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피터팬 Jan 10. 2024

아들 결혼식 주례한 날

결혼은 연애의 시작이다! 맞아?

“우리 결혼식 주례는 아빠가 해주세요.” 

    

막내아들로부터 뜻밖의 요청을 받았습니다. 큰아들 결혼식 주례를 당시 가깝게 지내던 모교 장로회신학대학 총장님께서 해주셨기 때문에 아예 둘째까지 부탁해 볼까 생각하던 중이었습니다.

      

“아빠가? …왜?”    

   

답은 간단했습니다. 며느리 될 아이가 아빠를 좋아하고 존경하니 다른 분보다 그냥 아빠가 해주었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이 녀석아. 그러면 너는?” 

    

“나도 기왕이면 아빠가 해주는 게 제일 좋지.” 

    

이렇게 해서 졸지에 아들 결혼식 주례를 하게 되었습니다.     


      

***           



짧지 않은 세월 목회하는 동안 참 많은 결혼식 주례를 했습니다. 재작년 겨울, 막내아들 친구이기도 한 우리 교회 청년의 결혼식 주례를 마지막으로 목사직 임기를 마치고 은퇴했습니다. 

     

은퇴하고 나면 더이상 주례할 일은 없을 줄 알았습니다. 이렇게 아들 녀석이 자기 결혼식 주례를 요청하리라고는 미처 생각 못 했습니다.    

  

점점 결혼식이 가까워지니까 은근히 주례사에 대한 부담도 생겨났습니다. 목사로서 결혼예식을 집례하며 주례설교를 하는 일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주례를 선다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은 아닙니다. 아무래도 목사로서의 주례사와 아버지로서의 주례사는 좀 달라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제까지 해왔던 것처럼 하지는 않기로 했습니다. 주례사는 짧을수록 좋으니 최대한 짧게, 아버지로서 아이들에게 꼭 해주고 싶었던 이야기 한 가지만 전하고 끝내기로 했습니다. 

     

메시지를 준비하면서 나 자신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과연 나는 아들에게 이런 주례사를 들려줄 만한 자격이 있는 인생을 살았을까?     


그 질문에 대한 정답은 내가 아닌 아내에게 나와야 할 것 같았습니다. 결혼식이 끝나면 꼭 물어보리라 생각했습니다.   


        

***      


    

결혼식 날입니다.  

    

“신랑 입장!”  

   

신랑이 된 우리 막내가 하객들의 박수갈채 속에 뚜벅뚜벅 내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훤출하게 큰 키. 조명 아래 반짝이는 준수한 얼굴. 아이구야. 우리 아들 녀석이 저렇게 잘난 줄은 예전에 미처 몰랐네. 나도 못말리는 팔불출 애비입니다.

    

짧은 순간이지만 갓 태어난 막내를 처음 품에 안던 날, 몰캉몰캉 코끝으로 스며들던 갓난아기의 비릿한 젖 내음을 떠올렸습니다. 아. 그게 엊그제 일 같은데 어느새 저놈이 장가를 가다니…  





 “신부 입장!”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우리 며늘아기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하늘하늘 막내아들 앞으로 걸어오고 있습니다. …와! 와! 여기저기 하객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우리 며늘아기는 누가 보기에도 한눈에 확 띄는 미인입니다. 어느 유명한 탤런트나 영화배우 못지않습니다. 오늘은 결혼식의 주인공답게 그 아름다움이 더욱 눈부시게 빛나고 있습니다.  


저 착한 얼굴. 저 착한 성품. 저 착한 말씨.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습니다. 딸 하나 있었으면, 예쁜 딸 하나 있었으면, 딸. 딸. 하고 노래 부르던 내 가슴 속에 드디어 예쁜 딸이 하나 들어오는 순간이었습니다. 




    

두 녀석이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입니다. 내 앞에 나란히 선 두 녀석을 바라보는데 마치 영화관의 스크린을 꽉 채운 로맨스 영화의 주연 배우들을 보고 있는 듯했습니다.   

   

나는 이 녀석들의 연애 스토리를 잘 알고 있습니다. 아들 며느리는 고등학교 동창입니다.  

    

어린 시절 학교 선후배로 처음 만난 후 연애소설의 주인공들처럼 헤어졌다가 다시 만났다가, 요즘 아이들답게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마침내 결혼까지 골인하게 되었습니다. 


