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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리 Nov 08. 2023

디아스포라는 영웅이 될 수 있을까

멀티버스 히어로 영화와 미국 내 흑인-동양인 역학

지난 5월, 디즈니 만화 <인어공주>가 영화로 재탄생하면서 흑인 배우를 주연으로 내세워 논란이 되었었죠. 많은 관객이 백인으로 상상하던 인어공주가 흑인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에 어색함을 느끼고 불만족을 표현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특히 한국에서는 현재 미국에서 뜨거운 감자인 다양성 담론이 미디어에 적용되는 부분에 거리감을 느끼고 의아해했던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미국에서 다양성은 사회 구성원들이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영역이 문화 컨텐츠는 이를 중요하게 다룰 수밖에 없거든요. 그와 같은 환경에 놓여있지 않은 한국인에게 그 의도나 의미가 와닿으려면 더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오늘은 지난 포스트에 이어 미국의 다양성 담론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볼까 합니다.




2018년에 성공적으로 개봉한 <블랙 팬서>와 2022년에 개봉하여 역시 수많은 상을 받고 우수한 성적을 거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두 영화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요?


바로 떠오르는 것은 두 영화가 각각 흑인과 동양인 영웅을 내세우는 최근작 히어로물이라는 것입니다. 또 마블코믹스 마니아층도 있고 장르물에도 열광하는 한국이지만, 이 영화들이 한국에서는 상대적으로 인기를 끌지 못했다는 것도 공통점이겠지요.


<블랙 팬서>는 60년대에 마블 만화 시리즈로 이미 등장한 이야기인데요. 이번 포스트에서는 영화화된 현재 시점에서의 중요성만 짚어보겠습니다. 또 <블랙 팬서> 첫 편은 한국에서 꽤 크게 흥행했는데요. 한국의 부산을 극의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시켰다는 점에서 한국인에게 특별히 어필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겠습니다.


<블랙 팬서> 만화책 표지 (출처: https://www.amazon.com/Black-PANTHER-Original-Jack-Kirby/dp/B00PEM2U0M)


자고로 히어로물이란 선악의 대립,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영웅의 등장, 그리고 세계의 파멸 위기와 영웅에 의한 구조라는 요소를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엔 선악의 구분이 명확했지만 요즘에는 <말레피센트>(2014, 2019), <조커>(2019), <크루엘라>(2021) 등 '악'을 담당하는 인물들의 인간적 서사를 강조하여 이제는 뻔해진 히어로물에 신선함과 입체감을 더하는 경향이 보입니다.


이런 분위기에 <블랙 팬서>와 <에브리씽>이 새로이 충족시켜 주는 관객의 욕구는 무엇일까요? 우선 네이버 영화에서 소개하는 두 영화의 줄거리를 옮겨보겠습니다.


<블랙 팬서>: ‘시빌 워’ 이후 와칸다의 왕위를 계승한 티찰라(채드윅 보스만)는 와칸다에만 존재하는 최강 희귀 금속 ‘비브라늄’과 왕좌를 노리는 숙적들의 음모가 전 세계적인 위협으로 번지자 세상을 구할 히어로 ‘블랙 팬서’로서 피할 수 없는 전쟁에 나서는데…
<에브리씽>: 미국에 이민 와 힘겹게 세탁소를 운영하던 에블린은 세무당국의 조사에 시달리던 어느 날 남편의 이혼 요구와 삐딱하게 구는 딸로 인해 대혼란에 빠진다. 그 순간 에블린은 멀티버스 안에서 수천, 수만의 자신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모든 능력을 빌려와 위기의 세상과 가족을 구해야 하는 운명에 처한다.


