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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리 Nov 17. 2023

연극, 민주주의를 꽃피울

고대 그리스 연극1: 민주주의와 디오니소스 축제

우리는 유럽과 미국의 다양한 나라와 문화를 “서양”이라는 말로 통칭합니다. 이러한 관습에 문제제기가 되고 있긴 하지만, 실제로 유럽과 미국 자신의 문화의 기원을 고대 그리스에서 찾는다 공통점을 가집니다. 그렇다면 이 고대 그리스에는 어떤 특징이 있었을까요?


계속해서 연극의 기원을 짚어보고 있는데요. 지금의 우리와 동떨어지게 느껴지는 고대의 역사지만 기원설에는 현대까지 내려오는 세상에 대한 이해의 틀이 담겨있습니다.




연극과 민주주의


연극의 제의적 기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서양 연극만은 다른 나라들과 상당히 다른 기원을 가지고 있음을 언급했었습니다. 디오니소스 축제라는 고대 그리스의 연극제는 제의적 특성을 가진 것이긴 했는데요(그리스 비극을 의미하는 Tragodia는 영어의 tragedy의 기원이기도 한데요. tragos + ode로 염소를 바치는 노래라는 제의적 요소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후손들이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찾은 문화의 뿌리는 다른 부분에 더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고대 그리스는 민주주의의 발생지라는 역사적, 정치적 의미를 가집니다. 연극도 그리스의 민주주의에서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는데요. 일반적으로 연극은 무대 위에서 두 명 이상의 인물이 대화를 주고받는 형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일방적인 연설과는 다른 형태의 의견 제시 방식으로, 서로 다른 생각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들의 충돌과 교류, 화합과 변화를 그려냅니다. 즉 토론의 형태를 띤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연극은 인물의 독백 이후엔 코러스라고 불리는, 익명의 군중을 대변하는 무리가 그에 대해 코멘트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로써 인물의 대사가 일방적인 주장의 관철이 아니라 토론을 위한 발판을 다지는 역할을 가지게 됩니다. 코러스는 무대와 객석 사이에 위치하여, 무대 위 주요 인물들에게 반응하며 배우와 관객의 중간자 역할을 수행합니다.


주로 연극제에 상연되었던 이 공연들은 우승자를 가리는 경쟁의 일환이었고, 관객은 환호와 야유 등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여 점수 매기기에 참여하였습니다. 연극이 끝나면 극이 다룬 주제에 대해 열띤 토론을 이어 가기도 했지요.


공연의 내용은 다양했지만 주로 가장 즉각적인 현재의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을 신화의 재해석을 통해 표현했습니다. 우화적 특성이 있기에, 통제되지 않는 인간의 본성통제를 목적으로 하는 사회 구조 사이의 갈등이라는 삶의 본질적 문제들을 다루었습니다. 즉 신과의 소통이 위주였던 다른 제의적 공연들과는 다르게 인간을 삶의 주체로 보고 그 인간사에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개입을 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있었습니다. 연극이란 정치적 토론의 장으로, 민주주의를 꽃피우는 핵심 요소 중 하나였던 것입니다. 극의 우수성 또한 장면 연출보다는 대사나 내용이 공적 영역에 대해 얼마나 유려하게, 또는 효과적으로 구술하고 있는지에 따라 결정되었습니다.




