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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팬 Jun 03. 2024

러시아의 딸
우크라이나의 딸

얼마나 더 많은 피가 흘러야 전쟁이 끝이 날까?

두 번째 암 수술을 받았습니다.   

   

퇴원하고 집에 돌아오니 러시아에서 날아온 메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푸른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던 앳된 소녀들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 같았습니다.  

    

“보고 싶다. 이 녀석들아.”  

   

물끄러미 메일을 들여다보며 혼자 속삭였습니다.   

   

“잘들 지내고 있는 거니? 다들 무사한 거니?”    


      

***   


          

한밤중에도 해가 지지 않는 백야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그에서 여름 한 철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고 러시아 전역이 극심한 혼란 가운데 빠져있던 시기였으니 벌써 꽤 오래전의 일입니다. 끝도 없이 발아래 펼쳐지는 검푸른 삼림 위를 온종일 날아가 시베리아의 중심도시인 크라스노야르스크에 도착했습니다.    

  

공항에서 크라스노야르스크 역까지 버스로 이동한 후 시베리아 횡단 열차로 갈아타고 상트페테르부르그를 거쳐 모스크바까지 갔습니다.  

   

모스크바에서 머물던 며칠은 지금까지 악몽으로 남아있습니다. 붉은 광장에서 지갑을 소매치기당했습니다. 모스크바를 대표하는 랜드마크인 바실리 사원 앞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양파 모양의 둥근 돔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 어깨를 툭 밀치고 지나갔습니다. 그 뒤를 관광객처럼 보이는 젊은이들이 우르르 무리 지어 뒤따랐습니다.   

  

늘 관광객들로 북적거리는 명소인지라 그까짓 어깨 부딪히는 일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게 실수였습니다. 하루 일정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온 후에야 소매치기당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여권만은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어찌나 크게 당황했던지 남은 일정을 미련 없이 모두 포기해버리고 처음 목적지였던 상트페테르부르그로 급히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모스크바에서의 황당한 일을 위로라도 받듯 훗날 내 영혼의 벗이 된 카잔스키 빅토르 목사를 만났습니다. 여름 내내 그의 집에 유숙하며 그가 목회하는 작은 교회에 다녔습니다. 

     

어느 주일인가는 카잔스키 빅토르 목사의 권유로 난생처음 러시아 교인들 앞에서 설교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초롱초롱 푸른 눈을 반짝이며 내 설교를 듣던 소녀들이 있었습니다. 


             


        

“목사님. 우리에게도 만화를 가르쳐주세요.”  

   

내가 만화가라는 사실을 알게 된 소녀들이 만화를 가르쳐달라고 졸랐습니다. 

     

러시아는 거의 만화 불모지라 할 수 있는 나라입니다. 상트페테르부르그는 더더욱 클래식한 도시라서 그런지 어느 서점에서도 만화 비슷한 것조차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넵스키 대로를 지나다 보면 드보르 백화점이란 큰 백화점이 있습니다. 그 백화점 안의 작은 서점에 미키마우스 만화책이 딱 한 권 서가에 꽂혀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러시아에서 만화를 보니 너무 신기했습니다. 그게 내가 러시아를 떠날 때까지 유일하게 보았던 만화책입니다.  

     

그래도 어느 나라나 아이들은 아이들입니다. 만화를 가르쳐주자 금방 만화 그리는 재미에 푹 빠져버렸습니다. 날마다 찾아와서 만화 그리기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곧잘 따라 그렸습니다.  


              



나도 조금 욕심이 생겼습니다. 이 아이들에게 만화를 통해 뭔가 좀 더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일을 하게 할 수는 없을까? 그러다 교회 안에 OHP(Overheadprojector)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퍼뜩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어린이 만화부흥회 할 때 하던 일을 해보자.    

 

OHP 필름에 예수님의 일대기를 만화로 그리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들었습니다. 여름 한 철 내내 아이들과 예수님의 생애를 요약한 만화를 다 그렸습니다.  

    

아이들의 상상력은 놀라웠습니다. 타임머신 타고 성경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헬리콥터 타고 스쿠터 타고 예수님을 만나러 다녔습니다. 만화 속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란 없었습니다.  

    

교회에서 어른들을 다 모아놓고 전도집회를 했습니다. 평생 처음 보는 신기한 장면에 모두 넋이 나갔습니다. 이런 신기한 그림을 자기 아이들이 그렸다는 사실에 감탄하고 또 감탄했습니다.   


