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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야 Jan 08. 2021

묏자리를 고르는 방법

아빠를 묻을 추모공원에 다녀와서

며칠 전 아빠를 묻을 장지를 정했다. 서울 외곽의 몇몇 추모공원을 돌았고, 엄마와 언니의 얼굴에 안심의 빛이 감돌던 한 공원에 아빠와 엄마의 자리를 예약했다. 1970년대부터 운영해왔다는 그곳에는 다양한 형태의 묘와 납골당이 자리하고 있었다. 내가 살아가는 서울이 붐비듯, 아빠를 만나러 드나들던 병원이 북적댔듯, 추모공원의 묘 간격도 빽빽했다. 아빠의 병을 통과하며 바라보는 세상의 자리는 다양했다. 나는 내가 살아가는 도심의 자리만 삶의 자리라 느껴왔고, 그래서 다른 자리들은 구태의연하게 상상하며 살았다.


환자들은 고통과 슬픔에 신음했지만,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의 배려와 보살핌은 빛났다. 추모공원은 적막한 기운도 맴돌지만, 떠난 이를 향한 애틋한 그리움과 살아 있을 때 다 보여주지 못했던 사랑이 자리마다 깃들어 있었다. 이제는 말이 없는 이들이 선물하는 고요함과 평온함이 나를 조용히 안아주기도 했다. 문득 함께 투쟁! 을 외쳤던 농성장도 떠올랐다. 분노한 이들은 원망으로만 가득할 거라 상상하지만, 그들에게는 서로를 돌보며 힘든 시간을 단단하게 통과하는 유쾌함이 넘쳤다. 처음 본 나를 따뜻한 손과 눈물로 안아준 그분들에게서 나는 큰 사랑을 받았다. 삶은 구태의연하지 않다.


장지를 다녀온 뒤 자연스레 나의 사라짐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나는 막내다. 남편이나 후손이 없고, 형부나 조카도 없고, 사촌과 육촌은 열도 넘지만 연락은 안 한다. 지나고 나면 눈 한 번 감았다 뜬 것 같은 찰나지만, 내게 남은 삶은 아직은 길어 보이기에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지 알 수 없다. 새 가족이 생길지도, 내가 엄마나 언니보다 먼저 떠날지도 모른다. 혈연 가족 중심으로만 생각하지 않아도 되지만 지금은 문득, 마지막에 홀로 설 내가 그려진다. 내가 죽으면 나는 이 세계에 없다. 결국 내 몸과, 내 삶의 부산물은 내 몫이 아니라 내가 떠난 세계의 몫이다. 나는 내가 그립지 않을 것이고, 내가 태우고 묻지 않을 것이다. 내가 떠날 이 세계의 나는,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몫이니까, 나는 더 이상 내 죽음이 스산하지 않다.


아빠와 당신이 함께 묻힐 자리를 고르는 엄마를 유심히 지켜봤다. 엄마는 마치 이사 갈 아파트를 고르듯 자리를 찾았다. 빽빽한 추모 공원에서도 묘 앞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음식을 먹을 공간이 있고, 언니와 내가 언제 와도 찾기 쉽고, 양지바른 자리를 골랐다. 내가 지금껏 가족과 이 복잡한 도시에서 살아온 집의 조건과 꼭 닮았다. 괜찮은 추모공원의 볕 좋은 자리값은 서울에서 네 식구가 살아갈 괜찮은 집값처럼 만만치 않다. 엄마가 죽기 전, 원하는 곳을 고를 시간과 힘이 있어 기쁘고, 만만치 않은 자리를 지불할 저축이 있어 다행이다. 엄마는 남을 우리를 사랑하기에, 포근하고 아름다운, 우리가 함께 살아온 집 같은 묏자리를 예약했다.


나의 유언과 죽음의 방식을 생각해봤다. '나를 어디에 어떻게 묻어주오.'가 아니라, '나를 사랑하고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위안이 될 방식으로 마무리 지어 주시오.'라고 남기고 싶다. 이 세상을 살아갈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들일 테니, 나를 그리워하며 때로는 기쁘고 때로는 슬플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가장 잘 위로하고 돌볼 수 있는 방법이면 좋겠다. 죽는 방식을 내가 정하면 어떨까 해서 스위스 존엄사 계를 하자며 친구들과 웃기도 했지만, 나는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는 삶처럼, 죽음도 삶에 맡기고 싶다.


사랑은 죽음 앞에 가장 빛난다. 나는 사랑이 한도가 정해진 것처럼 누군가에게 인색하게 굴었고,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았다. 내가 아빠의 죽음과 엄마의 주름지고 떨리기 시작한 손을 보며 느낀 건 그 반대다. 사랑은 무한하니 끝없이 사랑하면 되고, 삶은 유한하니 허비할 틈이 없다. 살아간다와 사랑한다는 동의어다. 사랑을 포기하는 건 살기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니 자주 사랑에서 미끄러져도, 사랑하기 어렵다 느껴지는 고통과 어려움을 마주해도, 언제나 다시 사랑하고 싶다. 이건 내 유언이 아니라, 내 삶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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