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오해 한다

이사

by 김현주

그녀가 ‘길녀’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순전히 장수를 바라는 아비의 마음 때문이다. ‘길게 살라는 의미겠지?’ 그 고장에서는 ‘길다’를 ‘질다’라고 소리 내는 이유로 그녀는 ‘질녀’로 불렸다.


그녀가 세상에 나온 1934년, 태어나면서 세상을 등지는 아이들이 많았고 사망하는 산모도 많았다. 그녀의 어머니도 그녀를 낳기 전에 출산한 자식을 모두 잃었다. 게다가 산고가 심한 탓이었는지 매번 실신했다. 그녀가 태어나는 날도 그랬다. 산모가 깨어나기를 기다렸지만 일어나지 못했다. 눈이 소복하게 내리는 날이었다. 아비는 어렵게 얻은 딸마저 잃고 싶지 않아 명줄이 길기 바라는 마음을 이름에 담았다. 아비는 새 장가를 들었다. 그녀는 열대여섯 살 차이 나는 새어머니를 맞았다. 묘순 이라 불렸다. 재주가 묘하게 많았다 한다. 어떤 이름이든 의미가 있기 마련이다. 그녀는 새어머니와 살기보다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한학자이신 할아버지는 손녀에게 한자뿐 아니라 세상 돌아가는 이치도 알려 주셨다. 그녀가 중학교 입학하는 해에 김구 선생이 돌아가셨는데 그녀는 집안에서 귀동냥으로 그 소식을 들었다. 그 덕에, 입학 면접에서 “최근 돌아가신 훌륭한 분이 누구지?” 물었을 때, “김구 선생입니다.”라고 똑똑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그것이 수석 합격의 비결이었을 거라며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교육열이 높으셨던 할아버지 덕에 국민학교와 중학교 입학이 가능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 선생이 “일본어 잘하네?”라며 칭찬한 얘기를 그녀는 매번 힘주어 말했다. 반장도 맡았다며 화려했던 어린 시절을 자랑했다. 유관순 열사를 생각하면 ‘그게 자랑할 일인가?’ 생각했지만 그녀의 말을 언제나 끝까지 경청했다. 물론 그녀의 영민함을 인정한다.


성적이 좋아 간호학교 입학을 권유받았지만 의외로 진학을 결심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녀는 현모양처를 소원했다. 애매한 철학인 그 말은 그녀를 주저앉혔다. 좋은 신랑 만나 결혼하고 아이 낳고 바느질 잘하는 것이 훌륭한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보니 왜 그런 결심을 했는지 모르겠다며 후회했다. 간호학교에 입학했던 친구의 화려한 성공을 알고부터 그랬다. ‘세상 이치가 그렇듯 자식을 다섯이나 얻기 위한 하늘의 뜻은 아니었을까?’ 그녀는 대학 재학 중인 한 살 많은 신랑을 중매로 만났다. 그녀의 배다른 동생은 “형부가 제일 잘생긴 남자인 줄 알았지”라고 했으니, ‘그녀 또한 키 크고 멋진 외모에 반해서 결혼을 결정한 것은 아닐까?’ 한편으로는 ‘학생 신분에 결혼 생각을 한 것은 무책임한 거 아니야?’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것에 대한 속사정은 모른다. 홀시어머니와 돌아가신 시아주버님의 자식들과 한 지붕 아래서 사는 동안 딸 둘과 아들 둘을 얻었다. 짧지 않은 시집살이를 마치고 동네 언덕배기 오두막집으로 분가했다. 그녀의 첫 번째 이사다.