이 녀석들도 우리 부부의 연애 스토리를 잘 알고 있습니다. 엄마 아빠가 언제 처음 만났는지, 어떻게 연애가 시작되었는지, 왜 헤어질 뻔했었는지, 어떻게 다시 만나 결혼하게 되었는지, 영화나 드라마 못지않은 우리들의 파란만장한 연애사를 두 녀석 다 줄줄이 꿰고 있습니다.    


       

***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구약성경에 아가(雅歌)서란 책이 있습니다. 아가(雅歌)란 한자어 그대로 아름다운 노래라는 뜻이며 사랑에 빠진 두 청춘남녀의 연애 시를 모은 책입니다. 물론 심오한 영적인 의미도 숨어있긴 하지만 아니, 성경에 이런 내용도 있나 놀랄 정도로 노골적인 성애의 묘사로도 유명합니다.  

    

이제껏 내가 집례한 결혼예식에선 한 번도 한 적 없던 아가(雅歌)서 말씀을 주례사로 전했습니다. 아들 결혼식이니까 할 수 있는 일이었고 은퇴목사가 되었으니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주례사 도중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들은 결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니? 결혼이란 게 무엇일까?”     


결혼이 연애의 무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연애 때가 좋았지. 결혼 해봐라. 그다음부터는 연애 끝. 고생 시작이다. 연애가 끝나고 전쟁이 시작되는 게 결혼이라고 말합니다.

     

목사도 아니고 주례자도 아닌 그냥 아빠로서, 그리고 평생을 함께 산 한 여인의 남편으로서, 결혼에 대한 정의를 내려주고 싶었습니다.   

   

“결혼은 그런 게 아니야. 결혼은 절대로 연애의 무덤도 아니고 연애의 종착역도 아니야. 그럼 뭐냐? 결혼은 또 다른 연애의 시작이다! 결혼은 새로운 연애의 시작이다!”  

   

이 주례사가 결혼식 후 한동안 화젯거리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명주례사였다고 찬양(?)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아우성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결혼은 현실인데, 결혼하면 집도 사고 아이도 낳고 지지고 볶고 살아야 하는데 그게 가능하겠냐? 어떻게 결혼하고 나서도 연애할 때처럼 살 수 있겠냐?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어쩌고저쩌고. 이러쿵저러쿵.    

 

그러나 모든 사람들의 결혼이 다 연애의 무덤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습니다. 평생 연인처럼 사는 부부도 많습니다. 나는 우리 부부도 그렇게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갓 가정을 이룬 우리 아이들도 그렇게 살기를 바랍니다. 


얘들아. 너희들 부디 평생을 연인처럼 살아라. 평생을 연애하듯 살아라. 엄마 아빠가 고난 중에도, 환란 중에도, 눈물 많이 흘리면서도 평생을 그렇게 살았으니 너희도 그렇게 살 수 있을 거야.  


         

        




우리 7080 세대 연인들의 로망은 오매불망 제주도였습니다.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떠나는 것이 7080 세대 신혼부부들의 꿈이었습니다. 그때는 제주도 가기가 요새 유럽여행 가는 것보다도 훨씬 힘들었습니다. 


요즘 아이들의 로망은 몰디브라고 합니다. 결혼을 앞둔 연인들이 오매불망 몰디브로 신혼여행 가는 꿈을 꾼다고 합니다. 우리 아이들도 마차가지였습니다. 몰디브의 로망을 품고 열심히 신혼여행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결혼식이 끝자자마자 저 머나먼 인도양의 작은 섬나라 몰디브를 향해 훌훌 날아가버렸습니다. 



***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며 주례사를 준비할 때 아내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 오늘 주례사 어떻게 들었어?” 

    

“오늘 주례 참 좋았어. 사람들이 다 은혜받았대.”  

    

“그게 아니고… 내가 물어보고 싶은 건, 우리가 정말 평생 연애하듯 산 거 맞아?”    

 

아내가 주름 가득한 눈을 잠시 깜박깜박하더니…

   

“맞잖아?”    

 

“맞아?”  

   

“우리 그렇게 살았잖아?"” 

    

"오. 그렇다면, 나 오늘 주례사 제대로 한 거네."" 


"그럼… 당신 오늘 아주 명주례사 했지."


"우리 참 잘 만났다. 완전 부창부수네."


"흐흐흐."


"하하하."


아들 결혼식 주례를 마치고 돌아오던, 유난히 하늘 맑고 푸른 오후였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결혼 직전에 만났던 여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