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결핍에 대한 합리화
오래 연락이 끊긴 사촌동생이
친구 가족들과 함께 아기들을 모두 데리고 발리로 여행을 다녀왔나보다.
깨가 쏟아지는 사진들을 인스타에 올렸다.
- 함께라서 행복해 ^^
- 내년에 또 같이 오자.
- 각자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다가 이렇게 종종 떠나는 거야.
- 교복입던 우리가 언제 이렇게 아기엄마가 되었니?
- 우리도 단짝, 애들끼리도 단짝.
너무나도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찍은 두 가족의 사진들이 참 예쁘다.
참 보기 좋고 차암 부럽다.
어떤 이들은 왜 과시해야 직성이 풀리는 걸까?
왜 혼자 조용히 행복하고 지나치질 못하고,
너넨 이렇게 행복하지 않지? 그걸 가지지 못한 사람들 약을 올려야만 행복이 극대화되는 걸까?
그래서 또 열폭 버튼이 눌렸다.
나는 친구가 없다.
이런 날은 또 신포도의 합리화를 시작해야 한다.
친구 뭐, 친구 있어서 뭐하는데?
어차피 좋을 때나 친구 아니야?
비슷하게 힘들거나 비슷하게 행복해야 친구 아니야?
둘 중에 누구 하나 힘들면 겉으로는 함께 힘든 척 하지만 돌아서서 내가 아니라 다행이다, 할 거잖아?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이 넘어지면 별 관심 없지만
지인이 넘어지면 기뻐하는 것 같다.
쟤는 넘어졌는데 나는 아니야,
쟤보다 내가 행복해.
상대적 행복감.
난 혈연이나 부부가 아닌 모든 인간관계의 목적이 오로지 그거 같다.
나이가 들어 맺은 관계들이 주로 그렇다 생각했는데,
어릴 때 만난 인연들도 다를 바 없어보인다.
인간의 본성이 그런가보다.
누군가 넘어지는 걸 보며
휴, 내가 아니라 다행이라 생각하고 스스로 위로한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 만족감 한 스푼 추가.
사람 만나기가 점점 싫어지는 이유다.
물론 불행까지는 아니다.
다수의 평범하고 착한 사람들은 세상 누구에게도 불행까지는 없었으면 하는 마음을 지니고 산다.
다만 누가 옆에서 넘어져 무릎팍이 까지거나 ,
팔꿈치가 조금 벗겨지는 정도에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느낀다. 분명 그렇다.
나도 마찬가지다.
주식 투자로 대박이 나서 구질구질한 직업따위 버리고,
남편과 아이들과 호주에 터를 잡은 대학 동기의 자세한 사정은 궁금하지 않다. 속속들이 알고 싶지가 않다.
대신 브런치에서 배우자의 바람이라든가, 집안이 쫄딱 망했다든가, 회사 사람들 때문에 괴롭다든가, 오랜 친구와 싸우고 손절했다든가 하는 글들은 꼭 시간내어 읽어보고 앉아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더니 정말이지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다.
질투도 본능처럼 이성을 지배하기에,
아무리 박수를 쳐주고 싶어도 남의 행복에 함께 기뻐해주기란 어려운 일이다.
차라리 위로가 쉽다.
대충 아래처럼 5가지로 나누었을 때 나는 어디쯤 속할까, 생각해봤다.
1-자신의 상황이 좋지 않아도 타인의 행복에 함께 기뻐하는 사람
2-자신의 삶이 충분히 만족스러운 상황에서 타인의 행복에 함께 기뻐하는 사람
3-자신의 상황이 좋지 않으니 타인의 행복이 짜증나는 사람
4-자신의 삶은 충분히 만족스럽지만 타인이 행복한 건 보기 싫은 사람
5-자신의 상황이 좋지 않아서 타인에게 관심 자체가 없는 사람
나도 그렇고 보통 사람들은 2와 3을 왔다갔다 하지 않을까?
가족을 제외했을 때, 아니 가족을 포함하더라도 살면서 1의 경우는 본적이 없다.
부모님이나 동생들, 정말 친하다고 여겼던 친구들조차 2아니면 5였지, 1은 되지 못했다.
반면 4는 꽤 많이 봤다.
4인 친구도, 4인 친척도, 4인 직장동료도 늘 있었다. 정말 사람 심리 참 희안하지.
나만 행복하고 싶다는 본성이 있다.
다같이 행복한 상황이면 행복감이 줄어드는, 놀부심보.
역시 인생 결국 혼자이며,
고독을 즐길 줄 알아야 노년이 행복으로 충만하다는
쇼펜하우어의 말이 딱이다.
그래, 친구 좀 없으면 어때?
혼자 열라면에 순두부 숭덩숭덩 넣고 끓여먹는 이 시간이 좋다.
이런 시간에 행복한 나 자신이 좋다.
사람에 집착하지 않고 관계에 연연하지 말고 지금 이대로만 늙어가자, 다짐해본다.
고요히 요가하고 명상하고 재미있는 컨텐츠를 기다렸다가 설레는 마음으로 찾아보고
또 그리 비싸지 않은 음식들에 행복을 느끼는,
그런 할머니가 되어야지.
이상,
친구가 없다는 열등감이 심한 사람의 넋두리였습니다.
친구가 한번도 없어봤기 때문에
진정한 친구들이 서로 얼마나 애틋하고 서로를 위해주는지 몰라요.
늙어서도 진짜 친구를 만나고 진하게 사귈 수 있을까요?
관계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지, 하면서도 쉽지 않군요.
인정에 끌려 사기 당하기 딱 좋은...
정신 차리고 살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