좁은 방 두 칸에 부엌이 있는 오두막에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가난했지만 젊고 건강했던 그녀의 화양연화는 아니었을까?’ 어린 자식들의 재롱잔치가 매일 있었다. 그녀를 출가시킨 아비는 새어머니 몰래 돈과 살림살이를 챙겨 주었다. 그녀는 그런 아비를 성당 신자가 된 후에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했다. “나는 하나님 아버지보다 친정아버지를 생각하며 기도한다.”라고 했다. 아비는 몰래 딸 집 근처를 서성이며 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웃음소리가 담장을 넘었을 것이니 흐뭇하게 여기며 돌아갔겠다.’ 절약이 몸에 밴 젊은 부부는 돈을 모아 텃밭이 있는 마당 넓은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두 번째 이사다.


그 집에서 둘째 딸 밑으로 여섯 살 터울의 아들 하나를 더 얻었다. 아들을 이미 둘씩이나 두었지만 이번에도 아들이기를 바랐다. 하기야 둘째 딸 태몽에 달 속 포도대장이 보였다고 “아들을 확신하고 자신 있게 낳았다”하니 그녀의 아들에 대한 욕심을 가늠하겠다. 달이 딸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며 서운한 기색을 보이기도 했다. ‘태몽을 원망이라도 한 걸까? 달이 아닌 해가 보여야 했는데….’ 그녀는 둘째 딸에게 팔베개를 해주며 “밭에 터를 팔았느냐, 논에 터를 팔았느냐”를 물었다. 어린 나이에 정답을 고민했을 것이다. 요즘 말로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를 물었을 때 아이들이 고민에 빠진다는 거랑 별반 다르지 않은 질문이다. 결론은 둘째 딸이 논에 터를 팔았던 셈이 되었다. 딸이 좋은 일 했으니 대접받아야 마땅했으나 남아 선호 사상에 치었다. 약골로 태어난 막내는 그녀의 보호 대상이었다. 당시 꽤 유명한 ‘에비오제’라는 영양제뿐 아니라 갈치 요리 가운데 토막은 으레 막내 앞에 놓였다. 시골에서 갈치 요리는 예사 음식은 아니다. “버릇 나빠지게 왜 그래?” 다른 자식들이 얘기해도 소용없었다. 남편 다음의 서열이었다. 사랑에 보답하듯 막내는 K대 의대에 진학해 동네에서 성공모델이 되었고 그녀 또한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얼마나 자랑스러웠을까?’


한국 전쟁 중에 남편은 병역을 기피했다. 영화“포화 속으로”에서 학도병들의 슬픈 전투 장면을 떠올리면 애국자 집안은 아닌 게 확실하다는 생각이 든다. 법과 대학을 졸업하면 적어도 경찰은 됐던 모양인데 병역 미필자의 꼬리표는 취업 길을 막았다. 그녀의 친정은 천석지기였고 근처 여러 곳에 양조장을 꾸리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대학 졸업한 사위에게 집과 거리가 먼 양조장 하나를 맡겼다. 다행이기도 불행이기도 한 일이었다. 두 사람은 알뜰한 살림살이로 논과 밭을 넓혀갔고 그만큼 일도 많았다. 이른 아침에 막걸리를 걸러야 하는 양조장 일 탓에 남편은 띄엄띄엄 집에 올 수밖에 없었다. 일주에 서너 번 정도만 집에 왔다. 농사일을 거드는 머슴도 있고 식모를 두기도 했지만, 집안일은 많았다. 그녀는 버거울 법도 한데 잘 꾸려갔다. 대신 집에는 한약 냄새가 자주 났다. 집안일을 거의 도맡아 해서 무릎도 시원찮았고 나이 들어 허리가 아팠던 것도 농사일에 치여서일 것이다.