제국의 시작과 디오니소스 축제


서구 열강은 제국의 특징을 가지고 있지요. 제국이란 "왕의 통치권이 한 나라의 경계를 벗어나 다른 민족이나 국가에 확장되고, 지배 영토뿐 아니라 문화와 삶의 방식까지도 변화시키는" 통치 형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네이버 지식백과, 문학비평용어사전). 고대 그리스 또한 제국으로, 그들의 융성하고 발달한 문명은 후대가 제국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테네의 문맹률은 비슷한 시기 다른 나라나 문화보다 눈에 띄게 낮았고, 따라서 고대 그리스 연극에 대한 기록 다른 고대 극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이 남아 있어 지금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영향력이 특히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이제까지 고대 그리스라고 말했지만 디오니소스 축제가 벌어진 곳, 그리고 그것이 기록된 곳은 아테네라는 한 '폴리스(polis)', 즉 도시국가입니다. 아테네는 주변 도시국가보다 월등한 힘을 가지고 그들과 협력 관계를 맺음으로써 제국의 발판을 다졌습니다. 디오니소스 축제는 아테네의 힘을 주변 도시국가들에게 보여주는 행사로, 아테네가 자신의 전사들의 용맹함을 과시하는 동안 협력 관계의 도시국가들에서는 아테네에 경의를 표하고 공물을 바쳤습니다.


디오니소스 축제는 풍요를 담당하는 신인 디오니소스를 기리는 것으로, 그가 상징하는 자유의 가치는 민주주의와 일맥상통하였습니다. 디오니소스의 자유로움은 또한 예술과 연결되기에 연극은 디오니소스 축제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출처: https://www.gettyimages.co.uk/detail/news-photo/aerial-panoramic-view-from-a-drone-of-the-acropolis-of-news-photo/1258198565)


디오니소스 축제가 벌어졌던 공연장의 모습입니다. 도시의 중심이자 월등히 높은 지대(아크로폴리스)에 위치한 파르테논 신전은 하늘(신)에 닿고자 하는 의지를, 그 바로 옆에 위치한 원형극장은 공연이 당시 사람들에게 가졌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디오니소스 축제는 약 7일 동안 진행되었는데요. 추정되는 진행상황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1일: 디오니소스상 행진
디오니소스가 아테네에 도착함을 상징하고, 훈련 중인 전사들 중 신체적으로 뛰어난 청년들을 모아 행진을 진행한다. 아테네의 위용을 보여주는 것이다.

2일: 찬양가(Dithyramb) 대회
디오니소스 밑 다른 신들을 찬양하는 노래와 춤을 선보인다.

3일: 희극 대회
다섯 명의 극작가들이 전쟁, 교육, 정치, 법 등 현재의 정치사회적 문제를 풍자한다.

4-6일: 비극과 사티로스 극 대회
각 극작가는 비극 3편과 사티로스 극 1편, 총 4편의 극을 올렸고, 하루에 한 극작가의 작품이 연작으로 공연되었다. ‘트릴로지’(3부작)라는 말은 이러한 관습에 의거한 것으로, 3편의 비극이 시리즈로 올라갔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사티로스 극은 현재 한 편밖에 남아있지 않으며, 앞서 공연된 비극 3부작 속의 진지한 내용들을 우스꽝스러운 몸짓과 장난, 직설적이고 난잡한 유머를 통해 조롱했다. 비극의 끝에 긴장되었던 에너지를 가벼운 웃음으로 털어내며 현실로 돌아오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마지막 날: 폐막제
함께 모여 연극제의 끝을 축하하는 자리로, 축제동안 있었던 다양한 불만을 자유롭게 표출하고 올라갔던 극이나 수상 결과에 대한 비판도 공유하는 해소의 시간이다.




고대 그리스의 장면 연출: 스펙터클(Spectacle)보다는 스피치(Speech) 


그리스 연극의 배경을 알았으니 이제 고대 아테네의 원형극장에 앉아 극을 관람하는 상상의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먼저 참고 동영상을 보실게요. 영어로 되어 있지만 시각 자료가 워낙 잘 되어있어 영상만 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4_XPcAwmuLg&list=PLpuhPUF1iWOF_iUbVFW4hgdZU_rR9hLHm&index=21 


현대 극장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부분들이 있지요. 커다란 가면, 코러스의 존재, 다층적 무대 공간 등이 눈에 들어옵니다.


