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교통사고의 추억
첫눈이 살짝 내린 날입니다.
조심조심 차를 몰고 골목을 빠져나오는데 커브 길에 갑자기 웬 여학생이 나타나더니 눈길에 발라당 미끄러져 버렸습니다.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하마터면 내 차에 치일 뻔했습니다. 얼른 차에서 내려 괜찮으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괜찮다고 하면서 일어서는데 다행히 다친 데는 없는 것 같았습니다. 옷에 묻은 눈을 툴툴 털고 걸어가는 여학생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까마득한 옛일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
80년대 초였습니다. 명동 YWCA 회관 앞을 걸어가고 있는데 웬 아가씨가 미끄러지면서 지나가던 택시에 치었습니다. 차바퀴가 넘어진 아가씨의 발목 위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일대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바로 내 눈앞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택시기사가 차에서 내려 허둥대며 어쩔 줄 몰랐습니다.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도 웅성대기만 했지 누구 하나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내가 여자를 업었습니다. 여자의 구두가 땅바닥에 뒹굴고 있었습니다.
택시기사에게 구두를 들고 따라오라 말했습니다. 그때는 명동성모병원이 YWCA 회관 길 건너편 아래쪽에 있었습니다.
여자를 업고 성모병원으로 뛰었습니다. 졸지에 처음 본 여자의 보호자가 되어 응급치료를 받게 하고, 입원 절차를 밟고, 교통사고신고를 하고, 복잡한 일을 다 맡아 처리해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여자의 집에 전화까지 해주고 난 다음에, 그만 가겠다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러자 여자가 너무 고맙다고, 연락처라도 가르쳐달라고 했습니다.
괜찮다고, 치료나 잘 받으시라고, 그냥 나오려 했지만 하도 간곡히 부탁하는 바람에 명함을 한 장 주고 나왔습니다. 그 무렵 무척 바쁠 때였습니다.
아내와 결혼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혼준비로 이것저것 신경 쓸 일이 많아 그 일은 금방 잊어버렸습니다.
***
어느 날 잘 모르는 여자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가만 들어보니 그때 그 여자였습니다.
병원에서 치료를 다 마치고 퇴원했다 했습니다. 너무 고마워 선물을 하나 준비했다고, 꼭 만나서 주고 싶다 했습니다.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 이렇게 다른 여자와 만나도 되는 것일까? 조금 망설이다 그냥 인사하고 싶다는 것이니까 한 번 만나기로 했습니다.
퇴근길에 여자와 약속한 다방으로 갔습니다. 나보다 먼저 와서 예쁘게 포장한 선물꾸러미를 들고 앉아 있었습니다.
사고가 있던 날은 경황이 없어 잘 몰랐는데 다방에서 만나 다시 보니 상당히 미인이었습니다. 이목구비가 또렷한 인형처럼 아름다운 얼굴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까 그 여자도 결혼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결혼 준비하러 명동에 나왔다가 사고를 당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자 갑자기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서로 축하한다고 말해주며 자연스럽게 각자 결혼하게 될 배우자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우리 부부가 연애결혼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선 무척 부러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 여자는 부모님이 정해준 남자와 결혼을 한다고 했습니다.
남편 될 사람이 좋은 사람이긴 한데 재미는 없는 남자라며 웃었습니다. 연애다운 연애 한 번 못해보고 그냥 결혼하는 것이 아쉽다고도 했습니다.
***
이제 헤어져야 했습니다. 다방을 나와 행복하게 잘 살라고, 인사하고 헤어졌습니다.
나는 이쪽 길로 걸어가고 여자는 저쪽 길로 걸어갔습니다. 걸어가다 문득 한 번 뒤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마침 여자도 뒤를 돌아보고 있었습니다. 짧은 순간, 서로 마주 바라보고 서 있었습니다.
내가 웃으며 먼저 손을 흔들었습니다. 여자도 웃으며 손을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각자 돌아서서 자기 길을 갔습니다. 나는 내 여자에게로 가서 결혼했고, 그 여자도 자기 남자에게로 가서 결혼했을 것입니다.
까마득한 세월이 흘러 우연히 그때 그 일을 떠올립니다. 내 아내가 어느덧 할머니가 되어버렸듯 그 여자도 지금 어딘가에서 할머니가 되어 있겠지?
잘 살았을까? 행복하게 살았을까?
***
아.
살짝 내린 첫눈이 벌써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언젠가는
내 인생도 눈 녹듯 사라져버리겠지요.
돌아보니
한평생이 잠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