지나치게 간략화된 줄거리라 몇 가지 덧붙여보겠습니다. <블랙 팬서>의 '와칸다'는 아프리카 대륙의 한 나라이며, 최빈국이라고 알려진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 사이에 숨어있지만 실질적으로는 희귀 광물과 우수한 기술력을 보유한 융성한 나라라는 설정입니다. 와칸다가 세계정세에 관여하지 않고 고립된 삶을 사는 동안 다양한 다른 지역에 뿌리내린 와칸다의 자손들이 백인에게 억압받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라고 합니다. 미국인으로 정착한 와칸다의 자손 킬몽거는 와칸다가 쇄국정책을 풀고 자손들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인물입니다. 와칸다의 모르쇠 태도에 분노한 킬몽거는 티찰라(주인공)와 결투를 벌이고, 와칸다에는 내전이 일어나는 등 여러 전투가 이어집니다. 와칸다에 큰 혼란을 불러온 킬몽거는 죽음을 맞이하지만 다른 나라와 교류를 늘려야 한다는 그의 뜻은 존중되어 와칸다가 국제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기로 결정하는 결말을 맞습니다.


<에브리씽>이 말하는 멀티버스란 인간이 살아가면서 놓였던 다양한 선택의 순간들이 각 선택에 따라 다른 버전의 평행우주를 만들어낸다는 개념에 착안하여, 동시다발적인 평행우주가 수천수만 가지 존재한다는 설정입니다. 현재 세계의 에블린(주인공)은 세탁소를 운영하는 보잘것없는 전형적 동양인 이민자이지만, 과학적으로 뛰어난 자질을 보였던 다른 세계의 에블린 평행우주 간 이동하는 기술을 개발하였다고 합니다. 그곳에서는 평행우주 이동에 재능을 보인 딸에게 에블린이 무리한 기대를 거는 바람에 딸의 정신이 무너고, 우주의 이치를 통달해 버린 딸은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조부 투파키'라는 악인으로 재탄생하여 온 우주를 멸망시키려 고 있습니다. 에블린과 함께 자폭하려고 했던 조부 투파키는 마지막 순간에 자신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진심을 확인하고, 삶에 대한 허무함에 갇혀있던 모습에서 벗어납니다. 영화 초반 파멸 직전이었던 가족의 모습은 우주의 위기와 동일시되었는데, 가족의 화합과 함께 우주 또한 평화로 돌아가면서 영화의 막이 내립니다.

'다중 우주'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그려낸 <에브리씽> 포스터

(출처: https://www.imdb.com/title/tt6710474/)




두 영화에는 제 눈에 띄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선'을 대표하는 주인공이 외부인의 위치에 있다는 것이고, '악'의 자리를 차지한 인물이 내부자이자 주인공의 자녀 세대라는 점입니다. 미국인으로, 즉 내부자로 살아가는 자녀세대의 슬픔은 우주를 집어삼키고 지구 멸망의 위기를 가져옵니다(<에브리씽>에서 조부 투바키는 우주를 집어삼키는 블랙홀을 만드는데 그 블랙홀은 '베이글'이라는 미국적 물체로 표상됩니다). 그리고 이 위기는 그들의 존재가 부모 세대에게 받아들여짐으로써 해소되고 올바른 세계 질서의 복구를 가져오게 됩니다.


