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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리 Jan 18. 2023

철학적으로 연극사 읽기

역사 서술의 문제 - 나무는 소리를 내었을까

오랜만입니다. 졸업논문과 학술지 투고 작업에 집중하다 보니 2023년 새해가 밝았네요. 이번 포스트부터는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연극의 시작점으로 돌아가 다시 연극사를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연극의 기원과 고대 연극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오늘은 역사 서술의 문제에 대해 짚고 넘어가 보려고 합니다. 역사를 서술한다는 것은 과거를 이해하는 지도를 그리는 것과 같은데요. 제가 여러분께 제공할 지도가 어떤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무엇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인지 이야기해 보려고 해요.


지도라는 것은 사용자의 목적에 맞추어 필요한 부분이 잘 읽힐 수 있도록 만든 것이지요. 하지만 어떤 지도를 그리든지 우선 시간과 장소를 가장 큰 축으로 세워 작성자와 사용자 사이의 공통 언어를 구축하게 됩니다.


1. 시간


(출처: https://qph.cf2.quoracdn.net/main-qimg-d2a6a6869f7c9175ba604523f5909e1b-lq)

보통 우리가 역사를 그려내는 시간의 축은 직선적(linear) 모델을 따릅니다. 직선적 시간이란 근대화, 산업화, 그리고 식민주의와 연관된 개념으로, 몸으로 느끼거나 자연을 관찰하여 알아차리는 유동적 개념이 아닌, 자로 잰 듯 정확한 시계를 통해 시간을 눈에 보이게 정량화한 것입니다. 분, 초, 시와 같이 찰나까지도 계산하는 이 시간은 생산성, 통제와 관련이 있는 개념입니다. 실상 개개인에게 시간이란 느리게 가기도, 빨리 가기도 하고, 과거, 현재, 미래를 건너뛰어 존재하기도 할 수 있지만, 역사를 기록할 때의 시간은 앞으로만 흐르는 기계적인 것입니다. 다른 기준의 시간을 예로 들자면, 우리나라의 절기는 농경업의 필요에 맞추어 자연과 계절의 변화에 따라 유동적으로 계산이 되고 있지요.


2. 공간


미국 뮤지컬의 전설적 콤비인 리차드 로저스와 오스카 해머스타인이 작업한 1951년도 뮤지컬 <왕과 나>의 한 부분을 잠깐 보시겠습니다.

(출처: https://qph.cf2.quoracdn.net/main-qimg-31b3649596ac1e7a4874f74cf8628187-lq)
(출처: https://www.broadway.org/multimedia/gallery/608/the-king-and-i-national-tour)

위와 아래의 지도 중, 어떤 지도가 더 정확하다고 보시나요? <왕과 나>는 1862년에 애나라는 영국인 여성이 시암 왕의 아이들의 가정교사로 초청되어, 처음에는 문화적 차이를 낯설어하다가 점차 신뢰와 애정을 쌓아가는 과정을 그립니다. 교육을 위해 시암으로 온 애나는 다양한 서양의 ‘신문물’을 시암의 미래를 책임질 아이들에게 전달하는데요. 사진은 시암 위주의 허술한 기존 지도를 발달된 서양의 기술로 치밀하게 작성된 세계지도로 교체하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두 지도를 맞거나 틀리다는 기준으로 구분할 수 있을까요? 그보다는 기존의 지도가 시암을 위주로, 가장 관심 있는 주변국과 시암이 속한 땅의 대략적 형태를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반면 두 번째 지도는 위도와 경도를 사용하여 전 지구의 대륙과 바다, 그리고 그들의 주권을 계량하는 것에 관심이 있지요. 장거리 이동이나 전쟁 시 좌표 설정에 용이해 보입니다. 정가운데에 아메리카대륙이 위치했다는 것도 눈여겨볼 점이고요.




위의 논의를 통해 시간과 공간은 만들어진 것이다라는 개념을 설명하였습니다. 우리가 종종 당연시하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지표들이 우리의 사고와 방향을 특정 방향으로 설계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다른 방향으로의 전환이 가능하다는 점을 시사하지요. 이 개념은 객관성의 결여를 문제시하기보다는, 어떤 역사든 그 서술과 해석의 축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환기시킵니다.


지식과 역사의 편향성에 대해 몇 가지 생각해 볼 주제를 소개하겠습니다.

1. 정체성의 정치

역사가 누구의 눈으로 서술되는지는 정말 중요합니다. 개개인의 경험과 사고체계에 의해 각자가 사는 세상이 완전히 다른 모습을 띄기 때문입니다. 사회, 경제, 성별, 성 정체성, 정치, 계급, 나이, 인종 등의 여러 가지 요인들이 각자가 인식하고 경험하는 세상의 모습의 차이를 만듭니다.