1.    가면 

(출처: https://www.facebook.com/GreeceHighDefinition/posts/ancient-greek-theatre-masksthe-use-of-masks-in-ancient-greek-theater-draw-their-/3125000590850570/)


가면은 배우 한 명이 여러 인물을 연기할 수 있게 하고, 표정이나 얼굴의 특징을 강조하여 커다란 원형극장의 뒷자리에 앉은 관객도 인물을 구분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머리카락이나 수염 등 얼굴의 모든 요소를 완전히 가리는 커다란 가면이었지요. 우화적 특징을 생각했을 때 가면은 효과적인 연출적 요소이기도 합니다. 일상에서 떨어져 인간사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신화 속 인물을 나타내기에도 안성맞춤이니까요. 구조는 배우가 가면을 썼을 때 울림통이 생겨 음성이 더 크게 전달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역시 뒤에 앉은 관객에게까지 소리가 닿을 수 있도록 신경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풀을 먹이거나 칠을 한 을 소재로 사용했기 때문에 지금은 한 개도 남아있지 않고요. 당시 연극이 너무나 유행했기 때문에 그림이나 모자이크에 묘사된 내용과 돌이나 청동 등 다른 소재로 본떠 만든 모형을 통해 이 정도로 추측할 뿐입니다.

연극제의 모습을 담은 병의 문양입니다. 배우들이 손에 가면을 들고 있습니다.

(출처: https://www.archaeology.wiki/blog/2014/05/26/the-chorus-leader-of-the-drama-electra-in-two-vase-paintings/)


2.    코러스

앞서 잠시 코러스를 언급했었는데요. 무대 위 인물들이 주로 왕이나 귀족 등 지배층에 속한다면 이들은 시민/일반인/군중을 나타냅니다. 극이나 장면 진행 전에 상황과 배경을 관객에게 미리 설명해주기도 하고, 각 장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철학적 질문을 던지기도 합니다. 무대 위에서 일어난 일에 코멘트하기도 하고, 실제로 인물들과 대화를 하기도 하는 등 극의 진행상황과 분리된 듯 분리되지 않은 존재입니다. 또한 무대 밖에서 진행된 내용을 전달해주기도 하는데요(이 부분은 뒤에서 더 설명하겠습니다). 코러스는 신화와 지배층이 이끌어가는 극을 시민인 관객이 공감하며 따라갈 수 있게 하는 존재였습니다.

(출처: https://www.archaeology.wiki/blog/2014/05/26/the-chorus-leader-of-the-drama-electra-in-two-vase-paintings/)


3.    다층적 무대 공간

공연 공간은 우선 3층으로 나누어져 있는데요. 가장 위층은 신에게, 중간층은 주요 인물인 왕과 귀족에게, 그리고 아래층은 시민에게 할당되었습니다.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yPS9uPewB7c)


무대 중앙 뒤편에서 등장 중인 바퀴 달린 들것이 보이실 텐데요. 에키클레마(Ekkyklema)라는 이 장치는 무대 뒤편에서 죽은 인물을 시체로 등장시키기 위해 동원되었습니다. 잔인하고 폭력적인 요소가 많은 그리스 신화이지만 죽음과 폭력을 포함한 모든 센세이셔널한 장면은 무대 위에서 연출될 수 없었습니다. 보이는 것에 현혹되면 시민들이 사유와 토론이라는 연극제의 목적을 잊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어요. 그래서 그리스 연극을 보면 가장 중요 장면이 주로 메신저라는 인물을 통해 긴 대사로 전달되고 있습니다. 센세이셔널한 클라이맥스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다소 지루할 수 있지요.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왼쪽 끝에 보이는 바구니입니다. 많은 그리스 고전이 상황이 있는 대로 꼬여버린 극의 정점에서 신을 등장시켜 모든 상황을 쉽고 단순하게 풀어버리곤 하는데요. 이때 초월적 존재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신은 바구니나 끈에 매달려 등장했습니다. 지금도 쓰이는 연극 용어인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는 이 관습에서 나온 것으로, 잔뜩 꼬인 극의 상황이 급작스런 외부적 존재의 개입으로 허무하리만치 쉽게 풀려버리는 구조를 일컫습니다. “장치에 매달린 신”이라는 뜻의 그리스 단어입니다.