오두막집에서 큰 집으로 이사 오는 날에 동네잔치를 했다. 큰 가마솥에 새알심을 넣은 팥죽을 끓였다. 동네 사람 모두가 축하했다. 성냥이나 양초 선물이 많았다. ‘전기가 들어왔지만 자주 정전이 되기도 하고 퓨즈가 끊어져 고칠 동안 불이 필요한 이유에서였을까?’ 요즘 이사 선물로 세제나 휴지를 주는 것과 비슷한 문화겠다. 좁은 집에서 살던 자식들은 신났다. 동네 무녀 할머니를 당골 애미라 불렀는데 그녀는 시루떡과 과일을 차려 놓은 상 앞에서 징과 꽹과리를 두드리며 집안의 안녕을 빌었다. 삯으로 쌀자루를 챙겨갔다. 눈매가 매서웠다. 뒤이어 그녀의 시어머니 역시 손바닥을 비벼가며 빌었다. 조앙신에게도 빌었다. 장독대에도 촛불을 켜 놓았다. 이날만이 아니라 남편의 생일날에도 이 할머니를 불렀다. 도대체 무슨 말을 중얼거리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참이나 했다. ‘그녀가 성당을 다니면서도 부엌에 정화수를 잊지 않고 챙겼던 것은 이 습관 때문은 아닐까?’ 그녀의 믿음은 복합 신앙이다. 방이 네 개, 부엌 두 개, 작은 대청마루가 있는 집이었다.


집은 세월을 살면서 모습을 여러 차례 바꿨다. 새마을 운동을 시작으로 지붕이 개량되고 마을길이 넓어지고 콘크리트가 흙을 대신했다. 자식들은 공부한다며 타관으로 나갔고, 취업과 결혼으로 집을 떠났다. 그녀와 남편만 남았지만 집을 허물고 양옥집을 지었다. 살만했던 그 동네에 유행처럼 퍼졌다. 집들이가 있었다. 도시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널찍한 도시형 주택이다. 우물이 있고 계절 따라 꽃이 피던 마당과 화단이 옛 모습을 잃어 서운했겠지만 세련된 농가인 것은 분명했다. 우물이 사라지고 요소요소에 수도꼭지가 놓였다. 살아 있는 것은 늙는다. 주인이 나이 들어가면서 감나무도 시들고 대추나무도 병들고 채소들도 예전의 모습으로 자라지 못했다. 마을을 떠난 사람도 있었고 돌아가신 어른도 많았다. 연날리기, 팽이치기, 쥐불놀이, 고무줄놀이, 숨바꼭질, 땅따먹기하는 아이들로 시끌벅적했던 골목과 벌판은 고요하다. 마을 회관에 몇몇 어른들만 오손도손 하루를 산다. 빈집이 늘고 공동 우물도 사라졌다. 변산 노을이 내려앉는 동네 앞 들판도 색이 바랬다. 신작로가 큰길로 바뀌었지만, 버스는 뜸하게 다닌다. 풍요로웠던 밭은 대나무가 점령했고, 풀밭이 되었다. 동산 소나무만 웅웅 산바람을 홀로 맞으며 건재하다.


그녀가 남편을 떠나보내고 “동네가 썩게 생겼다”라며 그녀 역시 훌쩍 이사 갔다. 어린 시절, 단명을 운운한 스님의 얘기를 믿었음인지 “막내 장가드는 날까지 살 수 있을까?”를 걱정했지만, 구순이 되기 전이긴 해도 늦둥이의 딸이 대학생이 될 때까지 무난히 살아냈다. ‘‘길녀’, ‘질녀’라 불러 준 이름 덕일까? 아니면, 호적에 ‘길 영’ 자를 넣어 작명한 덕일까?’

가는 길이 힘든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힘들게 좁은 나뭇집으로 이사했다. 내가 아는 세 번째 이사이자 마지막 이사다. 마당도 없는 그 집에 들어가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반듯하게 누웠다. 빈집 마당은 풀로 덮이고 꽃들도 시들해졌다. 거실 커다란 괘종시계는 볼 때마다 두 시만 가르켰다. 그녀가 떠난 겨울, 무심하게 장독대 항아리에 눈만 쌓였다. ‘성당에 다니면서도 하나님 아버지보다 내 아버지를 찾는다고 했는데 잘 만나 얼싸안았을까? 어떤 집을 짓고 살고 있을까? 네 번째 이사는 잘했을까?’


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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