세계관으로 본다면 두 영화 모두 공상 과학 장르를 차용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세계관에 초자연적인 힘을 살짝 덧붙인 여느 히어로물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평행우주라는, '만약 ~했으면 어땠을까?'라는 상상력을 덧붙인, 대체적 역사의 존재를 상정합니다. 멀티버스라는 다중우주 장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미국인의 정체성을 가진 자녀세대를 이 글에서 '디아스포라'라고 하겠습니다. 지금 제가 짚어드린 공통점에는 디아스포라의 존재가 현재 미국에서 일인칭 화자가 아닌 '빌런'으로, 즉 현재 질서를 흐트러트리는 '악'의 위치에 놓여있다는 생각이 담겨있습니다. 부모에 의해 존재가 제대로 인식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화자가 되지도 못하며, 그 존재의 인식 및 인정에 대한 큰 갈망이 있습니다. 악인을 좀 더 이해하는 관점으로 접근하는 최근의 히어로물 동향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내부자/외부자, 선인/악인의 이분법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디아스포라가 원하는 세계관은 공상과학이라는, 현실의 공간을 탈피한 영역에서 이루어지게 되는데요. 이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초월적 존재로 비추어져 희망적이기도, 또 지금의 현실 그대로는 해피엔딩이 불가한 듯하여 비관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두 영화에서 흑인과 동양인은 미국의 백인 사회가 읽을 수 없는 외부의 영역에서 큰 힘을 가지고 있고, 자녀 세대는 그 힘을 통한 구원을 기대합니다. 와칸다의 힘은 비브라늄이라는 자원의 보유와 그 자원을 잘 사용할 수 있는 우수한 기술에서 나오고, <에브리씽>의 평행세계 여행 또한 과학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합니다. 신자유주의 속에서 흑인이나 동양인이 힘을 가지는 배경이 기술적 우위라는 점에서 현대의 세계관에 맞는 현실성도 보입니다.


이때 해피엔딩을 위해서는 부모 세대의 협력이 필수적인 것으로 제시되는데, 두 영화에서 자녀의 분노는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다 또는 외면받았다는 상처에 기인합니다. 미국 내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한 부분보다는 미국 외적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한 부분이 이들의 좌절과 고통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조상으로부터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받고자 한다는 점에서 친족 관계의 내부자로 받아들여지고자 하는 마음으로도 보입니다.


실제로 다양성에 대한 인식이 미국 밖에서는 워낙 적다 보니, 부모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재 미국에서 흑인들 사이에 유행하는 유전자 검사(검사를 통해 조상이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이었는지 어느 정도 알 수 있다고 한다)는 디아스포라가 '본국' 또는 '고국'이라고 일컬어지는 존재에 닿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흑인 디아스포라가 아프리카에 가서 겪는 거리감과 한국계 미국인(교포)이 한국에 와서 겪는 괴리감은 본국과 디아스포라 사이에 무시할 수 없는 경험적, 사고적 간극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보자면, 영화의 제작자와 배우 대부분이 디아스포라이지만 막상 서사는 부모 세대의 관점에서 전개된다는 점이 특이한데요. 공상과학 속 상상의 부모 세대라고 해도 디아스포라가 본국인의 경험체계를 충분히 이해한다는 자신감이 엿보이지 않나 싶습니다. 외부 문화에 대한 접근성을 당연시하는 것과 부모에게 받아들여지는 문제가 우주의 존속을 논할 정도의 무게를 지닌다는 점이 두 영화에 드러나는 '미국성'이 아닌가 합니다.




호모 사케르(Homo Sacer)라는 말이 있습니다.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 1942-)이라는 이탈리아 철학자가 학술화한 용어인데요. 인간의 존재 가치가 사회적 영역에서 차등을 가진다는 점에 집중하여 법이 보호하지 못하는 영역, 즉 사회의 주변인으로 존재하는 인간은 사회적 죽음을 맞이한다고 설명합니다. 사회적으로 죽은 인간의 존재 가치는 아주 낮게 책정되어 그들의 실질적 죽음 또한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는데요. 이들을 제물로의 가치조차 가지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로마 시대의 법률 용어를 빌려 호모 사케르라고 이름 붙이고 있습니다.


