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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야 Jan 07. 2021

마침내 이혼, 드디어 화해

아빠를 떠나 보내며 다시 만난 가족

이혼의 시작부터 끝까지 2년이 걸렸다. 그동안 나는 가족과 만나지 않았다. 나의 이혼 결정을 가족이 지지하거나 공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 그렇게 참고 산다고 말했다. 사주를 몇 년 공부한 언니는 사주상 시기가 나쁘고, 부부 사이에 문제가 있으면 내 잘못이니까 그냥 살라고 했다. 이런 말들을 매번 주워 삼키며 이혼을 진행하는 건 나에게 너무 가혹했다. 그래서 나 혼자 해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나의 선택을 지지받지 못했던 상처를 끌어안고 슬퍼하고, 원망하고, 분노하며 2년을 보냈다. 이 모든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그대로 느끼고, 표현하려 애썼다.


나를 가장 지지해주었으면 했던 가족에게 지지를 받지 못했으니 나에게는 나뿐이었다. 지금의 나보다 단 한 발자국도 더 나가지 않고, 바로 내 곁에 머무르는 연습을 했다. 용서와 화해 같은 올바른 답으로 준비되지 않은 나를 몰아가고 단죄하는 습관이 나를 괴롭혔고, 최선을 다해 나를 기른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이 자주 엄습했다. 그때마다 분노하고, 슬프고, 억울하고, 아픈 지금 이 순간의 나에게로 끝없이 돌아왔다. 충분히 그렇게 하자고, 그렇게 해도 된다고 나를 끌어안았고 많은 시간에 글을 썼다. 나를 헤아리고 허용한 친구들과 상담 선생님, 자신의 감정과 느낌에 충실한 소설과 희곡 속 인물들이 나를 켜켜이 둘러쌌다. 나는 두텁고 안전한 곳에서 떠나가라 울부짖었다.

2주 전, 온 가족이 코로나에 걸렸다는 소식을 통해 나는 가족과 다시 연결되었다. 각자 격리 수용된 코로나 확진자 세 사람을 위해 나는 열흘간 발 벗고 뛰어다녔다. 온 가족이 떠나자 돌볼 사람이 없어진 16살 노견의 기저귀를 갈고, 이 병원 저 병원을 오가며 서류를 떼고, 물건을 날랐다. 그간 아픈 아빠를 돌보지 않았던 내 슬픈 마음, 아빠를 돌보느라 고생했을 엄마와 언니에게 미안했던 마음을 기껍게 만회했다. 인생의 아주 큰 불행처럼 보이는 이 일이 나에게는 선물과 같았다. 유일하게 건강한 내가 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참 많았던, 그간 표현하지 못한 사랑을 마음껏 펼친 가슴 뛰는 시간이었다.


말기암에 코로나까지 겹친 아빠의 몸은 죽음과 아주 가깝다. 인간은 죽음과 함께하기 어려울 때 죽음을 밀봉해두곤 한다. 이제는 밀봉해둔 상자를 열어 현실과 이을 때다. 죽음은 당연한 결말이지만, 이 결말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다. 나에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마."가 아니라, "마음껏 두려워해. 실컷 울어."라고. 죽음 앞에 떨고 있는 나를 헤아리자 두려움은 이내 내가 다룰만한 크기로 줄어들었다. 저항은 고통을 키우고, 헤아림은 고통을 받아들이게 한다.


나를 얼마든지 비난할 수 있었던 지난 2년 동안, 나는 내 곁에 서는 힘을 키웠다. 요즘의 나는 불행이라 이름 붙이기 쉬운, 격랑 주의보가 내린 바다에 살고 있다. 내 안에는 많은 감정과 생각이 끝도 없이 오르내린다. 그렇지만 그 속에서 나는 계속 숨을 쉰다. 감정과 생각이 나를 함락시키지 않도록 정신을 똑바로 차린다. 슬픔이 내 안의 두려움과 불안을 일으켜 나를 멀리 끌고 가지 않도록, 혹은 슬픔이 제 모습도 찾지 못한 채 억눌리지 않도록 슬픔을 충분히 느낀다. 그러면 슬픔은 고통이 아니라, 그저 슬픔이 된다. 거센 파도가 솟구치는 바다에서 숨 쉬는 걸 잊는다면, 그것은 불행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바다에서 계속 숨을 쉰다면, 그건 그저 거친 바다일 뿐이다. 나는 슬프지만, 슬픔에 함락당하지 않고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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