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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팬 Nov 17. 2023

당신 이제 정말 철들었나봐

아버지도 눈물을 흘린다.

이 세상 아들놈들은 다 죽일 놈들입니다.    



***  


         

서울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잠시 고향(?)을 찾았습니다. 내 고향은 서울 종로구 혜화동입니다.   

   

혜화동에서 태어나 열 살까지 자랐습니다. 그 시절이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봄날이었습니다.  

    

혜화동은 지금도 물론 부자 동네지만 50년대 60년대엔 서울을 대표하는 부촌이었고 가장 살기 좋은 동네였습니다.   

   

이쪽으로 가면 지금은 대학로로 이름이 바뀐 아름다운 서울대 마로니에 길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저쪽으로 가면 성균관대학교 길 건너 아름다운 창경원 돌담길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혜화동에서 4.19도 보았고 5.16도 보았습니다. 4.19 때는 대학생들이 피 흘리며 경찰관들에게 이리저리 쫓겨 다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5.16 때는 혜화동 성당에 피신해 있던 장면 총리가 군인들에게 이끌려 나오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우리 집은 역사적인 혜화동 성당이 마주 바라보이는 나지막한 언덕길 위에 있었습니다.


          

***



아버지는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 정부 시절 재무부에서 일했던 젊고 유능한 관료였습니다. 지금의 기획재정부가 된 재무부의 경제부처에서 대한민국 경제의 초석을 놓았다고 합니다.

     

환경부 장관을 지내고 새문안교회 고 김동익 목사의 사모이기도 했던 황산성 변호사를 만났던 적이 있습니다. 놀랍게도 그분이 아버지를 유능한 공직자로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일제 때 대학교육을 받은 인텔리였습니다. 해방되기 전까지는 만주와 러시아 등지를 오가며 무역을 하다가 해방이 되자 이승만 정부에 들어가 일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재능이 많은 분이었습니다. 문예지에 소설을 연재했던 문학가이기도 했습니다.  

    

색소폰 드럼 등의 악기도 능숙히 연주할 줄 아셨습니다. 옛 가수 남인수 씨 같은 미성이라 가수를 해보라는 권유를 받을 정도로 노래도 잘 불렀습니다.  

    

그림도 잘 그리셨습니다. 연필 한 자루만 들면 쓱쓱 내 얼굴을 똑같이 그려주셨습니다.  

    

손재주도 좋아 시계가 고장 나면 직접 분해하고 조립하셨습니다. 집수리할 때도 사람 부르지 않고 망치 들고 펜치 들고 혼자 다 일하셨습니다.   

   

무엇보다 마음이 따뜻한 분이었습니다.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은 언제나 사람들로 바글바글했습니다.

     

어머니도 전문학교 교육까지 받은 신여성이었습니다. 학교 졸업 후 신세계백화점에서 경리부 직원으로 일했다 하니 요새로 치면 삼성그룹에 다닌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금슬좋은 부부였습니다. 50년대 60년대 우리 아버지 어머니만큼 세련된 멋쟁이 부부는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다른 집 아버지 어머니와 확연히 구별되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어린 시절 나의 큰 자랑거리였습니다. 그러나 그게 딱 열 살까지였습니다.

     

대꼬챙이 같던 아버지는 당시 군사정권과 불화했습니다. 결국 공직에서 옷 벗고 나왔습니다.   

   

그 후 우리 집은 급격히 바닥으로 추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가 손대는 사업마다 참담한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마침내 예쁜 혜화동 집을 떠나 건너편 명륜동 산동네로 쫓기듯 이사 가야 했습니다. 지금은 달동네로 이름이 바뀐 산동네에서의 삶은 처참했습니다.  

    

자랑스럽던 아버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처자식의 생계도 책임지지 못하는 무능한 가장으로 변해갔습니다. 어머니도 하루하루 삶에 찌든 산동네 아낙으로 변해갔습니다.   

   

어느덧 중학생이 된 내게 빠르게 사춘기가 찾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미웠습니다.    


       

***



친구들과 놀다 늦게 집으로 돌아오던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술에 취한 아버지가 골목길을 비틀비틀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나도 말없이 아버지 뒤를 따라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앞서가던 아버지가 갑자기 담벼락에 기대어 서시더니 꺼이꺼이 우시는 것입니다.    

 

깡마르고 볼품없이 변한 아버지의 뒷모습이 유난히 초라해 보였습니다. 약한 아버지의 모습이 싫었습니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다 경멸하듯 냉정하게 아버지 앞을 바로 지나쳐 그냥 집으로 들어와 버렸습니다. 아버지가 그런 내 모습을 보셨는지 못 보셨는지는 지금도 알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버지는 암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때 이미 병이 깊어 있었던 것입니다.  

    

암을 발견했을 땐 이미 치료 시기를 놓쳐버린 말기였습니다. 벽제 화장터에서 화장한 아버지의 유골을 나 혼자 들고 가서 시퍼런 한강 물에 훌훌 뿌리며 울었습니다.    

  

그때 내가 열여섯. 아버지는 겨우 오십이었습니다. 어린아이들과 젊은 아내만 남겨두고 아버지는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가셨습니다.    

  

그때 일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내 나이 칠십을 코앞에 두고 있습니다. 나보다 훨씬 젊은 연세에 처자식만 남겨두고 눈을 감으며 아버지는 무엇을 생각하셨을까?    


       

***        


  

참 오랜만에 혜화동을 찾아와 어린 시절 아버지 손 잡고 다니던 골목길에 서 있습니다. 퇴근길에 찬민아. 하고 나를 부르시던 아버지의 음성이 어제 일처럼 귓전에 쟁쟁 울려옵니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 옛날 아버지처럼 담벼락에 기대어 꺼이꺼이 울었습니다.  

    

그때 내가 아버지 힘내시라고 왜 말하지 못했을까? 왜 아버지 어깨를 안아드리지 못했을까?  

    

지나가던 사람들이 벌건 대낮에 멀쩡하게 생긴 남자가 담벼락에 기대어 우는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라 종종걸음으로 내 곁을 지나쳤습니다. 얼른 눈물을 닦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혹시 그날 밤 아버지도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까? 아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 얼른 눈물을 닦고 그 자리를 떠나지 않으셨을까?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아버지.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날 밤 못되게 군 것 용서해주세요.  


나는 천하의 죽일 놈입니다.

 

   

***     


     

그날밤 아내에게 이런 싸가지 있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당신. 이제 정말 철들었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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