        


         

이 일이 소문이 나자 주변 일대의 어린이들까지 몰려왔습니다. 그 많은 꼬맹이를 나 혼자 다 가르쳐 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꼬맹이들은 소녀들이 나 대신 가르쳐주기로 했습니다.     

 

조용하던 동네에 갑자기 만화 열풍이 불었습니다. 그 열풍은 내가 러시아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까지 일어났습니다.    

  

소녀들과 어린아이들의 합작으로 나 없이도 또 한 번의 전도집회가 이루어졌고 그 행사의 자리에 상트페테르부르그 시장까지 참석했다고 합니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믿어지지 않는 일입니다.   

   

상트페테르부르그하면 유서 깊은 제정러시아의 수도였으며 지금도 모스크바의 뒤를 이은 러시아 제2의 도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로 치자면 부산시장이 그 작은 교회의 행사에 직접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내 귓전엔 재재거리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여름 한 철 내내 소녀들과 흠뻑 정이 들었습니다. 정이 드니까 언어의 장벽 따위는 별문제도 되지 않았습니다. 어느덧 이 녀석들이 나를 부르는 호칭도 목사님에서 아빠로 바뀌었습니다. 

     

러시아에서 아빠 소리를 듣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정말 딸이 생겨버린 것입니다. 졸지에 무더기로 생겨버린 딸들이 당시 중학교 2학년이던 우리 막내아들과 동갑내기여서 더욱 사랑스러웠습니다. 그리고 러시아의 딸들과 함께 하는 하루하루가 행복했습니다. 

    

우리 집안은 조상 대대로 줄줄이 아들만 많은 집구석입니다. 우리 아버지도 아들만 넷을 낳았습니다. 큰아버지도 아들만 다섯을 낳고 작은아버지도 아들만 넷을 낳았습니다. 나도 아들만 둘을 낳았습니다. 우리 큰아이도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아 여지없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원체 수컷(?)들만 바글바글한 집구석이다 보니 어릴 적 우리 집 풍경은 꼭 동물원 같았습니다. 가끔 누나가 있고 누이동생이 있는 친구 집에 놀러 가면 집안 분위기가 너무 부러웠습니다.   

   

딸이 있는 집은 냄새부터가 달랐습니다. 우리 집구석은 사내놈들 발 고린내 밖에 안 나는데 딸이 있는 집은 향기가 났습니다. 방마다 꽃병이 있어 꽃향기가 나고, 화장품 향기도 나고, 심지어 딸들은 말할 때도 향기가 나는 것 같았습니다.   

   

아들만 있는 집구석은 대화만 시작하면 으르렁거리는 사자로 변하는데 딸이 있는 집은 어쩌면 그리 말하는 것도 입안에서 살살 녹듯이 상냥하고 부드럽고 친절하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딸은 어느나라나 다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러시아의 딸들도 모두 예쁘고 상냥하고 부드러웠습니다. 그중 특히 악사나란 녀석이 나를 더 잘 따랐습니다. 어디를 가든 꼭 내 팔짱을 끼고 졸졸 따라다녔습니다.    


        


          

미술에 관심이 많은 녀석이라 함께 에르미타주 박물관에도 갔던 적이 있습니다.   

   

에르미타주 박물관은 영국의 대영제국 박물관. 프랑스의 루블 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 중의 하나라고 알려진 어마어마한 규모의 박물관입니다. 고대세계의 이집트 유물부터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피카소까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소장된 예술품들을 모두 보려면 잠깐씩만 둘러보아도 몇 년 세월이 걸린다고 합니다. 

     

여기저기 구경 다니던 녀석이 고갱의 그림에 꽂혔습니다. “과일을 든 여인”을 유심히 바라보던 녀석이 구리색 피부의 여인이 고갱의 부인이란 말을 듣고는 비상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고갱은 프랑스 사람인데 어떻게 저 여자와 결혼할 수 있었나요?” 

    

“타히티섬이 너무 좋아서 그 섬에서 영원히 살려고 타히티섬의 원주민 여자와 결혼했단다.”  

    

“그러면 고갱은 타히티섬에서 저 여자와 영원히 살았나요?”    

 

“……아마도 그랬겠지?”     


