소비자들에게 가치를 줄 수 있는지에 대해 PPT를 만들어 발표 준비를 했다. 결국 나의 기획과 아이디어는 신사업에 반영이 되어 더 많은 고객이 찾아왔고, 구매가 더욱 활발히 이루어지게 되었다.
짧은 3개월간의 인턴이었지만, 그 경험으로 내 무기력한 인생에 변화가 찾아왔다. 취업에 실패했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이런 작은 회사의 인턴 경험 외에는 아무런 경력과 스펙이 없음에도 이를 활용해서 글로벌 컨설팅 회사 MBB 중 한 곳에서도 인턴으로 채용되었다. 그리고 컨설팅사 인턴 경험으로 향후 대기업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을 수 있었다. 외교관 시험에 실패하고서, 일단 시작해본 작은 도전이 어느덧 크나큰 경쟁력이 되어 대기업 취업을 가능케 해준 것이다.
대기업을 거치고 지금은 스타트업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다. 인턴 경험을 모두 합해도 약 3년의 경력이 안된 주니어이지만, 그간 쌓아온 작은 도전들을 통해 나에 대해서 잘 알게 되었다. 특히 내가 커리어를 통해 이루고 싶은 인생의 가치에 대해서 많이 고려해볼 수 있었다. 그렇게 진로의 방향을 점차 구체적으로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나의 경우에는, 일이란 돈을 벌기 위해서 강제로 해야 하는 노동이라는 편견을 깨기 위해 노력했다. 백만장자가 되어도 똑같이 낚시를 할 것이므로 20년간 돈을 많이 버는 일을 할 필요가 없다는 멕시코 어부처럼, 연봉보다는 시간과 돈이 남아돌아도 내가 자발적으로 할만큼 재미있어하고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자 했다. 나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다양한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해외 출장을 갈 수 있고, 글로벌 비즈니스를 할 수 있는일을 찾아다녔다. (내 돈 들여서도 할 일을 회사 돈으로 한다니, 얼마나 좋은가!)
이렇게 어느정도 나에게 맞는 진로가 무엇인지에 대한 확신을 얻기까지 정말 많은 고민과 역경이 있었던 것 같다. 진로 고민은 누구에게나 힘들다. 특히 취업하기가 하늘에 별따기 수준인 한국이라는 경쟁 사회에서는 정신적으로 피폐해질 만큼 큰 스트레스를 준다. 어린 20대 청년들이 괜히 자신감을 잃고, 무기력해지고, 우울증을 앓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사회를 하루아침에 바꾸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나를 위한 작은 도전들은 하루아침에 시도해볼 수 있다. 나의 경우와 같이 일단 해놓은 것이 없더라도 학교 과제를 열심히 했던 경험으로 자소서를 써서 중소기업에 인턴을 지원해보는 것도 그런 도전 중 하나다. 시도해보지 않고 겁부터 내서 '나는 못할거야'라는 생각 대신 걱정을 비우고 일단 작은 일부터 부딪쳐보는 것이 진로 결정에 도움이 된다.
진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정신건강에도 좋다. 우울증에 대해서 알아본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우울증 치료에는 운동, 충분한 수면, 올바른 식단이 중요하다. 이걸 꾸준히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걱정은 일단 미뤄두고, 오늘만이라도 간단히 10분간 산책해보는 것이다. 하루 정도 커피 대신 보리차를 마셔보고, 떡볶이 대신 샐러드를 먹어본다. 이런 작은 도전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해볼 수 있다. 마음 먹은 대로 에너지가 나오지 않아서 무기력한 것이 우울증의 증상이니 설령 못해내더라도 자책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한번이라도 성공을 할 때면 스스로를 대견하다고 칭찬해주며 자기효능감을 올려 작은 성취들을 쌓아야 한다. 그렇게 시작한 작은 일들이 나중에 어쩌면 더욱 크고 좋은 결과를 낳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