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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인 Dec 18. 2022

하얀 이끌림

설경



하얀 이끌림


책을 뒤지다가 문득 하나의 풍경을 만난다. 읽고 있던 책을 가방에 부랴부랴 집어넣고 도서관을 빠져나온다. 차 시동을 걸고 달린다. 세찬 바람이 차창 정면을 후려친다. 차는 거센 바람의 몸을 순식간에 가르고 밀어낸다.


가는 눈발이 칼바람을 타고 몰아치기 시작한다. 산허리를 돌 때마다 위험 표지판이 차를 세운다. 사망사고 발생한 곳, 미끄럼 주의, 산사태 주의, 공사 중, 낙석 주의… 곳곳에 도사린 경고에 문득문득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든다. 그곳에 무엇이 있기에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달리는 것일까.


온 산을 뒤덮은 눈, 그 산 위의 흰 구름, 뭉게구름 뒤로 펼쳐진 뽀얀 안개가 깔린 듯한 하늘빛. 세상이 온통 눈으로 덮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곤돌라를 타고 스르르 올라가며 보는 풍광은 마치 만화영화 겨울 왕국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발아래로 물소리를 잠재우고 눈밭으로 변한 계곡이며 서리꽃을 풍성하게 매단 나무들. 그 사이로 스키어들이 먹이를 낚아채는 매처럼 슬로프 위를 질주하고, 함박 웃음꽃 매단 아이들은 엄마 아빠와 함께 눈썰매를 탄다.


윗옷과 등단화를 단단히 여민 사람들이 정상을 향해 출발한다. 나도 그 속에 섞인다. 오가는 좁은 길엔 공룡 발자국 같은 깊은 홈이 한 줄로 나 있다. 사람들은 백악기의 거친 내음이 그립기라도 한 듯 그 흔적을 그대로 밟으며 오른다. 몸을 둥글게 말고 조심조심 오르는 이들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진다. 칼바람 추위로 얼굴은 홍시가 되어 간다. 저들은 왜 이 거친 산을 저토록 힘겹게 오르는 걸까. 무엇을 찾고 싶은 것일까.



어디선가 탄성이 들려 바라보니 순백의 성전 하나 솟아 있다. 간밤의 모질었던 눈과 바람이 밤새 빚어낸 눈꽃 터널. 그 조형물에 산호초며 사슴뿔 같은 백설 꽃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마치 요정의 나라로 들어가는 궁륭 같다. 한 가지 색으로 이루어낸 완벽한 작품. 조화롭고 신비롭고 환상적인 그 조각품 아래, 발길 멈춘 사람들 삼삼오오 모여 추억을 담으며 하얀 탄성 뿜어낸다. 서리꽃 만발한 소담한 나무 위로 동고비 한 쌍 쉴 새 없이 오가며 노닌다.


꾸역꾸역 오르다 보니 정상이다. 구름과 맞닿은 고지에는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칼바람이 사방에서 몰아친다. 눈 쌓인 바위 턱을 쓸어내고 걸터앉는다. 눈을 한 움큼 쓸어 쥔다. 쓸어 쥔 눈에 후 입김을 분다. 멀리, 산자락을 뒤덮은 설원에는 굵은 주름과 등뼈를 훤히 드러낸 산들이 담담히 누워 있고, 잎을 떨군 앙상한 나무들도 침묵에 들었다.


거센 바람이 주춤하자 빠르게 흘러가던 뭉게구름 산마루에 걸린다. 구름 사이에서 파란 하늘이 엷은 햇살을 비추며 고갤 내민다. 순백과 대조된 파란색이 무척이나 맑고 짙다. 첩첩한 산과 산 사이마다 몽실몽실한 구름 내려앉고, 희미한 능선들 너울성 파도처럼 넘실대는 듯하다. 다시 일어난 높새바람, 주문처럼 해독할 수 없는 소릴 내지르며 지나간다. 하늘과 땅 구분 없고 만물의 구별조차 없는 공간, 그 그림 속으로 나도 스르르 스며든다.


하늘과 땅 사이, 허공에서 저절로 그려지는 수천수만 장의 수묵화들, 그 풍경은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깨끗한 부분을 오려 액자 속에 담은 한 폭의 산수화 같다. 그 그림을 담으려는 사람들의 손길이 바쁘게 오르내린다.



세상에 태어났을 때 나도 이처럼 하얀 도화지였다. 아장아장 걸으면서 병아리처럼 엄마 치맛자락을 잡고 졸졸 따라다녔다. 그러다가 울타리 밖으로 나가 동네 또래들과 어울렸다. 풀잎 한 줌 빻아 엄마 아빠 놀이도 했고, 냇가 물속에 뛰어들어 물장난도 했다. 소와 염소 풀 뜯기러 가는 언니 오빠들 따라가 초원을 뛰어다니며 다래와 머루 따 먹고 개울가에서 가재도 잡았다. 욕심도 욕망도 없었고 몰랐던 순백의 시절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일 것이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땡볕에 그을리고 깡마른 나와는 달리 뽀얀 얼굴을 가진 도심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애들이 가진 것들은 나와 달랐다. 색과 모양이 다른 필통이며 도시락, 그 안에 든 연필이며 반찬들이 처음 본 것들이었다. 똑같은 교복도 더 예뻐 보였다. 친구도 말끔하고 예쁜 그 애들과 노는 걸 좋아했다. 비로소 나는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것을, 내가 초라하다는 것을 알았다. 부끄러움과 수치심이 스며들었다.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갈수록 비교되는 것이 많았고, 그와 더불어 나의 열망과 열등감도 커져갔다.


인간 삶의 속성이 경쟁적이고 이기적이어서 그런가, 현실 한복판에서는 때가 묻을 수밖에 없다. 신선이 아닌 다음에야 현실과 이상 사이를 오가며 살아가야 한다. 현실에만 매몰되면 영혼이 타락하고, 이상에만 머물면 경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내기 어렵다. 그 안에서 지칠 때면 나는 도시를 탈출해 자연에서 잠시나마 위안을 얻는다. 오늘도 순수로 회귀하고 싶은 욕망이 순백의 세계로 나를 이끌었나 보다.


내려오는 길, 마치 꿈속을 다녀온 듯하다. 마음 바닥에 눈꽃처럼 깨끗한 도화지 한 장이 깔린 것 같다. 엄마 품에 안겼다 온 듯 몸과 마음이 부드러움으로 가득해진다. 내 마음의 암실에 찍어둔 순백의 풍경들, 마음이 혼탁해질 때마다 한 장씩 인화해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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