눈에 보이는 특징 이외의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도 소개드릴게요. 당시 극작가가 연출도 함께 담당했으며, 대사가 가장 중요하긴 했지만 악기를 동반한 음악과 노래, 춤 또한 극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였습니다. 코러스는 주로 노래와 춤을 통해 코멘트를 했고요. 디오니소스 축제는 돈을 받고 표를 파는 구조가 아니었기 때문에 배우들은 전업이 아닌 부업으로만 연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여자는 배우를 할 수 없었으므로 모든 여성 배역을 남자가 연기했습니다. 당시 민주주의가 남성 시민만을 공적 영역에 참여할 수 있는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했으니, 연극이라는 토론장에 여성 일원이 배제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제의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미국에서 공연예술학 박사과정을 시작한 그리스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와 대화를 나누면서 재밌는 사실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서양 연극의 기원지답게 지금도 그리스의 공연계는 다채롭고 활발하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신적 존재나 제의에 있어서는 전혀 관심이나 발달된 바가 없다고 해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어떻게 된 일인가 싶은데, 어쩌면 처음부터 신의 존재 형태나 의미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지점에 놓여있어서 그렇지 않나 싶습니다.


초자연적인 힘이나 죽음 너머의 존재들과 교류를 이어가는 일반적인 제의와 다른, 인간에서 시작하여 인간으로 끝나는 고대 그리스의 연극제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이야기하는 그리스 비극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덧 1. 씨어터

고대 그리스 연극은 서양 연극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시작점인데요. 영어로 연극을 Theatre라고 하지요. 이는 Theatron이라는 그리스 단어에서 나온 것으로, “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연극의 본질적인 요소로서 '본다'를 통찰, 관찰등의 뜻으로 다양한 학자들이 다양하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덧 2. 극작가

지금 우리에게 자료가 남아서 전해지는 극작가는 총 네 명인데요. 우선 테스피스(Thespis, 기원전 6세기)는 연극제의 첫 우승자로, 서양연극사 속에서 인정받은 첫 예술가로 기록되고 있기에 지금도 배우를 '테스피안(thespian)'이라고 부르는 등 존재감이 큽니다. 다음은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입니다.


아이스킬로스(Aeschylus, 기원전 525-456년)

트릴로지(3부작)를 도입했다. 처음엔 연극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이 한 명이었지만, 아이스킬로스가 한 명을 추가해 두 명이 되었다. 70-90편에 달하는 극작을 하였는데 그중 일곱 편만이 남아있다. 비극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 찬송가에서 합창대 중 한 사람과 나머지 합창대의 문답 형식이 주는 극적 요소를 끌어올려 연극으로 완성시킨 인물이다.  

소포클레스(Sophocles, 기원전 496-406년)

장면 연출을 도입했다. 세 번째 인물을 추가하여 그리스 비극의 주요 인물이 총 세 명으로 유지된다. 120여 편의 극을 썼으나 우리에겐 일곱 편만이 전해진다. <안티고네> <오이디푸스 왕> <엘렉트라> 등을 집필했다. 흔히 가장 위대한 극작가라고 불리는데, 그 이유는 다음 포스트에서 설명하겠다.

에우리피데스(Euripides, 기원전 484-406년)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극적 장치를 도입했다. 코러스의 비중을 줄이고 인물의 심리를 파고드는 등 현대적인 극작 기술을 보여준다. <메데이아>, <엘렉트라>, <트로이의 여인들> <바카에> 등을 집필했는데, 이와 같이 여성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것 또한 에우리피데스가 가진 현대적이고 진보적인 관점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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