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사랑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리야 Jan 04. 2021

아빠가 묻힐 자리

아빠 발치에 선 죽음

*그림: 볼프 에를브루흐의 그림책 <내가 곁에 있을게>, 웅진주니어, 2007 

어릴 적부터 나는 죽음과 멀었다. 죽음이 불길한 일이라 느끼는 엄마는 나를 가족의 죽음과 멀리 두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나는 엄마가 쥐어준 카드로 혼자 집에서 중국음식을 시켜 먹었다. 장례식장에서 돌아온 엄마가 문 앞에 있던 중국음식 그릇을 보고 '너는 어떻게 밥이 넘어가니?'라는 말을 하고 방으로 사라졌고 나는 머쓱하게 입을 닦았다. 엄마는 나를 죽음과 멀리 두고 싶어 했지만 엄마는 당연하게도 실패했고, 그 실패는 예견된 일이었다. 엄마는 불길한 것을 없애려 죽음을 삶 밖으로 계속 밀어냈지만, 죽음은 늘 거기에 있기 때문에 단 한 번도 밀려나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죽음이 궁금했다. 사후세계, 전생, 임사체험 책과 사례를 읽었고, 종교는 없지만 종교적인 인간인 나는 윤회가 실재함을 자주 느낀다. 꿈에서 보는 나의 돌아가신 친척들의 존재도 나에게 죽음이 여기 있고, 죽음이 그저 끝이 아니라는 걸 말해주었다. 명상이나 묵상을 할 때 역시, 영혼과 육체는 분명히 다른 존재임도 자주 느낀다. 죽음이 이제 나의 가족도 찾는다. 말기암으로 고통받던 아빠가 코로나에 감염되면서 죽음이 한 발 더 가까이 왔다.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숨을 쉬는 아빠는 어떤 고통을 느끼며 어떻게 지금을 지나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아빠의 고통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지만, 그저 고통에서 자유롭기를 바랄 뿐이다.


코로나 감염 중 사망하면 장례식을 열 수 없다. 나는 제사, 결혼식, 장례식 등의 의식을 꼭 치러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의식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기에, 원하는 이가 있다면 기꺼이 열겠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의식은 죽음을 삶에서 멀찍이 밀어 두고 살던 이들이 곡을 하고, 삶에서 기쁨을 뜻밖의 일이라 여기는 이들이 축하하는 사회적 시공간이다. 기꺼이 축복하고 기꺼이 애도하는 시간이 삶의 한 구석에라도 없다면 인간은 스러지고 말 테니, 필요한 행위다. 요즘 매일 아빠의 발치에 가만히 선 죽음을 애도하고 느끼는 나에게 장례식을 열 수 있다 없다는 내 마음에 큰 파도를 일으키지 않는다.


내 마음의 파도는 아빠의 뼈가루를 어디에 모시느냐로 일어난다. 아빠는 어쩌면 감염 중 죽음을 맞고, 아빠의 육신은 바로 화장터로 떠나 화장될지도 모른다. 나는 아빠가 재가 되는 모습을 한동안 바라본 뒤 뼈가루를 한 그릇 받아 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예약해둔 납골당 자리에 그릇을 안치하고, 죽음과 함께 선 아빠를 내가 사는 서울 밖 멀찍이 밀어 두고 내 삶으로 돌아올 것이다. 나는 왜 가루가 된 아빠가, 아빠의 죽음이 내 삶에서 그토록 멀리 있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나는 납골당에 아빠를 두고 오지 않고 매일 나의 삶이 펼쳐지는 우리 집에 아빠를 데려오고 싶다. 아빠는 더 이상 집이 떠나가라 코도 골지 않으며, 방귀를 돌연 붕 뀌지도 않으며, 언니와 내 이름을 헷갈리며 번갈아 큰 소리로 불러대지도 않는다. 아프다고 끙끙 앓지도 않고, 살이 쪘네 빠졌네 하는 외모 지적도, 탄핵당한 전 대통령을 데려오라는 얘기도 없다. 물질세계에 조용하고 하얀 가루로만 남은 내 아빠를 나는 왜 그토록 먼 곳에 두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엄마에게는 아직 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엄마, 아빠 우리 집에 데려 올래.라고. 살아 있을 때보다 한결 더 마음 편하고 따스하게 아빠를 기억하고 아빠를 위해 기도를 할 수 있을 텐데, 어째서 품에 안아 내 삶의 한 가운데로 데려오는 건 안 되는 걸까. 엄마는 할머니나 다른 친척의 죽음처럼, 아빠의 죽음도 불길하다 여길까. 납골당을 예약할 때 엄마 자리도 함께 예약한다. 엄마, 우리 집에 엄마도 데려오면 안 돼?라고도 묻고 싶다. 그럼 이건 어떨까. 아빠의 뼈가루를 한 숟갈 떠서 작은 함에 담아 우리 집에 데려오는 거. 엄마, 그것도 안될까? 


죽음은 늘 내 곁에 있다. 나의 죽음도, 부모의 죽음도, 누구의 죽음도. 죽음을 내 발치에서 바라보며 나는 살아간다. 죽음은 불길하지도 불행하지도 않다. 죽음이 항상 내 곁에 있기에 나는 많은 것을 용서할 수 있고,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으며, 이 삶을 무한히 축복하고 충실히 누릴 수 있다. 우리는 고통과 아픔, 죽음과 슬픔을 너무 멀리 두고 살아간다. 노동자나 취약계층의 삶 속에 더러움과 불편함을 몰아넣고, 거대한 병원의 집단 입원실에 고통을 밀어 넣는다. 코로나가 이렇게 퍼져 있지만, 우리는 코로나 감염자 집단 격리시설에 대해 모르고, 그곳에서 확진자들이 얼마나 아픈지, 확진자를 돌보는 사람들의 고초가 구체적으로 어떤지 뿌옇게 상상만 한다. 격리시키고, 소거하고, 떨어트려 두었지만, 이 모든 건 바로 우리 곁에 있다. 죽음은 삶만큼 값진 것이고, 건강함만큼 아픔은 삶의 고락을 더 선명히 느끼게 한다. 슬픔과 기쁨이 삶에 주는 영향은 그 진폭과 힘이 다르지 않다.


그러니 엄마, 나를 낳고 사랑해 마지않았던 소중하고 고마운 두 사람의 뼈가루를 내 곁에 두는 건 어떨까. 매일 그 사랑을 기억하고 그 힘으로 내 남은 생을 살아갈 텐데. 그건 어떨까?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의 시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