그러나 내 말은 거짓말이었습니다. 파리에서 결혼한 첫 번째 아내와 헤어지고 타히티섬에 들어갔을 때 고갱의 나이는 사십 대 중반이었습니다. 그리고 타히티섬에서 모델로 처음 만난 구리색 피부의 두 번째 아내는 열세 살이었습니다.  

    

몇 년 후 고갱은 타히티섬을 떠나 다시 파리로 돌아갑니다. 그때 아무 죄책감 없이 나이 어린 아내를 버립니다. 파리에서 명성을 얻은 후 도로 타히티섬으로 돌아온 고갱은 수많은 원주민 여인들과 방탕한 생활을 즐기며 살아가다가 또 다른 열네 살 소녀에게 딸까지 낳게 됩니다.   

   

그런 이야기를 차마 이 녀석에게 들려줄 수는 없었습니다. 악사나 역시 엄마와 단둘이만 사는 이혼가정의 자녀로서 남몰래 아빠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에서 만난 딸 중 율랴라고 하는 우크라이나가 고향인 소녀도 있었습니다. 짙은 금발에 초록빛 눈동자가 신비로운 소녀였습니다. 늘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했고 수줍음이 많았습니다.    

  

당시 나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저 소비에트 연방 내의 같은 나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슬라브족이란 민족적 뿌리만 같을 뿐 러시아와는 복잡하고도 치열한 애증 관계로 얽혀있는 엄연히 다른 나라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율랴는 내성적인 아이였지만 고국에 대한 자부심만은 남달랐습니다. 우크라이나가 유럽에서 유일무이하게 몽골 군대를 격퇴해버린 신화적인 코사크 기병대의 후예들이라는 사실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코사크 기병대의 피가 흐르고 있는 우크라이나 민족은 놀랍도록 용맹합니다. 

    

오늘날 우크라이나가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지닌 러시아와 저렇게 잘 싸우고 있는 것이 결코 서방세계의 군사 지원 때문만은 아니로구나 하는 생각을 뉴스를 볼 때마다 가끔 하게 됩니다. 

     

율 부린너가 주연으로 나온 60년대의 영화 중 “대장 부리바”가 있습니다. 그 영화를 기억하시는 분들은 아마 최소한 육십 대 후반에서 칠십 대 이상은 되신 어르신들일 것입니다.   

   

내가 국민학교 다니던 시절 재미있게 보았던 그 영화가 우크라이나를 배경으로 한 코사크 기병대의 영화인 줄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율랴를 통해 알게 된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러시아의 딸 악사나와 우크라이나의 딸 율라는 친자매처럼 가까웠고 늘 붙어 다녔습니다. 고려인 3세 소냐란 아이와 여름방학 때 흑해 가까운 율랴의 집에 다녀온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내 평생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을 안겨준 시간이 속절없이 마구마구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여름이 서서히 끝나가던 어느 날 나는 소녀들과 눈물바다를 이루며 작별해야 했습니다.   

  

그 후로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영원히 귀여운 소녀로만 남아있을 것 같던 녀석들도 하나씩 둘씩 결혼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더니만 나중에는 모두가 다 아기 엄마들이 되었습니다.     

  

러시아에서 돌아온 나는 상트페테르부르그교회의 후원회장이 되어 미약하나마 카잔스키 빅토르 목사의 목회를 돕는 일에 힘을 보탰습니다. 러시아 교회의 젊은이들을 직접 한국으로 불러들여 교육하고 훈련시켜 파송하는 일도 하였습니다. 그런 일들은 내가 목회를 은퇴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       


    

두 번째 암 수술을 받고 퇴원해서 집에 돌아오니 러시아에서 보낸 메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푸른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던 앳된 소녀들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 같았습니다. 친자매보다 더 다정했던 저 아이들의 남편들이 지금 서로 총칼을 겨누며 싸우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딸들아. 우크라이나의 딸들아."


메일을 보며 마음속으로 속삭였습니다.


"나도 너희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단다. 러시아를 위해 우크라이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단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소식이 끊어진 지 오래인 아이들도 많습니다. 


도대체 앞으로도 얼마나 더 많은 젊은이들이 피를 흘려야 이 전쟁이 끝이 난다는 말인가?    

  

오. 하나님. 부디 저 딸들을 지켜주소서. 저들의 남편과 자녀들을 눈동자처럼 지켜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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