아감벤이 정치적 영역에서 지워진 인간을 논한다면,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Spivak, 1942-)의 서발턴(subaltern)이라는 개념은 식민지 담론에서 호모 사케르와 유사한 위치의 존재를 가리킵니다(서발턴은 이탈리아 철학자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1937)에 의해 처음 제시되었으나 스피박이 식민지담론에서 효과적으로 활용하면서 널리 쓰이게 되었습니다).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글로 유명해진 스피박의 논지는, 제국주의의 헤게모니(지배담론/이데올로기) 안에서는 하층민들이 존재할 공간이 없어 그들의 목소리가 지워지고 들리지 않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숲에서 나무가 쓰러졌는데 그 소리를 들을 존재가 주변에 없었다면, 나무는 소리를 내었는가?"라는 질문과 상통하는, 인식적 틀이 없어 세상의 기록과 흔적에서 지워지는 존재들을 가리키는 용어이지요. 호모 사케르가 존재 가치의 상실을 이야기한다면, 서발턴은 존재감의 상실을 이야기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두 히어로 영화를 보면서 디아스포라의 경험이 호모 사케르나 서발턴과 유사하게 그려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아직도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과정에 있으며, 그에 따라 극의 화자가 되지 못할뿐더러 진짜 정체를 숨기고 있다가 나중에서야 주변인으로서의 분노를 담은 악인으로 등장기 때문입니다. 킬몽거와 조부 투바키는 극에 반전이 있기 전에는 주요 인물들의 주의를 끌지 못합니다.




지금까지는 두 영화를 동등한 위치에서 다루었지만, 두 영화의 중요한 차이점인 인종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호모 사케르와 서발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인식적 틀의 부재 인간 가치 차등 분배의 문제를 소개했는데요. 그 문제는 아시아계 미국인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입니다. 1992년 일어났던 LA 폭동을 일인다역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구현하여 연극계에 큰 획을 그은 애나 데버 스미스(Anna Deavere Smith, 1950-)의 <황혼>(Twilight: Los Angeles, 1992, 1993)이라는 극이 있습니다. 극에 등장하는 학자들은 아시아인이 미국의 인종적 틀 안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라고 거듭 언급합니다. 동양인은 늘 백인과 흑인 사이 그 어딘가에 위치하고, 따라서 의도하든 의도치 않았든 미국 내 인종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거나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 사회 내 아시아인의 위치가 여전히 불분명한 가운데, LA 폭동이 그려내는 동양인과 흑인의 대립은 코로나 사태 속 아시아인 혐오 범죄 속에서도 여전한 문제로 언급됐지요. 동양인과 흑인이라는 같은 디아스포라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요?


<황혼> 공연 포스터입니다. 붉게 타오르는 도시의 모습이 보입니다.

(출처: https://www.showtix4u.com/event-details/49234)


UC 어바인의 클레어 킴(Claire Kim, 1965-) 교수는 인종적 삼각관계(Racial Triangulation)라는 개념을 통해 동양인이 포함된 미국의 인종 역학을 그려냅니다. 기본적으로 미국은 백인-흑인이라는 직선적 대립 모델을 통해서 백인의 사회적 우위를 유지하는데요. 이때 동양인은 그 직선적 스펙트럼 안에 영합되기보다는 외부인으로서 존재하면서 백인-흑인 역학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동양인이 영원한 이방인이자 외부인으로 존재하는 동안, 백인 사회는 동양인에게 그들이 백인 사회에 영합될 수 있다는 희망과 믿음을 주며 이용하면서도, 막상 그 우위는 내어주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상상력을 동원해 그려낸 대체 우주에서 흑인의 근본을 와칸다라는 외부적 존재로, 동양인의 근본을 이민자라는 나름의 내부적 존재로 상정한다는 점 인종 삼각형을 어지르는 과를 가져옵니다.


'인종 삼각형' 그래프 (출처: "The Racial Triangulation of Asian Americans" by Claire Jean Kim, 1999)