2. 거꾸로 쓰는 역사

우리는 흔히 역사를 과거에서 시작하여 현재로 거슬러 오는 순서로 접하지요. 하지만 막상 역사 쓰기란 현재에서 출발하여 과거를 되짚어가는 형태를 띱니다. 인과관계나 일관성 없이 어지러이 존재하는 과거의 흔적들을 현재의 필요에 따라 선택적으로 모아서 연속성을 부여하는 것이 역사 서술입니다.

3. 고전(canon)의 의미

역사와 고전은 함께 가는 개념인 것 같습니다. 고전은 종종 역사에서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지점들을 가리키지요. 그렇다면 고전은 고리타분한 것일까요 아니면 혁신적일 것일까요? ‘고전’하면 따라오는 이미지는 주로 보수성이나 엄격성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고전들이 당시의 가장 큰 혁신을 담았다는 점이 그러한 이분법적 개념을 거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가장 이질적인 것들을 모아서 그에 일관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라고도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이와 같이 역사가 인위성과 정치성을 지니기 때문에, 역사 서술의 힘을 지닌 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우리에게 제공되는 역사 지도의 형태가 결정됩니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인다 라는 말이 있듯이, 글이라는 배타적 매체에 높은 접근성을 지녔던 고위 계급 남성이 그간 주 서술자였습니다.

이에 따라 최근 학문의 트렌드는 넓은 의미에서의 퀴어(queer)적 역사 쓰기가 환영받는 분위기입니다. 퀴어란, 쉽게 말해 비남성적, 비가부장적, 비이성적 시선 등 비기득권적 세계관을 구축하는 다양한 시도들을 통칭하는 개념입니다.


(출처: https://www.mapsofworld.com/answers/regions/division-global-north-global-south/)

식민사업과 세계대전 등 전 지구적 개념의 ‘세계’가 떠오른 이후 변화해 온 세계 인식의 틀을 살펴보자면, 동양과 서양, 제1국과 제3국, 개발도상국과 선진국 등의 분류가 있습니다. 요즘에는 이러한 분류들이 현재의 세계관과 맞지 않다는 시각에 따라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와 글로벌 노스(Global North)라는 프레임을 주로 사용합니다. 남반구에 주로 저개발국이, 북반구에 주로 선진국이 위치한다는 점을 시각화한 용어이지요.




(출처: https://miro.medium.com/max/501/1*CH8mTi9pcH-x5uvI5L2jTw.png)


“숲에서 나무가 쓰러졌는데 그 소리를 들을 존재가 주변에 없었다면, 그 나무는 소리를 내었다고 할 수 있는가? (If a tree falls in a forest and no one is around to hear it, does it make a sound?)”라는 철학적 질문이 있습니다. 내 인식체계 너머의 일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또는 애초에 의미를 지닐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문장이지요. ‘철학적으로 연극사 읽기’ 시리즈는 쓰러진 나무의 소리를 최대한 그 나무의 언어대로 들어보기 위해 인식의 지평을 넓히려는 시도입니다.




간단한 두뇌 활동으로 이번 포스트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지금부터 세 가지의 서로 다른 역사 교과서 목차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시공간적으로 어떠한 분류를 따르고 있는지,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이 교과서의 목적과 시각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영어 자료로 되어 있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1) World Theatre: The Basics (2017), by E. J. Westlake


2. History of the Theatre, ninth edition (2003), by Franklin J. Hildy and Oscar Gross Brockett


3. Theatre Histories: an Introduction, second edition (2006), by Bruce McConachie, Tobin Nellhaus, Tamara Underiner, and Carol Fisher Sorgenfrei


세 가지 교과서가 상당히 다른 형태로 구성되어 있지요. 첫 번째는 가장 가시적이고 간단하지만 그래서 더 복잡해질 수도 있는 대륙 기준의 구분을 보여줍니다. 어떤 대륙을 얼마나 더 자세히 분류했는지 눈여겨보셨나요? 다음으로는 가장 기본적인 역사 교과서로 오래 사용된 브로켓 시리즈의 목차입니다. 서양 연극 위주로 연구되어 있으며, 마지막에 아시아와 아프리카라는 큰 대륙들이 하나의 뭉텅이로 잠깐 등장합니다. 마지막은 가장 최근에 등장한 연극 역사 교과서인데요. 기록 방식의 변화를 기준으로, 연도나 지역보다는 주제에 따라 여러 문화권의 연극을 다루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퀴어적 방식을 어느 정도 적용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저희는 이 역사책의 관점을 기반으로 연극사를 따라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철학적으로 사고하는 즐거운 시간이 되었기 바랍니다. 인식의 지평을 열어 둔 채로 다음 편부터는 연극의 기원부터 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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