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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야 Oct 10. 2017

첫 말

가치 모음집을 시작하며 by 수리야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하고, 월급을 모아 독립을 하고. 내가 상상한 그림 속 삶의 단계는 단순했다. 그렇지만 실전은 그림과 달랐다. 쌩쌩 달리는 차들로 꽉 찬 8차선 사거리 한가운데 선 기분이었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으면 불행하다.’ ‘큰 회사부터 시작해야 한다.’ ‘집은 사야 한다.’와 같은 다른 이들의 말은 나를 무척 혼란스럽게 했다. 중요한 삶의 단계를 한 줄로 압축한 듯한 말들이 누군가에게는 진실일지라도 나에게도 그럴지는 알 수 없었다. 나의 진실이 아닌 말들에 기대고 싶지 않았다.


내가 잘 아는 말, 잘하는 일, 익숙한 환경을 떠났다. 남의 말과 내 불안이 만든 내 안의 시끄러운 아우성을 잠재우고 싶어 홀로 긴 여행을 했다. 지독히 외로울 때가 많았다. 내 불안이 만든 질문에 정직하게 답하지 못할 때마다 ‘이게 아닌 것 같은데’ 하는 씁쓸함과 두려움이 몰려왔고 그때마다 글을 썼다. 뿌연 관념이나 느낌을 구체적으로 한바탕 쓰고 나면 내 욕심과 한계가 보였다. 내 한계를 발견할 때마다 무척 괴로웠지만 마구잡이로 써댄 글이 그런 순간을 버티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여행을 하며 세상을 보니 세상은 필요한 것들이 부족함 없이 잘 갖추어진 곳이었다. 그러니 결국 무엇을 취하든 나의 선택이었다. 내가 선택하지 않으면 내 삶은 주인은 떠나고 남의 목소리만 쩌렁쩌렁 울리는 빈집같이 느껴졌다. 그럴 때마다 손을 뻗어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공감하려는 사람들을 만났고,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지만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말들로 지어진 책을 읽었다. 말을 실컷 쏟고, 책 속에서 서성이고, 그 과정에서 얻은 생각과 느낌을 글로 남겼다.


복잡하고 단편적으로 보였던 사실들을 글로 쓰면 한 줄기로 엮여 의미가 생겼다. 그 의미는 나에게 중요한 삶의 가치로 자리 잡았고, 그 가치들은 내가 살면서 중요한 순간에 무엇을 선택할지를 정하는 기준이 되었다. 복잡한 세상에 휘말리지 않으려 떠들고, 읽고, 글로 정리하다 보니 어째서인지 나처럼 불안하고, 흔들리고,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던 사람들 덕분에 진실하게 살 용기와 힘을 얻었고, 그래서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었던 기억이 내 등을 떠밀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라고, 복잡한 세상에 자꾸만 휘말리는 불안의 고리를 발견하고, 이야기하고, 직면하는 일의 가치와 기쁨을 함께 누리라고.


그래서 내가 사는 마포구에서 일하고, 살고, 노는 20-30대 여성 청년들을 모았다. 한 아이의 엄마도 있고, 따끈한 신규 퇴사자도 있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도 있고, 죽음을 거의 매일 만나는 활동가도 있다. 감사한 분의 도움으로 ‘들숨 날숨, 나의 가치와 호흡하기’라는 이름도 붙였고, 제안서를 만들어 서울특별시 마을공동체 종합지원센터에서 작게나마 지원금을 받았다. 어려운 인문학 책으로 시작하기보다 단순하지만 중요하고, 쉽지만 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이 좋았다. 그래서 친구가 소개해 준 마중물가치교육연구소의 ‘가치성장카드’를 활용했다. 이 카드에는 55가지 삶의 가치에 대한 정의와 각 가치를 구체적으로 고민하도록 이끄는 질문이 적혀있다. 우리는 노동, 북돋움, 사랑, 아름다움, 열정, 자기사랑, 창조성을 함께 선정하고 4주간 열띤 수다를 떨었다. 각 가치별로 각자가 질문을 선택하고, 질문에 대한 자신만의 답을 총 14편의 글로 썼다. 세상과 자신을 향한 우리의 떨리는 첫 말을 힘껏 응원한다. 그리고 우리와 비슷한 고민을 통과하고 있는 이들에게 우리의 말이 무사히 도착하길 바란다.

첫 '가치 모음집'은 10월 12일(목)에 발행됩니다.

*가치 모음집은 7명의 글로 만들어집니다.
*매주 화, 목에 발행되며 11월 9일(화요일)까지 연재됩니다.


<가치 모음집> 보기

0. 첫 말. 가치 모음집을 시작하며 by 수리야

1. 북돋움: 존재만으로도 나를 북돋아 줄 수 있는 한 사람 by 유네

2. 노동: 영향력 있는 움직임 by 키

3. 사랑: 신혼부부의 사랑 by 수리야

4. 열정: 지금의 이 자리로 by 아타

5. 열정: 열정은 어떻게 계산되는가 by 청하

6. 북돋움, 자기사랑: 나는 나를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다. by 지혜광

7. 노동: 야근 대신 살림 by 수리야

8. 자기사랑: 나무에 박힌 못 by 순이

9. 자기사랑:내 이름을 사랑하기로 선택했다 by 키

10. 복돋움: 뒤늦은 받는 기쁨 by 아타

11. 북돋움: 나를 위한 시간 by 순이

12. 사랑: 사랑은 나의 힘 by 유네

13. 노동: 사원 복지도 좋고 돈 많이 주는 NGO by 지혜광

14. 노동: 나는 다시 노동으로 행복해질 수 있을까? by 청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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