그래프의 세로축은 사회적 우위를, 가로축은 내부자로 인식되는 정도를 나타냅니다. 동양인은 외부자로 존재함으로써 흑인에 대한 사회적 우위를 기대하게 되는데요. 흑인은 백인과 같은 내부자의 특권을 가지지만 백인과 직선적 상하관계를 형성합니다. 즉 동양인과 흑인은 하나를 가지는 대신 하나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반면 백인은 두 가지를 모두 누리는 위치에 놓여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동양인에게 제대로 된 인식의 틀이 없다고 했지만 사실 그동안 존재했던 공공연한 프레임으로 이상적 소수 신화(Model Minority Myth)는 것이 있습니다. 인종 삼각형의 배경이 되는 개념이지요. 백인 사회가 수학을 잘하는 범생이에, 순종적이고, 정치적 문제에서 한 발 빠져 있으며, 사회적 성공을 좇는 모습으로 대표되는 동양인을, 미국 내 다양한 다른 인종과 대비되는 '모델', 즉 이상향으로 제시함으로써 타인종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강화하는 논거로 사용한다는 점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대표적으로 흑인의 경우 부르주아 백인의 세금으로 이루어진 여러 복지 정책에 기대어, 삶의 환경 개선이나 재기에 대한 의지 없이 나라의 짐이 되고 있다는 인식이 있는데요. 이는 동양인과의 비교를 통해 합리적인 주장으로 정당화됩니다. 차별의 원인을 개인적인 노력의 부재로 돌리는 것이지요. 이상적 소수 신화는 아메리칸드림의 건재를 보여주고, 인종적 특성에 결함을 부여하여 사회적 차별을 합리화합니다. 상업적 성공과 작품상 수상의 영예를 동시에 거머쥔 영화 <겟 아웃>(Get Out, 2017)에서 흑인의 몸을 갈취하는 부르주아 백인 사회에 동양인도 자연스레 끼어 있는 모습이 등장하는데요. 이렇듯 백인의 인종 질서 유지에는 정치적으로 무관심해 보이는 동양인이 분명히 기여하는 바가 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겟 아웃>의 한 장면에서 흑인 몸 경매에 참여한 동양인의 모습이 끝줄에 보입니다.

(출처: https://www.unmargin.org/on-the-asian-guy-in-get-out-beyond-complicity)


한국인들이 총을 들고 건물 지붕에 올라가 있는 이미지로 강한 인상을 남겼던 LA 폭동의 경우도, 폭동이 촉발된 계기에 한국인 가게 주인이 흑인 소녀를 총으로 쏘아 죽인 사건이 있다는 점, 그리고 한국인들이 자산을 지키기 위해 살상을 각오한다는 점이 흑인의 생명이 사회적으로 덜한 가치를 지닌다는 인식을 한국인 이민자들이 그대로 체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물론 LA 폭동에는 더 복잡하고 다양한 사건들과 논지가 얽혀있지만 이 글에서는 간단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당시 출동한 경찰이 폭동 현장을 지켜볼 뿐 한국인을 보호해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고 말하는 한국인의 인터뷰가 있습니다. 미국의 경찰이 동양인의 생명을 흑인의 생명보다 우선하여 보호할 것이라는 한국인의 믿음과, 실질적으로는 흑인과 동양인 모두 미국에서 적극적으로 보호받는 구성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시입니다.


'지붕 위 한국인'(roof Koreans)이란 이름을 얻은 당시 한국인의 모습입니다.

(출처: https://www.koreatownstorytellingprogram.org/roof-koreans)




디아스포라를 서발턴이라고 단번에 규정짓기는 어렵습니다. 지배 담론에 종속되기보다는 그 담론의 예외 사항이 되어 존재만으로 지배 담론의 견고함을 흔들기도 하고, 내부자로서의 권력도 분명히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지배담론이 이민자이자 외부인인 부모세대라고 보는 것도 맞지 않고요.


그럼에도 미국에서 디아스포라가 이야기하는 주변인으로서의 울분과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에서 오는 불안정함은 늘 저를 생각에 잠기게 합니다. 답 없는 문제에 함께 괴로워하고 슬퍼하다가도, 막상 미국인으로서 가지는 특유의 권력에 대한 당연시와 미국중심적 사고를 접할 때면 그들이 이야기하는 '고국'과 진정 연결되는 길이 멀어 보이기도 합니다. 허무맹랑한 듯, 정신없는 듯 보이는 <블랙 팬서>와 <에브리씽>이지만 디아스포라의 현실과 그들의 감정을 가장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는 영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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